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막을 둘러싼 흥미로운 이야기들

경북 예천의 삼강주막. 마지막 주막으로 알려져 있다.

주막은 사라졌다. 바쁜 세상이다. 사라진 것은, 아름답지만, 잊힌다.

사극 드라마에는 늘 주막이 등장한다. 주막은 생생하다. 초가집 마당 한가운데 평상(平床)이 있다. 건장한 사내 몇몇이 술잔을 기울인다. 장국밥을 먹는다. 멀찌막이 떨어진 곳에 수상한 남자가 혼자서 술잔을 기울인다. 포졸도 고정배역이다. 활극도 펼쳐진다. 미행도 한다. 주모는 트레머리다. 주모를 흠모하는 중노미도 있다. 가끔 봉놋방의 나그네들도 등장한다.

불행하게도 엉터리다. 드라마의 주막은 드라마일 뿐이다.

주막은 ‘酒幕’이다. 주점(酒店)과 다르다. ‘술 파는 막(幕)’이다. ‘막’은 집이 아니다. 천막 등으로 덮은 ‘임시 가 건물’이다. 건물이라고 부르기 옹색하다. 비를 긋거나 햇빛을 가릴 정도의 천 쪼가리를 덮었다. ‘임시’다. 드라마의 주막은,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 이후의 모습이다. 초가집, 주모, 평상, 봉놋방, 포졸은 상상이다.

잠도 자는 공간을 왜 ‘술 파는’ 주막이라고 불렀을까? 주막의 시작이 ‘간단하게 목을 축일 수 있는 임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주막은, 간단하게 목을 축이는 임시 공간이었다. ‘임시, 탈법, 불법적으로’ 세운 것이다. 주막은, 끊임없이 변했다. 허술한, 겨우 하늘을 가린 ‘가 건물’ 형태에서 잠도 자고, 술과 밥을 내놓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술, 밥, 잠이 모두 가능한, 우리가 그리는, 주막은 근래 100년 사이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역원(驛院), 역참(驛站), 참(站), 점(店) 주점(酒店), 탄막(炭幕), 주막(酒幕)이 뒤섞여 있었다.

역원, 역참, 참, 주점은 공식 합법의 공간이다. 탄막, 주막은 탈법적인 민간의 공간이다.

조선은 역원(驛院)의 나라다

조선 시대, 움직이는 사람은 한정적이었다. 공식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관리들이다. 이들을 위한 장소가 역과 원, 역원이다. 각 지역 도로에 촘촘히 역과 원을 만들고, 공식적인 이동 시에는 반드시 역원을 이용했다. 조선 초, 중기에는 이동 인구가 한정적이었다. 공무로 출장을 가는 관리, 지방으로 부임하거나 한양 도성으로 향하는 관리 정도가 이동 인구의 대부분이었다. 농경사회다. 상업은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 상인들은 인근 동리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이동은 제한적이었다. 더러 움직이는 사람들도 ‘아는 집’에서 하룻밤 기식(寄食)했다.

민간의 여행자는 과거 보러 한양 가는 수험생 정도였다. ‘과거 수험생’들도 민간의 집에서 유숙했다. 동문수학한 이들도 있었고, 혈연, 지연으로 얽힌 이들의 집에서 하룻밤 유숙했다. 동리에서 가장 번듯한 반가나 더러는 깊은 산속 외딴집에서 묵기도 했다. 드라마 ‘전설 따라 삼천리’에서는 깊은 산속에서 아리따운 처녀로 변신한 여우를 만나기도 했다.

‘역’은 잠을 자지 않는 곳이다. 전해야 할 문서를 챙기거나 물을 마시고, 말을 바꿔 타는 공간이었다. 파발마로 급하게 달리는 관리들이 이용했다. 서울 ‘양재역’은 전철역에서 시작된 이름이 아니다. 조선 시대에 이미 ‘양재역’이 있었다. ‘역원제도’의 ‘역’이다. 양재역 부근에 말죽거리가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말은 기차가 아니다. 때때로 갈아야 한다. 양재역은 말을 갈아탔던 ‘역’이다.

1795년(정조 19년) 가을, 다산 정약용은 외직인 ‘금정찰방’으로 부임한다. 찰방은 역에 근무하는 종6품이었다. 역에는 9품직의 역승도 있었고, 역을 운영하는 역원(驛員)들도 있었다. 국가는 역원(驛院)에 농사지을 땅[驛田, 역전]과 노비 등을 제공했다. 역원의 책임자는 땅, 노비, 책임 구역의 도로 등을 관리했다. 역원에 들르는 관리들에게 음식, 잠자리, 말 등을 제공했다. 마패는 역원에서 말을 제공받을 때 사용하는 표식이었다. 관리, 암행어사는 역원에 마패를 제시하고 말을 구했다.

조선 후기, 주막이 역원을 대신하다

‘원’은 숙박, 식사가 가능한 공간이다. 말에게 사료를 주고 잠을 재웠다. ‘원’은 국가의 공식적인 시설이다. 근무자는 주모가 아니다. 관리들이 정식으로 운영했다. 한때는 전국에 1천여 개의 원이 있었다. 원은 30리마다 하나씩 세우는 것이 원칙이었다. 오늘날도 남아 있는 ‘조치원’ ‘이태원’ ‘사리원’ ‘인덕원’ 등이 모두 조선 시대 역원제도의 ‘원’이다.

공식적인 역원과 달리 민간에서는 탄막(炭幕), 주막(酒幕) 등이 발달한다. 숙종 조 이후 잉여농산물이 생기기 시작한다. 잉여생산물은 민간의 ‘탈법적인’ 상업행위로 이어진다. 움직이는 사람, 상인들이 생긴다. 이들이 주막을 이용한다. 민간의 ‘탈법적인 주막’도 늘어난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4년(1728년) 4월 2일의 기사다.

“경기감사(京畿監司) 이정제가 장계하여 말하기를, (중략) 지금의 이른바 주막[今之所謂酒幕]은 곧 옛날의 관정[卽古之關亭也]으로서, 적도가 밤에는 주막에서 자고[賊徒夜宿酒幕] 낮에는 장터에서 모이니, 착실하게 형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략)”

영조 4년 3월 15일(음력),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다. 소론 준론계(강경파)의 반란이다. 청주 이인좌를 중심으로 반란이 시작되었고 영남과 호남 일부까지 난에 합세했다.

반란 초기, 한양으로 건너오는 배도 철저하게 검문하고 긴요하지 않은 경우가 아니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글 중에 “적도들이 밤에는 주막에서 잠을 잔다”라는 표현이 있다. 18세기 초반, 이미 ‘잠자는 주막’이 있었다. 주막을 ‘예전의 관정’이라고 설명한 것은, 주막이 아직 보편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주막은, 탈법적인 민간의 공간이다

‘잠자는 곳’의 역사는 짧지 않다. 미암 유희춘(1513~1577년)의 ‘미암집’은 선조 7년(1574년) 무렵에도 잠자는 곳, ‘탄막’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막이 아니다.

“(전략) (유희춘이) 또 진술하기를, “근래에 도둑이 점점 불어나 경기도의 탄막(炭幕)은 나그네가 숙박하는 곳인데 도둑들이 엄습하여 그 집을 불태웠다고 하고, 서울 안에도 저녁이나 밤사이에 노략질하는 수가 많다고 합니다.(후략)”

이글에서 ‘나그네들이 숙박하는 곳’은 탄막이다. 탄막은 숯이나 건초, 나무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16세기에 이미 탄막은 주막이 된다. 주모, 평상, 국밥은 없어도 잠자는 곳이었다.

탄막은 오랫동안 나타난다. 200여 년 후다. 정조 13년(1789년) 2월 ‘일성록’의 기록.

황해도 신계에 살던 한조이가 억울함을 호소한다. “남편 이귀복과 저는 길가에 살면서 탄막으로 업을 삼고 있었습니다. 재작년(1787) 5월, 나그네가 저희 탄막에 와서 아침을 사 먹고 있는데 (황해도) 곡산의 기찰 장교가 그를 잡아가고, 남편도 잡아가서 유배 보냈습니다.”

관의 주장은 다르다. 남편 이귀복이 범인 두 명을 탄막에 재우면서, 숨겨주었다는 것이다. 18세기 후반에도 탄막이 있었다. 탄막에서는 아침밥을 팔았고, 잠도 잘 수 있었다. 우리가 상상하는 주막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조이는 주모와 닮았다.

주막과 탄막은 혼란스럽게 나타난다. 주막과 탄막,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청장관 이덕무(1741~1793년)의 ‘청장관전서_62권_서해여언’의 내용이다.

(전략) 점(店)은 주막(酒幕)인데, 술[酒]과 숯[炭]의 발음이 비슷하여 그대로 탄막(炭幕)이 되어버렸고 심지어 관문(官文)까지도 탄막으로 쓰고 있다.(후략)

‘관문’은 관청 문서다. 청장관의 주장은, 주막이 술막으로 그리고 발음이 비슷한 숯막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숯’은 곧 ‘탄(炭)’이니 탄막이 되고 결국 주막이 탄막이다.

‘점’이 주막은 아니다.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송도에 처음으로 ‘주점’이 생겼다. 공식적인 주점이다. 사설 주막과는 다르다. 중국에도 한나라 이후, 독점, 공식적인 술 파는 제도가 있었다. 술을 전매하는 ‘각고(榷酤)’다. 주막은 사설, 탈법적 존재다. 공식적으로 금주령이 잦았던 조선이다. 민간의 주막에서 술을 내놓고 팔기는 힘들었다.

조선 시대 기록에는 주점, 주막, 탄막, 참, 역원, 역참 등이 어수선하게 나타난다. 조선 말기, 국가 관리의 역원은 서서히 무너진다. 부패와 재정의 어려움 때문이다. 주막, 주막의 변형이 역원을 대신한다. 가볍게 목을 축이던 탈법 공간이 잠, 밥, 술이 모두 가능한 주막으로 발전한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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