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왜(抗倭)와 토왜(土倭)
항왜(抗倭)와 토왜(土倭)
  • 등록일 2019.08.07 20:00
  • 게재일 2019.08.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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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1592년 4월 임진왜란 발발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 사야가(沙也可)는 일본의 조선침략이 잘못되었음을 확신하고 경상좌병사 박진에게 부하들을 이끌고 투항한다. 사야가처럼 일본의 무의미하고 명분 없는 침략전쟁에 반대하여 조선에 투항해 일본에 맞서 싸운 왜인들을 ‘항왜’라 한다.

반면에 조선인이되 왜군의 침략에 즈음하여 자발적으로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군과 대적한 자들을 일컬어 ‘순왜(順倭)’라 한다. 선조가 명나라 신종에게 요동태수 자리를 애걸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순왜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휘하의 신료들조차 순왜의 규모를 이실직고할 수 없었을 정도였다니, 조선왕조의 피폐와 무능과 신하들의 타락과 분열상은 미루어 짐작 가능하다.

22살 나이에 투항한 사야가는 왜군에 대적하기에 부족한 조선의 무기에 눈을 돌린다. 그는 충무공과 서찰을 교류하면서 조총제작과 화약제조에 관한 견해를 개진한다. 그를 기려 1798년에 간행한 ‘모하당문집’에서 일부 발췌한다.

“소장은 비록 타국에서 온 천한 군인이오나 외람되게도 신민의 대열에 끼게 되었사오니 본국인의 심정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문하신 조총과 화포와 화약 만드는 법은 전번에 비국(備局)으로부터 내린 공문에 의거 진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 또 김계수를 보내라 하명하시니 곧 보내옵니다. 총과 화약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기필코 적병을 전멸시키기를 밤낮으로 축원하옵니다.”

사야가는 충무공에게 부하 김계수를 보내고, 조선의 무기체계 개선에 진력한다. 아울러 그는 경주와 울산 전투에서 전공(戰功)을 세워 선조에게 가선대부 직함과 사성(賜姓) 김해김씨를 제수받는다. 그가 곧 김충선이다. 김충선은 1636년 발발한 병자호란에도 65세 노구를 이끌고 출정하여 청나라의 2대 칸인 홍타이지와 맞서 싸우는 애국정신을 발휘한다.

아베 총리가 도발한 경제전쟁으로 나라가 온통 소란스럽다. 총칼과 대포를 동원한 살육전은 아니지만, 경제전쟁도 전쟁이다. 단지 총성 없는 전쟁일 뿐. 이럴 때 특히 유의할 것이 내부의 분열과 그것을 획책하는 자들의 분탕질이다. 임진왜란에서 조선백성이 고통받은 까닭은 암군(暗君) 선조의 무능과 우심(尤甚)한 당쟁으로 왜적의 침략을 예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1세기 한일 경제전쟁에 임해 우리는 국론을 통일하고, 침착한 자세로 저들의 도발에 응전해야 한다. 적전분열이나 과도한 공포, 지나친 선전선동은 백해무익할 뿐이다. 더욱이 순왜 못지않은 현대의 ‘토착왜구’ 준동은 기필코 막아내야 한다. 일제강점기에 친일부역자를 가리키는 ‘토왜’는 1910년 ‘대한매일신보’에 ‘토왜천지(土倭天地)’라는 글로 구체화한다. 신문은 토왜를 “얼굴은 조선인이나, 창자는 왜놈”이라고 규정하고, 네 가지로 부류로 나누었다.

첫 번째가 일본의 앞잡이 노릇하는 고위 관료층이고, 두 번째는 일본의 침략행위와 내정간섭을 지지하는 정치인과 언론인이다. 세 번째는 친일단체인 일진회 회원, 네 번째가 토왜를 지지하고 애국자를 모함하는 가짜 소식을 퍼뜨리는 시정잡배다. 100년 전과 비교해보면 차이는 있지만, 아직도 토왜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의 정치인과 언론인, 자발적 부역자(附逆者)가 적잖다. 그자들이 정보강국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사실이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백기투항(白旗投降)을 주장하는 자들이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과 2015년 위안부 협상의 후예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2차 대전의 영웅 처칠이 남겼다는 말을 깊이 생각해볼 때다. “싸워본 나라는 다시 일어나도,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나라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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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 2019-08-09 16:36:46
김규종 교수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