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 총성이 울려 퍼진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이다. 안 의사가 발사한 세 발의 총탄에 맞은 이토 히로부미는 20분 만에 절명한다.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수행하던 3인의 일본인을 추가 저격한 후 “대한만세!”를 외치며 현장에서 검거된다.

안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여순(旅順)감옥’에서 순국한다. 거사 이후 꼭 5개월 뒤의 일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 총성이 울려 퍼진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와 차지철을 저격한 것이다. 와이에이치 사건, 신민당 총재 김영삼 의원직 박탈, 부산-마산 시민항쟁 같은 사회-정치적인 소요의 와중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10월 28일 전두환이 김재규를 체포하여 내란목적살인과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언도한다. 광주항쟁이 핏빛으로 진압되기 사흘 전인 1980년 5월 24일 김재규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안중근 의사는 수감 중에 ‘동양평화론’을 저술해 한국과 중국, 일본이 서양세력에 공동으로 대항할 것을 제안한다. “한-중-일이 ‘여순’에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한다. 3국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공용화폐를 발행한다. 3국 공동군대를 창설하고, 타국의 언어를 가르친다. 조선과 청국은 일본의 지도 아래 상공업 발전을 도모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동양평화론’은 1929년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대중의 반역’에서 유럽연합 창설을 주창한 것과 견주어 봐도 뒤지지 않는다. 공동은행과 공용화폐, 공동군대와 언어교육은 요즘 생각해도 시대를 앞서가는 사유와 인식이다. 다만, 일본의 지도를 받아 조선과 청나라가 상공업 발전을 도모한다는 내용은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명치유신으로 근대화된 일본은 ‘탈아입구’와 ‘정한론(征韓論)’에 기초하여 조선을 병탄하고자 혈안이었기 때문이다.

김재규의 박정희 저격은 영화 ‘그때 그 사람들’(2005)에서 단편적으로 다루어졌을 뿐, 김재규의 사상과 저격배경은 미궁에 있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시민항쟁을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강제 진압한 박정희를 김재규가 저격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1980년 서울의 봄을 짓밟고, 광주학살을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일당이 10·26을 신속하게 처리함으로써 사건의 실체는 가려지고 말았다. 김재규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만약 내가 복권되면 ‘의사 김재규 장군지묘’라고 묘비에 적어달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그가 묻힌 경기도 광주시 엘리시움 공원묘원 추모비에 새겨진 ‘의사’와 ‘장군’ 네 글자는 심하게 훼손되어 10·26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웅변한다.

70년을 사이에 두고 같은 날 벌어진 사건은 역사를 돌이키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안중근 의사 덕분에 한국인들은 일제 강점기를 꿋꿋하게 싸우며 버텨왔다.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김재규는 유신의 종말을 앞당기려 목숨을 던졌다.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를 망각해서도, 민주주의를 유린한 유신통치도 결코 되풀이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10·26의 소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