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준의 장기에 가면 조선왕조 500년이 보인다
6. 박팽년(朴彭年)의 가족들

장기충효관. 포항 장기가 충절의 고장임을 만인에게 알려 주는 시설이다, 뜻있게 살다가 간 사람들의 한 서린 아픔과 그 아픔 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들이 이곳 사람들의 내면을 적시고 있다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장기충효관. 포항 장기가 충절의 고장임을 만인에게 알려 주는 시설이다, 뜻있게 살다가 간 사람들의 한 서린 아픔과 그 아픔 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들이 이곳 사람들의 내면을 적시고 있다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1456년 7월 초순,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를 뚫고 몰골이 꾀죄죄한 두 남자가 포항 장기 땅을 밟았다. 절뚝거리는 다리에다 비에 젖은 괴나리봇짐을 지고 들어서는 그 행색이 한눈에 봐도 유배객이었다. 이름이 박용이(朴龍伊)와 박사평(朴斯枰)이라고 하는 이들은 형제지간이었는데, 능지처참 당한 박중림(朴仲林:박팽년의 아버지)의 조카들이었다. 이들은 모반대역죄의 연좌에 걸려 그해 6월 28일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이래 하루에 80리씩을 걸어서 이제 도착한 것이다.

이들이 여기까지 온 비통한 사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선왕조의 불행한 시작인 계유정난을 알아야하고, 이것과 맞물려 신권(臣權)과 왕권의 갈등이 불러온 단종 복위운동을 살펴봐야 한다.

세종의 맏아들 문종은 몸이 약해 재위 2년4개월 만에 병으로 죽었다. 죽기 전 문종은 후사가 걱정이었다. 아버지 세종이 정비(正妃)에서만 8남 2녀, 또 다섯 후궁에서도 10남 2녀의 형제를 두었으니, 이들 중 누군가가 세자를 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좌의정 정분(鄭苯)·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세자가 왕이 되었을 때 보필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문종이 죽고 12세에 왕위에 오른 단종은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마저도 이미 3살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측근에서 후원해줄 세력이 없었다. 당연히 아버지의 유지(遺旨)에 따라 원로대신 김종서·황보인 등에 의존하여 정치를 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대신들은 아버지 형제 중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던 수양대군과 상당한 마찰이 있었고, 아버지가 아꼈던 집현전 출신의 젊은 유신(儒臣)들과도 정치적 대립관계에 놓여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양대군은 집현전 출신 관료, 정치무대에서 소외당한 한명회(韓明澮)같은 하급관리, 그리고 홍달손(洪達孫)을 비롯한 무사(武士)들을 규합하여 일순간 단종을 보좌하던 황보인·김종서 등 대신들 수십 명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해버렸다. 이른바 1453년(단종1) 10월 10일에 일어났던 계유정난이다. 이것은 박팽년을 비롯한 수백 가문에 대한 비극의 서막이었다.

권세에 앉은 수양대군은 강력하게 자신에게 맞선 안평대군을 강화로 축출한 뒤 독약을 내려 죽게 하고, 이어 끝까지 단종을 지키려던 금성대군마저 역모죄를 씌워 유배를 보내 버렸다. 친형제들과 원로대신들을 정리한 수양대군은 정난을 일으킨 지 1년8개월 만에 단종을 이름뿐인 상왕(上王)으로 물러 앉히고, 세조로 즉위했다.

이제 세종조 말기부터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바라고 갈망해 오던 집현전 출신 유신들도 세조와 함께 자신들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이었다. 세조의 정치운영은 이들의 생각과는 전혀 딴판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세조는 태조가 건국 초기부터 도입하여 추진한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폐지해버렸다. 이는 최고관부인 의정부가 3정승 합의하에 국가의 중대사를 처리하도록 한 통치체제인데, 이것부터 없앤 것이다. 그 대신 판서가 나랏일을 왕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하는 6조(六曹) 직계제(直啓制)를 실시했다. 신하들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국왕이 중심이 되는 전제정치를 지향한 결과였다. 집현전 출신 유신들이 극구 반대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제 정국은 세조의 독주로 진행되었고, 정치운영론을 둘러싼 신권(臣權)과 왕권의 대립은 점점 고조되어만 갔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 박팽년의 후손에 의해 배향되다가 나중에 현손(玄孫) 계창이 박팽년의 기일에 사육신 여섯 어른이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위의 향사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사당. 박팽년의 후손에 의해 배향되다가 나중에 현손(玄孫) 계창이 박팽년의 기일에 사육신 여섯 어른이 사당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꾼 후 나머지 5위의 향사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

이런 갈등은 자연스럽게 단종 복위운동으로 이어졌다. 세조의 정치운영에 불만을 품은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출신 신하들이 세조를 왕위에서 몰아낼 궁리를 해 냈던 것이다. 이들은 거사일을 1456년(세조2) 음력 6월 1일로 잡았다. 이날은 세조가 창덕궁에서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열기로 한 날이었다. 연회에서 왕의 호위를 맡은 별운검(別雲劍)으로 이쪽편인 유응부, 박쟁을 세워두었다가 행사 중 적당한 시기를 봐서 세조와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별운검을 동반하는 것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한명회가 그날 아침에 갑자기 별운검의 시위를 폐지해버렸다. 이에 암살 계획은 실행 일보 직전에서 수포로 돌아갔다. 이들은 훗날을 기약하고 거사 계획을 미루기로 했다.

그런데, 일이 꼬여 버렸다. 모의에 참여했던 성균 사예(司藝) 김질(金礩)이 거사가 실패했다고 판단해 지레 겁을 먹었던 모양이다. 그는 바로 다음 날,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사실을 고백했다. 우찬성(종1품)이었던 정찬손은 사위를 대동하고 곧바로 세조에게 쫓아가 모반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날로 관련자들이 모두 잡혀와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1456년(세조2) 음력 6월 2일에 일어난 이 엄청난 옥사에는 사육신을 비롯한 70여명이 처형됐다. 집현전 학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세조는 집현전을 폐지하고 그 서책들을 예문관으로 옮겼다. 이 사건에 가담한 사람들의 여자 가족들 중에 관공서 노비로 전락한 여성이 172명이고, 공신 집에 끌려가 종이 된 부녀자가 181명이나 됐다.

거론된 이들은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을 가리지 않고 팔과 다리를 수레에 묶어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여덟 차례나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이 가운데 41명이 거열을 당했다. 처형된 이들의 머리는 사흘 동안 거리에 효수(梟首)됐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박쟁, 권자신, 송석동, 윤영손, 이휘가 그들이다. 이후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이 더 밝혀졌는데, 심신, 이유기, 이의영, 이정상, 이지영, 이오, 황선보 등이 그들이다.

박팽년의 묘.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공원 안에 있다.
박팽년의 묘.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공원 안에 있다.

이날 박팽년은 고문에 못 이겨 자신의 아버지인 박중림까지도 가담했다고 실토를 하고는 결국 형장(刑場)에서 숨을 거뒀다. 이제 그의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심문 도중에 죽은 박팽년과 잡히기 전에 아내와 함께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은 유성원과 허조(許慥)에 대해서도 따로 시체를 거열하고 저자에 3일 동안 효수했다. 찢긴 시체들은 모두 처형장인 새남터에 버려졌으나, 생육신 중 한 명인 김시습이 몰래 수습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때 죽음을 당한 여섯 명을 사육신(死六臣)이라 부르는데,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응부, 이개, 유성원의 여섯 사람이다. 최근에 유응부 대신 김문기가 사육신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일었는데,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김문기도 사육신과 같은 충신이었음을 인정했다. 그래서 이제는 사칠신(死七臣)이라 불러야 맞다.

반역 연좌인에 대한 처벌도 있었다. 사건에 참여한 이들의 친자식들은 모두 목을 매어 죽이는 교형에 처해졌다. 그 외에 어머니와 딸, 처와 첩, 할아버지와 손자, 형제자매 뿐 아니라 아들의 처와 첩들은 국경 부근 작은 고을의 노비로 보내졌다. 백숙부와 형제의 자식들은 원방잔읍(遠方殘邑:쇠하여 황폐해진 고을)으로 보내 노비로 삼았다.

박용이와 박사평은 난에 참여한 박중림 형제의 자식들이었으므로, 원방잔읍인 경상도 장기로 보내졌다. 한양에서 보면 그곳에서 700여 리 떨어진 장기가 바로 ‘먼 지방의 쇠잔한 고을’로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사건을 주도한 박팽년의 가문은, 세조로부터 다른 어느 가담자보다도 철저하게 응징을 당했다. 극형에 처해진 사람도 가장 많았고, 여종이 된 처와 첩도 가장 많았으며, 몰수된 전답도 제일 많았다. 그 이유는 부자(父子)가 모두 가담되었을 뿐 아니라, 잡혀온 박팽년이 세조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세조를 왕이라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국정운. 박팽년 등이 1448년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운서이다.  /출처 간송미술문화재단
동국정운. 박팽년 등이 1448년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운서이다. /출처 간송미술문화재단

박팽년은 1447년 과거에 급제하고, 1453년(단종1) 우승지를 거쳐 1454년 형조참판이 되었다. 집현전 학사로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종사한 적도 있다. 1455년(세조1) 세조가 즉위하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나, 조정에 보내는 공문에 자신을 ‘신하(臣)’라고 칭한 일이 없었다. 사건 당시에는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도 참여했다.

박중림 역시 1427년 과거에 급제하여 1453년 예문관대제학·공조판서 겸 집현전제학을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 대사헌과 형조판서로 있을 때에는 국법 집행이 엄정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1455년(세조1) 세조가 왕위를 빼앗아 차지하자 크게 통분해 벼슬을 내놓겠다는 뜻을 밝히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이에 세조는 그에게 이조판서를 주어 회유했으나 끝내 사양했다. 이듬해 아들 팽년과 집현전 제자들이 단종 복위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가담했다가 거열형을 당한 것이다.

분노한 세조는 박팽년의 가족들 중 남자는 젖먹이까지 모두 죽여 3대를 멸해버렸다. 이때 죽임을 당한 형제들은 박인년(朴引年), 박기년(朴耆年), 박대년(朴大年), 박영년(朴永年)이고, 아들들은 박헌(朴憲),박순(朴詢),박분(朴苯)이다. 이는 친자식이라도 15세 이하면 죽이지 않고 종으로 삼는다는 율문의 규정을 넘어서는 가혹한 처사였다.

박팽년, 그리고 그의 형제들 아내와 딸들에게도 불행이 닥쳐왔다. 모두 임금의 종친과 대신들의 집 노비로 보내져야 하는 기구하고도 비참한 운명에 처해졌던 것이다. 특히 박팽년의 아내 옥금(玉今)은 한때 팽년과 집현전 동료 학사였던 영의정 정인지에게 종으로 보내졌다. 세조 편에 섰던 정인지는 이 사건으로 옥금 뿐 아니라 김종서의 며느리와 딸, 손녀들까지도 종으로 하사받았다. 팽년의 제수(弟嫂) 내은비(內隱非)는 태종의 사위 권공(權恭)에게, 또 다른 제수 무작지(無作只)는 익현군(翼峴君) 이곤(李璭)에게, 형수 정수(貞守)는 강성군(江城君) 봉석주(奉石柱)에게 각각 노비로 보내졌다. 팽년의 큰며느리 경비(敬非)와 둘째며느리 옥덕(玉德)은 나란히 이조 참판 구치관(具致寬)의 노비가 되었다. 박팽년 일가의 토지도 모두 분할되어 왕실종친과 대신들에게 나누어졌다. 경기도 과천 금사라기 땅은 황희 정승의 아들인 황수신(黃守身)에게 주어졌다.

이처럼 집안이 풍비박산된 채 장기로 온 박용이와 박사평은 잠시 관노로 있다가 ‘난신(亂臣)에 연좌된 사람 가운데 백숙부와 형제의 자식은 안치(安置)하라’는 왕의 지시에 따라 곧 관노는 면하였지만, 12년을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468년 9월 6일에야 방면되었다.

역신·난신으로 규정된 사육신에 대한 신원(伸冤)은 사건이 발생한 지 235년이 지난 1691년(숙종17)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논란들이 일었지만, 충신을 역적으로 둔갑시킨 채 역사에 그대로 둘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렵게 명예가 회복된 이후 이들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가장 높이 추앙받는 충절의 상징으로 내세워졌다.

외로운 유배의 땅에 버려진 듯 내팽개쳐졌던 박팽년의 가족들, 그들은 ‘바닷가에 쇠하고 황폐한 고을’로 여겼던 이곳 사람들에게 ‘불사이군(不事二君)’이 어떤 것인지를 본보기로 남겨놓고 떠나갔다.

/이상준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