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호(邑號)를 강등하라
읍호(邑號)를 강등하라
  • 등록일 2019.11.05 18:30
  • 게재일 2019.11.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 양찬규(梁纘揆)의 옥사, 이홍범(李弘範)의 영조 비방 사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남원부의 관아터이다. 남원부는 조선 전기인 1413년(태종13) 남원도호부로 개편된 호남의 중심고을이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남원부의 관아터이다. 남원부는 조선 전기인 1413년(태종13) 남원도호부로 개편된 호남의 중심고을이었다.

1739년(영조15) 10월 11일, 전라도 남원에 사는 양재육(梁再六)이란 사람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되어 왔다. 땟국이 꾀죄죄하게 흐르는 찢어진 옷, 헝클어진 머리에 오목한 눈만 번들거리는 그의 몰골에서, 걸어온 ‘유3천리’ 유배길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실감케 했다.

양재육은 평범한 농부였다. 헌데 그가 동해안 땅 끝 고을인 여기까지 흘러온 사연은 이도령과 성춘향의 이야기로 유명한 저 남원부(南原府)를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시킬 만큼 큰 사건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읍호(邑號)는 고을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고을의 위격(位格)’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 왕들은 집단적 상벌 조치의 하나로 읍호를 올리거나 내림으로써 왕실에 대한 충성과 협조를 강요했다. 왕비의 출신지나 왕의 태실을 봉안하는 곳 , 또는 왕사나 국사의 고향과 같이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고을은 읍호가 승급된다. 반면에 고을에서 삼강(三綱:군신·부자·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세 가지 도리)과 오상(五常:인·의·예·지·신의 5가지 기본적 덕목)의 도덕을 심하게 위반한 강상죄인(綱常罪人)이나 대역죄인이 발생한 고을은 읍호가 강등되기도 했다. 나름의 효과가 있었기에 조선 내내 왕들은 지방통제의 수단으로서 이 제도를 자주 이용하였다.

장기현이 속한 경주부도 ‘읍호강등’의 수모를 겪은 곳이다. 1650년(효종 원년) 경주부의 속현으로 있던 기계(杞溪·현재 포항 기계면)에서 일어난 일이다. 예천에서 도망해 온 종 대립(大立)이란 자가 기계로 도망을 와서 숨어 살고 있었다. 본 주인이 어떻게 알고 그를 찾아와 잡으려 하자, 그는 도리어 그 주인을 죽여 버렸다.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이 사건은 강상죄에 해당되었으므로 대립은 처형되었고, 경주부(府)의 읍호는 강등되어 경주목(牧)이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살인이 일어난 곳은 경주부 기계현이지만, 죽은 주인과 종 대립은 사실상 예천 사람이었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게 전개됐다. 본래 강등된 읍호는 10년이 지나야 승호하였지만, 이 사건은 8년 후 다시 부(府)로 승격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5년 뒤에는 이보다 더 끔찍한 사건이 관내에서 발생했다.

 

장기면 명촌마을 전경. 포항 장기면 서촌이다. 장기읍성 북문 아래에 있는 이 마을은 읍성에 근무하는 아전과 군관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다. 지금은 마을이 거의 사라졌지만 조선시대에는 이 마을 사람들이 주로 보수주인이 되었기에 집집마다 유배객 한 둘 씩은 거쳐갔다.
장기면 명촌마을 전경. 포항 장기면 서촌이다. 장기읍성 북문 아래에 있는 이 마을은 읍성에 근무하는 아전과 군관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다. 지금은 마을이 거의 사라졌지만 조선시대에는 이 마을 사람들이 주로 보수주인이 되었기에 집집마다 유배객 한 둘 씩은 거쳐갔다.

1665년(현종6) 8월, 경주부 서면(西面)에 사는 이경무(李慶楙)가 아내를 박대하자 그의 아내 곽영(郭英)이 원한을 품고 아들 이만(李萬)과 공모하여 그를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이들 모자는 집에서 거느리는 노비 옥매(玉梅)와 같은 집에 살고 있던 임용(林龍)·사남(士男)·최덕창(崔德昌)·암외(巖外)·치만(致萬) 등과 함께 밤을 틈타 경무를 돌로 쳐 죽였다. 조정은 이를 강상윤리를 위반한 대표적인 사례로 간주하여 매우 엄중하게 다스렸다. 임금이 특별히 경차관(敬差官) 신후재(申厚載)를 내려 보내 조사하게 했다. 후재가 미처 경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곽영은 옥에서 죽었다. 이만 및 같은 패거리들이 범죄사실을 순순히 자백하였으므로 모두 한양으로 압송해가 의금부에서 국문하였다. 임금이 이들처럼 극도로 흉악무도한 자는 잠시라도 이 땅에서 살려두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그믐과 보름의 금기에 구애받지 말고 즉시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덩달아 경주부윤은 종2품에서 2등급이나 낮은 종3품 부사로 강등되었다. 이 사건은 죄질이 매우 좋지 않았기에 경주가 다시 부윤이 부임하는 부(府)로 승호하는 데는 14년이나 걸렸다.

영조 시대에는 남인들과 준소(峻少·소론 강경파)들의 입지가 너무 좁았다. 영조 4년의 무신난(이인좌의 난)은 정계에서 배제되고 중앙의 실권에서 멀어진 남인과 소외된 준소 세력이 연합하여 일으킨 반란이었다. 이 반란 이후에도 뚜렷한 대안이나 해결책이 없던 현실 속에서 이들은 영조와 노론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영조는 5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지만, 재위기간 중 반을 넘는 전반기 30여 년을 각종 모반과 반역에 시달리면서 불안하게 보냈다.

1733년(영조9) 7월, 남원의 성 변두리에서 괘서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정을 비난하고 정부의 관리를 비판하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리고 글 아래쪽에 이여매(李汝梅)와 이여진(李汝榛) 형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관에서는 이들 형제를 즉시 체포하여 추궁했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후 고을을 탐문하던 남원현감은 김영건의 집에 똑 같은 흉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체포하여 추궁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이 괘서사건의 주모자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김영건과 그 아들들은 이여매 형제와 평소 원한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처벌받게 할 목적으로 괘서 아래쪽에 마치 이 형제가 그 글을 작성한 것처럼 이름을 적어 넣었던 것이다. 이 사건의 주모자인 김영건을 비롯한 김원팔 형제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1739년(영조15)에 일어난 양찬규(梁纘揆)의 옥사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이미 무신난이 일어난 지 11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그동안 관련자들이 다수 처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남원 지역에서는 여전히 무신난의 재현을 꿈꾸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양찬규의 모반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표면에 드러났다.


사건의 내용은 이랬다. 1739년 9월 16일, 두 남자가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집에 찾아와 문지기에게 남원에 사는 친척이라고 전하며 주인 만나기를 청했다. 김주신은 숙종의 장인이었다. 그러나 행색이 초라한 이들을 보고 문지기가 밖에서 쫓아버렸다. 얼마지 않아 이들이 다시 찾아와 이번에는 서장(書狀·편지)을 가지고 와서 주인에게 전해야 한다고 했다. 종들이 ‘여기는 서장을 바치는 곳이 아니다’ 라고 하며 또 쫓았으나, 뭔가 꺼림칙하여 포도청에 이런 사실을 신고하였다. 포도청에서는 이들의 뒤를 밟아 그 중의 한 사람을 잡아 성명을 물어보니 양찬규라고 했다. 그의 주머니를 수색해보니 봉투가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부원군 집에 바치는 글이었고, 하나는 ‘감고원몽(感故園夢)’이란 제목이 달린 글이었는데 거의 200구(句)나 되는 것이었다. 그 글들의 내용은 요사하고 간악하였고, 기괴한 말이 많았다.

우포장 구성임(具聖任)은 우선 사람은 석방하고 그런 사실이 있음을 좌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알렸다. 김재로는 구성임을 대동하여 증거물을 가지고 영조에게 가서 ‘어떤 미친놈이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다닌다’고 보고를 했다. 실제로 양찬귀는 자신이 왕자라고 자청하는 등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영조의 생각은 달랐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필시 무슨 음모가 있을 것이고, 그 배후 세력이 있을 것이라며 친국을 열었다. 얼마 후 다시 잡혀온 양찬규·양안귀 형제는 고문에 못 이겨 자백을 했다. 자신들이 남원에 살고 있는 일가친척들과 광주에 사는 백성 최태원, 이덕방 등과 함께 호남의 괘서를 짓고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영조는 반드시 이들이 신임옥사를 일으킨 소론의 거두 김일경·박필몽의 잔당들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우선 양찬규 형제를 대역부도죄로 참형에 처하고, 남원부를 일신현으로 혁파하는 조치를 내렸다. 당시 남원부사 권감(權瑊)에게도 책임을 물어 즉시 파직시켰다. 이어서 남원과 호남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관련자들을 전부 잡아들여 추국했다. 이 과정에서 더러는 고문으로 죽고 남은 사람들은 극변으로 유배되어 갔다.

그 후에도 영조는 미심쩍었든지 암행어사 이이장(李彝章)을 남원에 파견하여 동정을 살폈으나, 역모를 꾸몄다는 정황은 찾지 못했다. 오히려 평소 양찬규와 그의 아우 양안귀는 무명옷 속에 들어있는 솜을 빼내어 술을 사먹기도 했고, 패랭이에 용을 그려 머리에 쓰고 다니는가 하면, 사람들이 바늘로 두렵게 하면 겁을 먹고 달아나는 등 미치고 실성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다녔다는 진술만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양찬규의 옥사는 두고두고 신빙성에 의문이 가는 사건이었다.

어찌 보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이 옥사에 연좌되어 장기로 유배를 온 양재육은 양찬규의 삼촌이었다. 이 사건으로 양찬규의 또 다른 삼촌인 양재구(梁再九)·양재팔(梁再八)·양재오(梁再五)도 모두 연좌되어 먼 곳으로 유배를 갔다.

읍호가 강등된 남원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부로 승격이 되었다. 그때 파직된 남원부사 권감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다행히 다시 서용되어 1744년(영조20) 동지중추부사(종2품)가 되었다.

한편, 양찬규의 옥사가 있은 지 23년이 흘렀다. 1762년(영조38) 8월 4일이었다. 이번에는 전라도 담양도호부(都護府)의 읍호를 담양군으로 강등시키면서 장기현으로 유배 온 가족들이 있었다. 이홍범(李弘範)의 손녀 이황(李黃)과 이광(李光)이 그들이다. 이홍범은 담양좌수(潭陽座首)로 있으면서 영조를 망측스러운 말로 비방했던 사실이 3년 후에 밝혀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홍범·이창거·이상필·이세진이 역모죄로 참형을 당하고 가족들은 연좌되어 장기현으로 와 노비가 된 것이다.

 

남원관부도(南原官府圖). 1699년(숙종 25)에 간행된‘용성지(龍城誌)’의 범례 뒤에 실려 있는 남원부의 지도이다. 한때 남원부가 양찬규의 옥사로 인해 일신현으로 강등된 적이 있었다.
남원관부도(南原官府圖). 1699년(숙종 25)에 간행된‘용성지(龍城誌)’의 범례 뒤에 실려 있는 남원부의 지도이다. 한때 남원부가 양찬규의 옥사로 인해 일신현으로 강등된 적이 있었다.

담양은 고려 때는 현(縣)이었으나 1395년(태조 4) 국사 조구의 본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하였다. 다시 1399년(정종 1) 정종의 비 김씨의 외가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부로 승격한 뒤, 1413년(태종 13) 담양도호부가 되었다. 이런 도호부가 1762년에 와서 역적 이홍범의 태생지라 하여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던 것이다. 이때 강등된 담양은 10년 후인 1772년 담양도호부로 다시 승격되었다.

이후에도 무신난의 여파는 계속되었다. 영조가 사색당파를 고루 탕평했다고는 하지만 남인과 준소 세력이 정계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은 괘서, 비기, 투서 등의 형태로 계속 표출되었다. 1748년(영조 24) 권혜·권집의 투서 사건, 1755년(영조 31)의 이하징·윤지의 괘서 사건, 신치운·심정연 흉서 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모두 무신난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건들이었다. 덩달아 유3천리 경상도 장기현은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들과 소론(준소)들의 적거지(謫居地)로 자주 이용되었다. 유배객들이 늘어감에 따라 이들을 먹여 살려야 할 장기현 아전과 백성들의 시름도 이에 비례하여 깊어만 갔다. /향토사학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