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욱시인
김현욱 시인

‘한 달에 한 권 읽기’ 책모임에서 8월의 책으로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을 읽기로 했다. 한동일 교수는 한국인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타(Rota Romana) 변호사다. 로타 로마나 변호사가 되려면 유럽의 역사와 교회법, 라틴어와 기타 유럽어까지 능통하고 합격률이 6∼7%에 불과한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한단다. 학교에 있으면서도 영어 울렁증 때문에 원어민과 마주치면 쭈뼛거리기 일쑤인 나 같은 범인은 상상조차하기 어렵다. 영어, 불어, 독일어도 아니고 까다롭고 복잡하기로 악명 높은 라틴어라니.

라틴어, 하면 고등학교 때 읽은 스탕달의 <적과 흑>이 떠오른다. 치정(癡情) 소설이었지만, 아름다운 심리 묘사가 탁월했다. 주인공 쥘리앵 소렐은 가난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마을 신부에게 라틴어를 배우며 야망을 키운다. 1830년대 당시 프랑스에서 성직자가 되려면 라틴어는 필수였다. 쥘리앵은 뛰어난 라틴어 실력으로 베리에르 시장인 레날 씨의 라틴어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레날 부인과 운명적 사랑에 빠지지만, 신분 상승을 꿈꾸던 쥘리앵은 정략결혼을 선택하며 파국을 맞는다. 스탕달의 <적과 흑>을 읽으면서 ‘라틴어’는 출세의 문을 열기 위한 열쇠로 내게 각인되었다.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한동일 교수는 어떤 출세(?)를 위해 라틴어를 공부했을까 색안경을 끼고 읽다가 점점 자세를 고쳐 앉았다. 현대판 쥘리앵의 라틴어 성공담이 아니었다. 지혜로운 삶의 태도에 관한 책이었다. 서강대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타 학교 학생과 교수들, 일반인들까지 최고의 명강의라고 치켜세운 것은 그가 어려운 라틴어를 쉽게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라 라틴어를 통해 삶의 자세와 태도에 관해 조언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시 발레스 베네, 발레오.(Si vales bene, valeo),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라는 로마인들이 편지를 쓸 때 애용하던 첫 인사말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조언한다.

“타인의 안부가 먼저 중요한, 그래서 ‘그대가 평안해야 나도 안녕하다’는 그들의 인사가 문득 마음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내가 만족할 수 있다면, 내가 잘 살 수 있다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요즘 우리의 삶이 위태롭고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중략) 내 작은 힘이나마 필요한 곳엔 더불어, 함께 하겠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주위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삶이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더 나빠지지 않을 겁니다. 아니, 지금보다 조금은 좋아지지 않을까요?”

태도나 마음가짐에 따라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 라는 뜻의 라틴어 ‘베아티투도(beatitudo)’처럼 한동일 교수는 <라틴어 수업> 내내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는 싶은 것을 하라!”라며 우리의 어깨를 다독인다. <라틴어 수업>을 읽으며 손난로처럼 따뜻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은사님을 떠올렸다.

“당신이 잘 있으면, 저도 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