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단에서의 설렁탕은 동화같은 이야기

이사하기 전 서울 종로 ‘이문설렁탕’. 재개발로 헐렸다. 

설렁탕에는 근거 없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늘 따라 다닌다. ‘선농단(先農壇)’에서 ‘설렁탕’이란 이름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이 ‘전설’은 다수설이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믿고 있다. 근거는 전혀 없다. ‘주장’도 아닌 ‘전설’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아마도 일제강점기, “그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꾸준히 와전되었다고 믿는다. 왜 일제강점기일까? 그 이전의 기록에는 ‘설렁탕’이 나타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설렁탕이 나타난다. 조선 말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에 ‘선농단=설렁탕’이 시작되었다.

세종대왕과 설렁탕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많다. 세종대왕은 예나 지금이나 성군으로 추앙받는다. 그래서 ‘세종대왕 때’다. 내용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동화”인데 이야기 얼개는 제법 그럴듯하다.

설렁탕은 조선 말기 주막과 더불어 시작된다

“세종 임금이 선농단에 제사 모시고, 행사하러 갔다. 하필이면 행사가 끝날 무렵 비가 억수로 왔다. 세종대왕은 제사에 사용한 고기를 큰 가마솥에 끓이게 한 다음, 행사에 참석한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 선농단에서 먹었기 때문에 설렁탕이라고 한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세종대왕이 흉허물 없이 일반 서민들과 고깃국물을 나눠 먹었다는 동화다. 물론, 터무니없다.

지금도 마찬가지. 최고 통치자가 위급한 상황을 만나면 최우선으로 취하는 행동은 ‘정위치’다. 대통령이 외부 행사에 참석했는데, 대형 천재지변이 발생했다. 빨리 청와대로 돌아간 다음, 상황을 살피고 조처를 해야 한다.

비가 많이 와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면 국왕은 먼저 환궁(還宮)한다. 높고 낮은 벼슬아치들이 동행하고, 그중에는 국왕의 안위를 챙기는 군인, 궁중의 인력들도 있었을 터이다. 선농단이 있었던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서 궁중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선농단 행사는, 우리가 지금 그리는 것 같이, 소박하고 작은 행사가 아니다. 조선은 농본국가다. 농사가 국가의 바탕이다. 풍년은 ‘국왕의 선정’이다. 풍년이 들면 ‘성군(聖君)’이 된다. 홍수, 가뭄 등 천재지변으로 농사가 순조롭지 않으면 국왕은 멍석, 거적을 깔고 하늘에 죄를 고했다. 죄인이다.

선농단은 한양도성의 동쪽에 있다, ‘동(東)쪽’은 생명, 생산, 새롭게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차기 왕위 계승권자인 세자는 ‘동궁(東宮)’이다. 국왕은 궁궐 동쪽의 선농단에서 모든 물산이 풍부해지기를 기원한다. 나라와 백성의 삶이 ‘농업 생산’에 달려 있다. 국왕은 ‘생산의 기본인 농사’를 직접 시범한다. 친경(親耕)이다. 국왕은 새벽부터 일어나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준비한다. 술잔을 따르고, 제사상에 드나드는 모든 절차까지 미리 준비한다. 제사상에 드나드는 사람에 맞춰 음악도 꼼꼼히 챙긴다. 이토록 꼼꼼하게 준비하는 행사에 비상 매뉴얼이 없을 리 없다.

두 번째는 고깃국물과 설렁탕의 차이에 대한 오해다. 궁중이나 지방 관청에서는 정육(精肉)을 공급받는다. 오늘날 정육점에서는 고기와 더불어 사골 등 뼈도 판매하지만, 원래 정육은 ‘기름이나 뼈를 제거한 고깃덩어리’를 이른다.

선농단의 제사다. 날고기라도 정육을 올렸다. 정육을 고면 대갱(大羹), 곰탕이 되고 고기 부산물을 고거나 끓이면 설렁탕이다. 부산물은 뼈와 사골, 잡뼈, 대가리, 기름 부위 등이다. 세종대왕이 촌노, 마을 주민들과 제사에 사용한 고기를 끓여서 나눠 먹었다면 설렁탕이 아니라 곰탕을 먹은 것이다.

덧붙일 이야기가 또 있다. 지금과 같이 불, 주방 도구 사용이 자유롭던 시절이 아니다. 백 명 정도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대단한 일거리다. 고기를 끓일 가마솥, 장작, 그릇, 수저, 음식을 장만하고 내놓는 인원 등 어느 것 하나 편하지 않던 시절이다.

예나 지금이나 최고 통치자의 동선에 돌발적인 일이 끼어드는 것은 최악이다. 비 온다고 국왕이 세민(細民)들과 식사를 같이 했다? 그야말로 “그랬으면 좋겠다”는 동화다.

쇠고기는 있되, 설렁탕은 없었다?

왜 조선 초, 중기에는 설렁탕이 없었을까? 왜 조선 후기까지도 설렁탕이 없었을까? 양이 많든 적든 ‘소의 도축’은 있었다. 제사, 손님맞이에 고기는 필요하다. 종묘, 성균관을 비롯한 각종 제사, 외국에서 오는 손님맞이 등이다.

조선 초기에도 소의 공식적인 도축은 있었다. 문제는 양이다. 조선 후기에 비하면 양이 적었고 더더욱 불법 도축은 엄히 금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7년(1425년) 2월의 기사다. 제목은 ‘한성부에게 우마를 도살하는 자를 수색 체포하여 엄히 금단하게 하다’이다.

 

이사하기 전 서울 종로 ‘이문설렁탕’. 재개발로 헐렸다.<위>설렁탕. 그릇 중앙의 내장은 지라다. 오래된 서울 설렁탕에는 반드시 지라가 포함돼 있다.
설렁탕. 그릇 중앙의 내장은 지라다. 오래된 서울 설렁탕에는 반드시 지라가 포함돼 있다.

(전략) 우마(牛馬)를 도살(盜殺)하는 자는 오로지 이 신백정(新白丁)이기 때문에, 영락(永樂) 9년에 신백정을 조사 색출하여 도성으로부터 3사(舍) 밖으로 옮겨 놓았던 것입니다. 근래에 와서 이 금지법이 무너져, 드디어 성안과 성 밑으로 모두 돌아와 살면서, 한가로운 잡인과 더불어 같이 우마를 훔쳐내어 도살(屠殺)을 자행하니, 그 간악(奸惡)함이 막심하옵니다. 위에 말씀드린 백정과 그 처사를 모두 조사 탐색하여 아울러 해변 각 고을로 옮겨, 군관(軍官)으로 하여금 수시로 핵문(覈問)하여 원주지로 도망해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우마의 고기를 먹는 자에게 다만 태형(笞刑) 50대를 가하니, 사람들이 이를 모두 가볍게 여기고, 〈그 고기가〉 나온 곳을 묻지 않고 공공연하게 사서 먹으므로 도살이 근절되지 않고 있사오니,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금후부터는 (중략)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이를 수색 체포하여 엄중히 금단(禁斷)을 가하도록 하소서. (후략)

같은 시대임에도 글의 ‘신백정’은 다른 글에서는 ‘양척’ ‘화수척’ 등으로 더 험하게 표현했다. ‘새롭다’라는 ‘신’은 이들이 아직 조선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백정은 ‘일반적인 백성’을 의미한다. ‘신백정’은 새로운 백성이다. 외부에서 온 사람들. 농사를 짓지 않고 고기를 만지는 이들이다. 도축은 이들의 손에 달렸다.

신백정은 ‘3사 밖으로’ 쫓겨냈다. 1사는 30리, 3사는 90리다. 도성 바깥으로 쫓아낸 다음, 철저하게 관리했다. 벌이 너무 약하다. 아예 바닷가 마을로 쫓아내자고 말한다. 조선 시대 내내 바닷가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곳이었다. 왜구들의 침략이 잦으니 바닷가 사람들은 전부 내륙으로 옮겼다. 이런 곳에 살게 하자는 것이다. 온전한 국민으로 여기지 않았다.

불법 도축한 고기를 사 먹는 이에 대한 벌도 낮지 않다. 태형 50대다. 이것도 법이 너무 무르니 더 심하게 하자는 상소다.

민간의 고기 수요도 철저히 통제되었다. 제사나 손님맞이 등에 고기가 필요하면 관청에 신고하고 특정 시기, 특정 양을 공급하는 방식이었다. 불법 도축은 좀 더 많은 고기를, 좀 더 편하게 구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편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기를 도축하고 그 부산물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렁탕이 나오지 않았던 이유다.

시중(市中), 난전(亂廛)에서 특정 음식을 내놓으려면 음식 재료가 꾸준히, 일정 물량 공급이 가능해야 한다. 조선 전기에는 모든 면에서 설렁탕이 나올 수 없었다.

설혹 부산물을 구할 수 있다 해도 ‘시장’ ‘식당’이랄 수 있는 ‘주막’이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다. 조선 초기, 상업이 발전하지 않았고 공식적인 시전(市廛) 이외에는 시장이 아예 없었다. 대부분 민간은 물물교환 경제였다.

관리들은 역원(驛院)을 이용했고, 사설의 주막은 조선 후기의 이야기다. 고기 부산물도 없고, 주막도 없다. 더더욱 주민들의 이동이 드무니 설렁탕이 있었다 하더라도 사 먹을 사람이 없었다.

개장국[狗醬, 구장]이 흔하던 시절이다. 조선 후기까지 주막의 주요메뉴는 개장국이었다. 쇠고기 부산물로 만든 설렁탕이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이유다. 조선 후기부터 소의 생산이 늘어난다. 금육이 풀리고 주막이 활발해진다. 청나라 영향으로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이 생긴다. 여전히 정육, 살코기는 비싸다. 소 부산물로 끓이는 설렁탕이 급작스럽게 시작된다.

한 가지 의문. 조선 초, 중기, 쇠고기 부산물은 먹지 않고 버렸을까? 그렇진 않다. 냉장, 냉동시설이 없던 시절이다. 각종 뼈, 소 대가리, 기름 등도 백정 혹은 인근 주민들이 먹었을 것이다. 다만 상업적으로, 설렁탕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세종의 선농단, 설렁탕은 전설이자 아름다운 동화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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