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욱 직장인 생각학교ASK 연구원

요즘 딸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말로만 듣던 중2병 증세일까? 같이 밥을 먹다 작은 실수라도 하면 이내 표정이 굳는다. 레이저 눈빛으로 아빠를 째려본 후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다. 잠깐 당황스럽지만 허허 웃으며 이내 마음을 추스른다.

딸 모습은 33년 전 내 모습과 다르지 않다. 아니다. 나는 딸보다 백배는 더 심했을 것이다. 아침부터 학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것은 기본이었다. 그런 미성숙한 나를 인자한 표정으로 한 번도 감정 상하지 않게 깨워 주던 어머니 마음을 이제 와서야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중이다. 늦잠 때문에 아침도 먹지 않고, 학교에 가려 집을 뛰어나가면 어머니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조금이라도 먹이려 했다.

평생토록 ‘자식이 행복’이라며 나를 소중한 존재로 만들어 준 어머니 덕분에 지금 나도 존재한다. 권투를 하다 다쳐 얼굴에 멍이라도 생기면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걱정했다. 멍을 풀기 위해 받은 달걀로 우스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비비고 있으면 그 모습에 파안대소하며 웃는 어머니로부터 나는 행복의 방법을 배웠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먼저 웃음을 잃지 않을 때 행복해지는 비결을.

지난 주말 요양병원을 찾았다. 자식을 못 알아보는 어머니는 그래도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내게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을 딸에게 줄 책임이 있다. 중2병이 심하게 도지면 즐겁게 이야기하다가 난데없이 우락부락 인상 쓰지만 아무래도 어떤가. 그저 사랑스럽다.‘욱’하고 화가 치밀기도 하지만 어머니만 생각하면 가볍게 넘길 수 있다.

권투 선수였던 나는 훈련이 힘들어도, 시합을 못 해도, 친구 때문에 힘들 때도 늘 어머니에게 짜증 냈다. 어머니는 폭우를 막아주는 우산처럼 다 받아주고 끝까지 사랑을 잃지 않았다.

2018년 2월 11일 새벽 5시 3분, 모두가 깊이 잠든 고요한 새벽에 갑자기 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놀이기구를 타고 흔들리고 있는 느낌처럼 몸이 떨렸다. 갑작스러운 충격에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곧장 딸 아이 방으로 달려간다. 딸도 놀라 울면서 방에서 뛰어나온다. 아내와 딸아이를 진정시키고 무슨 일이진 TV를 켜보니 포항에 규모 4.7 지진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TV와 영화로 접했던 지진을 실제로 겪어 보니 그 위력은 대단했다. 집이 이렇게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 경험을 통해 내가 지켜야 할 소중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배웠다.

소중한 것은 잃어버리기 전에 지켜야 한다. 비단 가족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잃어가는 소중한 것들이 많다. 그중 하나가 맑은 공기다. 미세먼지가 요즘처럼 기승 부리기 전에는 공기의 소중함을 제대로 모르고 살았다. 봄마다 초미세먼지와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린 후에 비로소 맑은 공기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미세먼지는 노약자나 어린이에게 아토피, 천식, 비염을 치명적으로 유발한다. 노인과 어린 아이는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존재들이다.

포항 남구 지역 생활폐기물 시설(SRF) 굴뚝 높이 때문에 문제가 많다. 다른 지역 소각장은 굴뚝 높이가 150m인데 포항은 불과 34m다. 이 낮은 굴뚝은 인근 주민의 건강과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특히 면역력이 약한 아이에게는 치명적이다. 쓰레기를 태울 때 발생하는 다이옥신, 발암물질, 미세먼지 등 환경 오염물질이 그 연기 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굴뚝을 더 높게 쌓으려면 물론 돈이 들 것이다. 소리없이 우리 아이들 폐와 몸 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무서운 물질들이 주는 피해를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자녀가 아픈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부모로서 큰 고통도 없을 것이다. 방심하다 그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 책임감을 갖고 소중한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 자식이 당신에게 아무리 짜증을 내고 힘들게 해도 환하게 웃어 주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사랑과 긍정, 희망, 감사를 배웠듯 지금 내가 딸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 중2병이 아무리 심해도, 세상이 나를 좌절하게 하여 힘들어도 내가 웃을 수 있고 행복해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소중한 사람이 곁에 안전하게 함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