21. 나주 괘서사건·심정연 시권(試券)사건

장기읍성 둘레길. ‘권력은 지우려했고 세상은 간직하려 했던 유배인’들의 심정을 느껴보려 함인지 최근 들어 장기유배문화체험촌과 연결된 둘레길을 찾는 관광객들이 부쩍 늘고 있다.

경종 즉위 후 노론과 소론은 연잉군(훗날 영조)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문제로 마찰을 빚었다. 급기야 서로 상대방을 역적으로 몰아가는 극단적 붕당싸움으로 번졌다. 이런 복잡한 시기에 경종이 갑자기 죽고 노론의 지지를 받은 영조가 즉위했다. 위기에 처한 소론의 급진세력(준소)과 남인들은 영조의 정통성을 부인하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이들의 불만은 결국 무신난(戊申亂·이인좌의 난)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무신난이 진압된 뒤에도 또다시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를 두고 윤지(尹志)가 주도하였다고 하여 ‘윤지(尹志)의 난,’ 또는 옥사가 일어난 해가 1755년 을해년(乙亥年)이므로 ‘을해옥사(乙亥獄事)’라고도 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을해옥사는 이해 2월에 발생한 나주괘서사건과 바로 뒤이어 5월에 일어난 ‘심정연(沈鼎衍) 시권(試卷:답안지)사건’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나주괘서사건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영조는 이 사건을 불만을 품은 소론급진 세력들의 역모로 몰아갔다. 사건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 되자 으레 그랬듯이 유3천리 경상도 장기현은 유배인들을 맞느라 분주했다. 장기로 배정된 유배인의 숫자는 확인된 것만 무려 아홉 명이나 된다. 김창대((金昌大), 이양조(李陽祚), 이석조(李錫祚), 단이(丹伊), 단이의 강보에 싸인 생후 1년 미만 된 아이, 강이노(姜二老), 이백련(李白連), 성불상 희(喜), 김몽성(金夢成)이 그들이다.

이 사건의 발단은 단순했다. 1755년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趙雲逵)는 나주의 객사 망화루(望華樓) 벽에 익명의 괘서(掛書)가 붙은 사실을 보고받고 조정에 급보했다. 괘서는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 차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영조는 필시 무신여당의 행위라고 단정을 짓고 좌우 포도대장에게 기한을 주며 괘서의 주모자를 색출하여 체포할 것을 지시했다.

수사 7일 만에 주모자로 체포된 자는 나주에 살던 윤지(尹志)였다. 그는 숙종때 과거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사헌부의 정5품)을 지냈던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 윤취상(尹就商)은 형조판서를 지낸 인물인데, 1724년(영조 즉위)에 있었던 김일경(金一鏡·소론의 거두)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문 끝에 죽었다. 윤지도 그 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8년 만에 나주로 이배(移配)된 인물이었다.

망화루. 전라도 나주 금성관 출입문인 이 누각 앞은 임진왜란 때 김천일의병장의 출병식, 영조 때의 나주괘서사건, 구한말 단발령의거, 일제강점기 항일학생운동 등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주 무대였다.
망화루. 전라도 나주 금성관 출입문인 이 누각 앞은 임진왜란 때 김천일의병장의 출병식, 영조 때의 나주괘서사건, 구한말 단발령의거, 일제강점기 항일학생운동 등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주 무대였다.

윤지는 자신의 가문을 파멸로 몰아넣은 노론과 영조를 언젠가는 제거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자면 세력들을 모아야 했다. 우선 아들 윤광철(尹光哲)을 통해 나주지역을 중심으로 필묵계(筆墨契)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표면적으로는 학동들의 계모임이었지만, 실제로는 거사를 위한 비밀결사단체였다. 또 전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과 아전들도 포섭했다. 집안과 교유하던 유배인들 뿐 아니라, 서울과 충청도 지역에서도 뜻을 같이하는 집안들을 끌어들였다. 세력이 결집되자 윤지는 먼저 민심을 동요시키고자 했다. 1755년(영조 31) 정월, 그는 조정을 비방하는 익명의 글을 작성하여 처남과 집안의 노비를 시켜 몰래 나주 객사에 붙이도록 했다. 하지만 수사망을 피해나가진 못했다. 작은 고을에서 목숨을 걸고 영조를 비난할 만큼 간 큰 양반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사는 40일간 진행되었다. 윤지와 친분관계에 있던 나주 지역의 관리와 아전들, 같은 처지에 있던 유배인들, 윤지에게 학문을 배웠던 자들, 편지를 주고받았던 서울의 소론 정치인들이 하나둘씩 체포되었다. 윤지는 영조의 직접 심문을 받았으나 자백을 하지 않고 버티다가 능지처사되었다.

이 해 3월 8일, 영조는 왕세자인 사도세자를 비롯한 백관과 도성의 백성들이 지켜보도록 한 뒤, 참혹하게 윤지의 아들 윤광철을 공개 처형했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절대 권력을 과시하고 통치기반을 다지기 위한 본보기의 하나였다. 이로써 윤취상의 집안은 아들인 윤지와 손자 윤광철까지 3대가 영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래도 화가 안 풀린 영조는 윤지 부자의 집을 연못으로 만들어버렸다. 박찬신(朴纘新)은 자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즉시 남대문 밖에서 효시되었다. 이들 외에도 조정과 포도청 등에서 60여 명이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김윤(金潤)·조동하(趙東夏)·민후기(閔厚基)·민효달(閔孝達)·김주천(金柱天)·이시희(李時熙)·이명조(李明祚) 등도 공범으로 몰려 함께 참형을 당했다. 이광사(李匡師)·윤득구(尹得九) 등은 귀양을 갔다. 특히 서예가이자 양명학자로 유명한 이광사는 윤광철과 몇 차례 서신을 주고받은 것 때문에 의금부에 하옥되었는데, 그가 참형을 받을 것이라는 소문에 절망감을 느낀 부인 유씨는 두 아들과 일곱 살 배기 딸 하나를 두고 목을 매달아 자결했다. 친국 끝에 종신유배형을 받은 이광사는 총 23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유배지 신지도(薪智島)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 사건으로 모두 65명이 화를 입었다. 영조 재위기간에 모두 열다섯 차례의 괘서사건이 발생했는데, 단일 괘서사건으로 가장 많은 인명이 살상된 것이다.

피비린내가 잠시 멈춘 그해 3월 20일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김창대(金昌大)는 사건 연루자인 임천대(林天大)와 같이 나주에서 조직한 필묵계 계원 중 한 사람이었다. 또 그보다 열흘 뒤에 장기현에 도착한 이양조(李陽祚)와 이석조(李錫祚)는 참형을 당한 이명조의 동생들이었다. 이들은 한양 사람들로서 윤광철과 교유했다는 이유로 화를 입었다.

영조는 나주괘서사건을 처리한 후 종묘에 나가 역적들을 토벌했다고 고하고, 5월 2일에 춘당대(春塘臺)에서 특별과거시험인 토역경과정시(討逆慶科庭試)를 열었다. 나주 괘서사건이 마무리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실시한 특별과거시험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시험장이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험 답안지(試券)에 콩알만 한 작은 글씨로 영조의 치세와 조정의 인물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비판하는 내용과, 익명의 투서까지 함께 나왔던 것이다. <영조실록>에는 답안지와 같이 제출한 투서의 내용이 너무 적나라하여 ‘임금이 다 보지 못하고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적고 있다.

조사결과 주인공은 나이 스물아홉의 심정연이었다. 심정연은 본관이 청송(靑松)이고,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무신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이미 큰 화를 입고 있었다. 아버지 심수관(沈受觀)과 형인 심성연(沈成衍)·심익연(沈益衍)이 모두 무신난 때 죽임을 당했다. 심정연은 친국하는 영조에게 ‘이는 일생 동안 내가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생각으로 과장(科場)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써 두었던 것’이라고 답했다.

심정연은 윤지의 숙부 윤혜(尹惠)와 모의했으며, 김일경의 종손인 김요채(金耀采)·김요백(金耀白) 등과 같이 춘천에서 거병(擧兵)을 계획했다고 자백했다. 사건은 이제 역모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윤혜를 비롯한 여러 명이 춘천에서 잡혀왔다. 영조는 갑옷을 입고 숭례문의 누각에 서서 그들의 심문을 감독했다. 윤혜로부터 압수한 문서에는 선왕들의 휘(諱:이름)가 적혀 있었다. 영조가 그 이유를 묻자 ‘내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참고하려고 썼다’고 태연스럽게 답했다. 영조가 주장(朱杖:붉은 곤장)으로 마구 치게 했으나, 윤혜는 혀를 깨물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종묘로 달려간 영조가 엎드려 ‘저의 부덕으로 욕이 종묘에 까지 미쳤으니 제가 어떻게 살겠습니까?’라고 흐느낄 정도로 선왕들의 휘는 금기였던 것이다.

윤혜가 드디어 대역부도의 죄를 시인하자 영조는 대취타(大吹打:군악)를 울리도록 지시했다. 훈련대장 김성응(金聖應)에게는 윤혜를 효수(梟首)하게 한 후, 그 머리를 깃대 끝에 매달고 여러 백관에게 돌아가며 조리돌리도록 명했다. 이를 말리는 판부사 이종성을 곧바로 귀양보내고, 즉시 윤혜의 머리를 바치지 않은 김성응에게는 곤장까지 친 후 귀양을 보내버렸다. <영조실록>에도 이때 영조는 ‘술에 취해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고 적고 있다. 분노 속에 이성을 상실한 영조는 그나마 남아 있던 소론세력들을 대거 숙청하기에 이른다.

심정연은 주모자 윤혜·김도성(金道成)·신치윤(申致雲)·강몽협(姜夢協)·강몽상(姜夢相)·유봉린(柳鳳麟)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이 밖에도 김일경의 일파라고 하여 김인제(金寅濟)·박사집(朴師緝)·이전(李佺)·이준(李峻)·유수원(柳壽垣)·김성(金渻) 등도 참형을 당했고, 그 가족들이 연좌된 것이다. 아울러 심정연 등이 춘천부의 사람들이었으므로 춘천부가 현(縣)으로 강등되었고, 유수원이 충주 출신이었으므로 충주목(牧)이 충원현(縣)으로 강등되었다.

천의소감. 1721년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된 이후 1755년 나주벽서사건까지 여러 역모 사건의 원인을 설명하고 세제 책봉이 정당한 처사였음을 밝힌 책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천의소감. 1721년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된 이후 1755년 나주벽서사건까지 여러 역모 사건의 원인을 설명하고 세제 책봉이 정당한 처사였음을 밝힌 책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그 여파는 동해 땅 끝 장기고을까지 흘러들어 왔다. 1755년 (영조31) 5월 14일, 강몽상의 처 단이(丹伊)와 그해 출생하여 아직 이름도 짓지 못했던 아들 하나, 그리고 조카 강이노(姜二老)가 유배객의 신분이 되어 장기현으로 왔다. 강몽상은 강몽협의 사촌 동생인데, 60여 명으로 춘천부(春川府)를 공격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당했다. 이들만이 아니었다. 그해 5월 18일에는 이준(李埈)의 손자 백련(白連), 며느리(子婦) 희(喜)가 왔고, 6월 9일에는 김성(金渻)의 서질 아들 김몽성(金夢成)이 장기로 왔다.

연달아 일어난 이 두 사건으로 처형당한 소론 강경파는 500여 명에 달했다. 영조는 이미 지난 무신난 때 용서해 줬던 사건의 관련자들을 다시 역적으로 규정짓고 해당 가족들을 연좌시켜 처단하기도 했다. 또 이종성(李宗城)·박문수(朴文秀) 등 극소의 인물을 제외하고는 소론 온건파들도 모두 조정에서 쫓아냈다. 그해 11월, 영조는 이를 계기로 <천의소감(闡義昭鑑)>이란 책자를 펴냈다. 을해옥사에 연루된 인사들의 숙청, 왕위계승 과정, 재위 기간에 발생한 옥사 처리의 정치적 정당성을 천명하기 위해서였다.

다음 해인 1756년(영조 32) 2월, 영조는 노론에서 정신적 지주로 삼는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했다. 드디어 노론이 한 당파의 이념을 뛰어 넘어 국가의 이념임을 선포한 셈이었다. 소론과 남인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정도로 전락하였고, 노론들의 독주가 진행되었다. 아울러 전제군주가 된 영조는 어지간한 신하들의 반대에도 자신이 원하는 일은 밀어붙였다. 균역법의 전면 실시, 서얼의 등용 등 영조 후반의 과감한 제도개혁은 이처럼 광기(狂氣)의 피비린내 나는 굿판을 벌이고 나서야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이상준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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