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주인공 된 듯 구룡포 누비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드라마 주인공 된 듯 구룡포 누비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 시인 이병철
  • 등록일 2019.11.03 20:08
  • 게재일 2019.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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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병철의 경북 바닷길 537km, 그 맛과 멋
21. 가을 포항에 핀 동백꽃 그리고 노을

연오랑 세오녀 테마파크에서 바라본 영일만 노을.

구룡포로 가는 길에는 언제나 기분 좋은 긴장 상태가 된다. 흔히 ‘설렘’이라고 말하는 감정의 고조를 느끼기 때문이다. 겨울과 봄 사이, 늦겨울이라고 부르기엔 따뜻하고 초봄이라고 부르기엔 추운 그 짧은 한 철을 나는 ‘겨우봄’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겨우봄 구룡포는 푸른 파도와 흰 담벼락 사이로 언뜻 붉은 입술을 비추는 동백꽃의 숨바꼭질이 명랑하다. 그러다 술래인 햇살이 세게 달려들면, 동백 무리는 일제히 꽃잎을 크게 벌리고 깔깔 웃는다. 그때 비로소 골목마다 봄빛 수다가 수런거리기 시작한다.

가을과 겨울 사이를 ‘가울’ 혹은 ‘겨을’이라고 불러볼까? 너무 작위적이다. 아직 멀리서 오는 첫눈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으므로, 구룡포의 이 계절을 그냥 늦가을이라고 부르자. 단풍이 절정으로 타오르는 늦가을이지만, 지금 구룡포에는 엉뚱하게도 동백꽃이 여기저기 난리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이야기다. 일본인 가옥거리로 알려진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는 드라마 속 배경인 ‘옹산간장게장 골목’으로 모습을 바꿨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촬영지로 알려진 구룡포 인산인해
문화 콘텐츠의 조상격 ‘연오랑 세오녀’ 설화 주제 공원에서
노을 배경으로 사랑 속삭이는 젊은 남녀들의 모습 아름다워

근대문화역사거리에 들어서서 나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룡포에 웬 간장게장집이?’ 동해안 홍게와 대게를 가지고 게장을 담그는 새로운 음식 문화가 생겨난 줄로만 알았다. 드라마를 보지 않은 탓이다. 인기리에 방영중이라 제목은 귀에 익은데, 이곳 구룡포에서 촬영한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이날 근대문화역사거리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아무리 주말이라지만 평소보다 훨씬 사람이 많은 이유는 바로 드라마에 있었다. 사람들은 극중 주인공 동백(공효진)이 운영하는 술집 ‘까멜리아’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길게 줄을 서고, 사진을 찍고는 함박웃음 짓는 것이었다. 행복이란 이토록 소박한 찰나에 있구나, 나는 생각했다.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닌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실내포장마차를 운영하며 아들을 키우는 미혼모 동백, 그리고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세상 통념과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무작정 돌진하는 동네 순경 용식, 그 둘의 러브 스토리를 중심으로 드라마는 차별과 소외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청자들은 용식의 순정한 사랑을 통해 동백의 아픔들이 아물어가는 과정을 보며 위로를 얻는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옹산게장골목’이 된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옹산게장골목’이 된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옹산’을 찾아온 사람들은 간장게장골목에서 호떡과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고두심이 운영하는 백두할매간장게장집의 원래 정체가 ‘호호면옥’이라는 사실에 박장대소하며 안으로 들어가 냉면과 갈비탕을 먹었다. 골목을 나서면 꿈에서 깨듯 다시 구룡포,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옹산 골목을 거닐던 사람들은 구룡포 전통시장과 수산물직판장으로 흘러들어 포항의 특산물들을 두 손 가득 구입했다. 드라마 제작진에 따르면 촬영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전국을 다 돌아다녔지만 구룡포만큼 아름다운 곳이 없었다고 한다. 한편의 드라마가 태풍으로 침체된 지역경제에 활력을 일으키고, 경색된 한일관계로 입장이 난처해진 ‘일본인 가옥거리’의 이미지마저 쇄신시킨 것이다. 문화 콘텐츠의 힘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꼈다.

구룡포 해수욕장은 태풍이 헤집고 간 상처들이 아직 다 아물지 않아 보였다. 흰 모래가 곱던 해변에는 흙과 돌, 파도에 떠밀려온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래도 구름과 파도는 여전히 새하얀 꿈과 푸른 희망을 노래하는데, 어디서 떠밀려왔는지 해변에 돼지저금통 하나가 굴러다녔다. 온통 희고 파란 색만 가득한 가을 바다에서 빨간 돼지가 풍경의 온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아프리카돼지열병도, 살처분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저 돼지, 배가 갈린 채 동전들을 다 토해내야 했지만 덕분에 돼지는 가벼움을 얻어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이내 큰 파도가 달려와 돼지저금통을 바다로 실어갔다. 물살을 타고 망망대해로 멀어져가는 돼지저금통이 마치 동백꽃처럼 보였다. 내 마음의 끓는점에 불이 켜졌다.

햇빛이 지상의 그림자들을 길게 늘어뜨리는 걸 보니 이제 또 다른 드라마를 만나러 갈 시간, ‘동백꽃 필 무렵’보다 한 1,900년쯤 전에 이미 포항은 문화 콘텐츠의 땅이었다. 포항이 ‘연오랑 세오녀’ 설화의 고장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때 일이다. 포항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바위가 바다에서 솟아올라 연오랑을 싣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 간 연오랑은 한 고을의 왕이 되고, 남편을 찾아 나선 세오녀 역시 바위를 타고 일본에 가 부부는 재회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부부가 해와 달이 육화(肉化)된 신령한 인간들이었다는 점이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떠나자 신라의 해와 달은 빛을 잃어버렸다. 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부부의 귀환을 요청했지만, 연오랑은 하늘의 뜻이라며 귀환을 거부한 대신 세오녀가 짠 명주 비단을 건넸다. 신라 사람들이 그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 해와 달이 다시 빛을 찾았기에 왕은 그 비단을 국보로 삼아 보물창고에 보관했다. 그리고 그 비단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불렀다.

포항시 어머님 무용단의 세오녀 길쌈놀이.
포항시 어머님 무용단의 세오녀 길쌈놀이.

구룡포에서 포항 시내로 가는 길, 가을 햇빛이 비단처럼 영일만을 덮고 있었다. 남구 동해면 임곡리의 ‘연오랑 세오녀 테마공원’을 찾았다. 2017년에 개장한 이곳 공원은 연오랑 세오녀 설화를 주제로 ‘공간 스토리텔링’을 해 방문객들에게 지식적 유익함과 감성적 즐거움을 동시에 제공한다. 전설 속의 귀비고는 이곳 테마공원에 와 귀비고 전시관이 되었다. 귀비고 전시관에는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기록된 한국과 일본의 각종 고문헌들을 비롯해 4D체험관, 영상관, 포토존, 카페 등 다양한 체험 및 문화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귀비고 전시관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서면 잔디밭과 꽃나무들이 싱그러운 자연의 향기를 뿜는다. 바닷바람은 팽팽하게 당겨진 수평선이 연주하는 현악 소리를 귀에 실어 나른다. 야외공원엔 쌍거북바위, 일월대, 신라마을 등 여러 볼거리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근사한 것은 노을이다. 연오랑 세오녀 테마파크는 포항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다. 세오녀가 짠 명주 비단이 되찾아준 빛일까? 태양이 영일만을 온통 금빛으로 휘감는 시간, 석양 속에서 역광의 그림자가 된 젊은 남녀들은 말없이 사랑의 대화를 속삭였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너무 많은 연오랑 세오녀들, 그 근처를 괜히 얼쩡거리다가 연인들의 기념사진을 망치는 ‘곤란한 정물’이 될까봐 나는 자리를 피했다.

공원 한쪽에서는 2019 포항 무용제가 열리는 중이었다. 공식 경연에 앞서 포항시 어머님들 취미 무용단의 세오녀 길쌈놀이가 한창이었다. 한복을 차려입은 어머님들이 태양빛을 형상화한 빨간색 노란색 대형 비단을 펼쳐 들고 강강술래하는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져 혼났다. 이유는 모른다. 어머님들의 동백꽃 같은 웃음 뒤에 첩첩이 쌓였을 고단한 삶을 엿본 탓일까. 아니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길쌈놀이를 보며 아이처럼 손뼉 치고 좋아하는 할머님의 뒷모습 때문일까. 요양병원에 누워 꼼짝도 하지 못하는 내 할머니 생각이 났다. 정정하셨을 때는 장충체육관에 모시고 가 마당놀이 구경도 시켜드리곤 했다. 눈물로 얼굴이 더 엉망이 되기 전에 나는 서둘러 테마공원을 빠져나왔다.

북구 장성동 ‘영주식당’의 고래수육.
북구 장성동 ‘영주식당’의 고래수육.

포항 시내의 토요일 밤은 화려한 불빛들이 밝혀드는 축제, 그러나 휘황찬란한 불빛들을 뒤로 하고 어둔 시장 골목, 허름한 옛 식당의 문을 열었다. 북구 장성동 장성시장 안에 있는 ‘영주식당’의 고래수육은 일품이다. 어떻게 삶아내는지 고래 특유의 냄새가 전혀 없고, 부위마다 다른 식감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고래수육 한 접시는 미식 중의 미식이자 최고의 안주, 술잔을 비우다 보니 접시도 금방 비워졌다. 얼큰한 국물 생각이 나 찌개를 주문했다. 메뉴판에 없는 가자미 찌개가 상에 올랐다. 한 숟갈 떠먹자 붉은 고춧가루와 탱글탱글한 가자미살이 몸속에 동백꽃을 활짝 피웠다. 꽃은 아래에서부터 피어 위로 올라오기에, 식당을 나서서도 나는 두 볼에 동백꽃, 동백꽃 발그레 매단 채 밤거리를 걸었다. 그날 밤에는 낡은 여관방 이불이 세오녀의 비단처럼 부드럽게 꿈속까지 감싸주었다.           /시인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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