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와 기술과학 시대
칸트와 기술과학 시대
  • 등록일 2019.08.13 20:14
  • 게재일 2019.08.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발트해의 항구도시 칼리닌그라드. 작년에 이곳에서 월드컵이 개최되었다.

△칸트의 물음

기술과학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칸트(Immanuel Kant·1724∼1804) 씨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칸트 씨의 말을 들으려면 우선 칼리닌그라드로 가야한다. 칼리닌그라드는 2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령이 되면서 동유럽의 변두리 도시로 밀려나게 되었지만, 한때 이 도시는 독일의 정신적 수도였다. 칼리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기 전 이 도시의 이름은 쾨니히스베르크였다. 이곳은 근대 통일독일의 모태가 된 프로이센의 발상지였으므로 정치 중심지를 베를린에 둔 뒤에도 프로이센 왕들은 대관식만큼은 쾨니히스베르크를 고집했다. 동프로이센 지방의 중심이며, 해외 무역의 요지인 이 도시는 서구 근대사회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세계시민도시의 성격을 띤다. 바로 이곳에서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태어났다.

칸트는 이 사랑하는 거리를 떠난 적이 거의 없었다. 독일의 정신과 새로운 근대적 기운이 교차하는 이곳에서 칸트는 인간의 삶과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지켜야 할 윤리에 대해 고민했다. 산업혁명은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그러면서 생산방식도 변하게 만들었다.

예컨대 이런 것들 말이다. 하나의 제품을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 수도 있지만, 여러 사람이 한 가지 일만 해나가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주방에서 한 사람이 재료를 다듬고, 요리하고, 설거지까지 하는 것보다는 일을 나누어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어떤 물건을 만들 때 전 과정을 습득하여 경지에 오른 사람을 우리는 장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분업에 참여하는 사람은 일의 전체가 아닌 부분만 습득하면 된다. 이들을 노동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장인이 만든 물건에는 그만의 혼이 실리고 독특한 흔적이 남지만, 노동자가 만든 물건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 노동자는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가능한 존재로 전락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의 고유성과 존엄성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을까? 계몽주의는 이러한 시대에서 촉발된 철학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삶을 이끈다,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고 비판한다”라는 자발성 철학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을 펼친 인물의 중심에 칸트가 있다. 인간의 이성(순수이성비판), 실천(실천이성비판), 판단력(판단력비판), 윤리(윤리형이상학)가 중심주제였다.

칸트의 철학은 인간과 인간의 이성에 관한 관심으로 귀결된다. 인간이 무엇을 인식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인간이 가진 인식 범위의 한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인식 대상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인식 범위 안에 있다. 이 범위를 뛰어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안다고 할 수 없다. 더 급진적으로 말하자면 세계가 있고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있고 세계가 있다.

대상을 관찰하여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얻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던 인식을 확고하게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칸트는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인간은 유한하며 편협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고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살라고 한 것은 아니다. 칸트는 그 한계 속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노력, 도전적이며 창조적인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인간의 윤리라고 한다.

공학기술 발전은 인간을 위해, 인간의 편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기술은 수단이며, 인간은 기술의 목적이다. 이것은 이윤추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돈을 버는 일은 인간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목적과 수단이 역전되는 시대다. 그래서 기술과 이윤추구가 목적이 되고, 인간이 그 수단으로 동원된다.

칸트는 이러한 목적과 수단의 전도 현상을 문제삼았던 것이다. 인간이라는 목적을 잃고 이윤추구에만 집중하게 될 때 그 수단은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결국 인간은 세계로부터 고립되고 삶의 의미를 잃게 된다. 이것을 ‘인간소외’라 부른다.



△수단과 목적이 전도하는 시대,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

수단과 목적이 뒤집힐 수 있는 시대, 이 시대에 우리는 다시 인간을 부여잡아야 한다. 과거 르네상스가 신이 아닌 인간을 중심적 가치로 두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시작되었듯이 오늘날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인간중심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신르네상스는 예술이나 인문학과 공학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인간친화 기술이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과학기술은 문제가 발견되기만 하면 혹은 문제가 무엇인지 알기만 하면 그 답을 찾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한다. 이 말이 오만할 수도 있지만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이것이 거의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날기를 꿈꾼 인간은 결국 날게 되었다. 그것도 엄청난 규모와 무게의 쇳덩이를 날 수 있게 만들었다. 우주가 궁금해지자 인간은 결국 우주탐사를 떠났다. 공학은 마음먹은 것을 분명히 이뤄내고야 만다. 공학의 이 엄청난 성취 앞에 순기능과 역기능도 있음을 생각해 봐야 한다.

게임의 폭력성과 중독성이 심각한 사회문제를 일으켜도, 원자력 발전의 폭발의 위험성을 앉고 있음에도 이런 문제들이 무시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이윤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업사회는 이런 문제는 미뤄두고 더 큰 이윤을 낼 수 있는 기술 개발에만 몰두한다.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때 인간의 삶은 피폐해진다. 돈이 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 어떤 식으로든 돈을 벌면 된다는 생각이 이 사회를 병들게 만든다. 이런 문제에 공학이 직접 나서야 한다. 윤리사회로의 길은 정치와 교육의 몫이기도 하지만 공학의 몫이기도 하다. 과학기술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도태되고 말겠지만, 그 변화를 무작정 따라간다면 재앙을 맞을 수도 있다. 이 양면의 압력을 이겨낼 수 있는 교육제도가 필요하다. 그러한 교육제도는 공학만을 강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공학만큼이나 인문학·예술 등도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공학자가 인문학이나 예술교양을 쌓아야 하듯 인문학이나 예술분야에서도 공학교양을 쌓아야 한다. 이런 융합교육이 불투명한 미래를 투명하게 만들 것이다.

미래는 미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형성된다.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지식을 배우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때 미지로 남겨진 미래는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미래에 대한 준비는 국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몫이기도 하다. 미래의 일을 미래에 준비할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준비해 나가야 한다. 오늘이 미래를 결정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