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상납할거라곤 노루가죽 밖에 없었다오
우리가 상납할거라곤 노루가죽 밖에 없었다오
  • 등록일 2019.07.22 19:01
  • 게재일 201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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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의주 판관 최윤복(崔閏福)의 뇌물 상납사건

근민당(近民堂). 유배객들이 현감으로부터 매월 보름에 한번 씩 점고(點考)를 받던 장기 동헌(東軒) 건물이다.

1423년(세종 5년) 10월 초, 가을이 한창 무르익는 들판을 따라 한 선비가 장기로 유배를 왔다. 바로 그해 9월 26일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최윤복(崔閏福)이란 사람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의주 판관으로 있었다.

그는 개국공신의 아들이었다. 윤복의 아버지 최운해(崔雲海)는 고려말 조선초 경상도 창원 출신 무신으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참여한 원종공신(原從功臣)이었다. 그의 친형인 최윤덕(崔閏德)은 꽤 유명하다. 세종 때 김종서와 함께 평안도와 함경도에 있던 여진족을 몰아낸 뒤 4군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우리나라의 북쪽 국경선을 확정지은 인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무인 출신이었지만 정승까지 역임하고 세종으로부터 궤장(나라에서 국가에 유공한 늙은 대신에게 내려 주던 궤와 지팡이)까지 하사받았다. 괜찮은 가문의 엄격하고 인자한 형님 밑에서 자란 최윤복이었지만, 불미스럽게도 그는 ‘뇌물공여’ 사건을 저지르고 장기로 유배를 오는 신세가 되었다.

세상 어디든 뇌물이 없는 사회는 없었다. 고려 말이나 조선시대에도 뇌물은 성행했다. 조선시대의 뇌물은 ‘분경(奔競)’과 함께 따라다녔다. ‘분경’이란 ‘분주히 쫓아다니며 이익을 추구함’을 가리키는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이다. 즉 뇌물을 들고 권세가의 집으로 찾아가 청탁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관직 사냥이라고 하여 ‘엽관운동(獵官運動)’이라고도 불렀다.

광해군 일기. 조선시대 만연했던 뇌물의 한 단면인 ‘사삼(더덕) 정승’과 ‘잡채 판서’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광해군 일기. 조선시대 만연했던 뇌물의 한 단면인 ‘사삼(더덕) 정승’과 ‘잡채 판서’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를 연 태조부터 적극적으로 뇌물 타파를 외치며 분경을 없애려고 했다. 태조는 뇌물로 관직을 사고파는 엽관운동이 고려 말부터 성행했던 것을 꼬집으며 이를 없애려 했지만, 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뇌물 수수가 만연했다. 정종(定宗)이 분경을 금지하는 교서(敎書)를 내렸는데도 실효성은 별로 없었다. 태종 때는 김점(金漸)의 뇌물비리가 조선천지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는 후궁인 숙공궁주((肅恭宮主)의 아버지로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너무 많은 뇌물을 받아 문제를 일으켰다. 여러 고을에서 뇌물을 거둬들인 것은 물론 감형을 원하는 죄수들에게도 뇌물을 요구했다. 북경에서 사신과 함께 돌아오는 상인(商人)들에게는 뇌물을 받아야만 입국을 허락했을 정도였다. 이를 알고 김점을 문책하던 태종은 “숙공궁주가 그대로 궁중에 있으면 공정한 의(義)와 사정(私情)이 의심을 받게 될 것”이라며 후궁을 궐 밖으로 내쫓았다. 이후 태종은 분경금지를 법제화한다.

하지만 분경은 그 특성상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지라 조선시대 내내 존재했다. 지방의 관찰사나 수령들이 한양으로의 출셋길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중앙 권력자들에게 줄을 대고 노골적으로 뇌물을 바쳤던 것이다. 군대 징집이나 세금 면제, 형벌 감형을 청탁하는 뇌물도 많았다. 그렇게 주고받은 뇌물은 보편적으로는 은으로 만든 돈이나 토지문서, 노비 등이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등으로 확인해보면 특이한 뇌물도 있다. 더덕, 문어, 노루나 사슴가죽이 있는가하면 심지어는 개고기나 잡채도 뇌물로 제공되었다.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뇌물의 종류가 달랐던 것이다.

중종 때 김안로(金安老)는 아들 김희(金禧)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하게 되자 왕과 사돈지간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위세가 등등했던 김안로는 개고기를 무척 좋아했다. 이를 안 이팽수(李彭壽)란 사람은 봉상시(奉常寺:국가제사를 관장하는 관청) 참봉(종9품)으로 있으면서 김안로에게 개고기를 자주 상납했다. 그는 크고 살찐 개를 골라 견적(개고기 구이)을 해서 매번 김안로의 구미를 맞췄다고 한다. 이후 김안로는 그를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임금 비서실의 정7품)에 등용시켜 주었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이팽수를 ‘가장주서(家獐注書)’라 부르며 비아냥거렸다. 가장(家獐)은 ‘삶은 개고기(烹炙犬肉)’를 가리킨다. 결국 이팽수는 ‘개고기로 주서가 된 사람’이라는 부끄러운 별명을 조선왕조실록에 남겼다.

이팽수가 개고기 뇌물로 출세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들뜬 이가 또 있었다. 바로 진복창(陳復昌)이란 인물이었다. 진복창은 한때 이팽수와 함께 봉상시 주부(정6품)로 근무한 적이 있던 직장동료였다. 그는 이팽수가 한 것처럼 개고기 구이로 김안로의 뜻을 맞추어 온갖 요사스러운 짓을 다 하는가 하면, 매번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한다는 사실까지 자랑삼아 설명했다. 하지만 김안로의 입에는 진복창의 개요리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안로는 ‘이팽수의 개고기보다 맛이 없다’는 질책까지 하며 진복창의 청탁은 들어주지 않았다.

장기유배문화체험촌에 만들어 둔 형틀과 곤장. 역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앞날을 예찰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장기유배문화체험촌에 만들어 둔 형틀과 곤장. 역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앞날을 예찰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실록에는 광해군 때의 ‘잡채 판서’ 그리고 ‘더덕 정승’도 기술되어있다. 광해군에게 잡채를 뇌물로 바친 사람은 이충(李沖)이라는 사람이었다. 이충은 갖은 채소를 볶아 만든 잡채를 광해군에게 올렸는데, 왕은 식사 때마다 반드시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곤 했다. 그 덕택에 이충은 호조판서 자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가 길에 오가면, 삼척동자도 그를 알아보고 ‘잡채 판서’라고 손가락질했다고 한다. 그를 만나면 너나없이 침을 뱉고 비루하게 여겼던 것이다.

더덕 정승은 더덕으로 좌의정까지 한 한효순(韓孝純)을 일컫는다. 옛날엔 더덕을 모래밭에서 나는 인삼이라고 해서 사삼(沙蔘)이라고 했다. 한효순은 이 더덕으로 꿀떡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쳐 총애를 입고 정승이 되었다. ‘사삼 정승의 권세가 처음에 중하더니, 잡채 상서의 세력을 당할 자가 없구나’라고 이들을 조롱하는 풍자시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실록에는 세종 때 대사헌이던 신개(申槪)가 강원도 고성 수령 최치(崔値)라는 자로부터 문어 두 마리를 뇌물로 받았다가 구설에 오르자 스스로 사직 상소를 올린 기록도 보인다.


이처럼 뇌물의 종류는 천차만별이지만, 최윤복이 뇌물로 쓴 물건은 노루 및 사슴가죽과 살코기였다. 조선시대 노루와 사슴고기는 왕실의 각종 제의에 중요한 제물(祭物)로 쓰였다. 사슴고기로 만든 것은 건녹포(乾鹿脯)라 하고, 노루고기로 만든 것은 건장포(乾獐脯)라 한다.

최윤복은 이것들을 서울과 지방의 여러 곳에 뇌물로 쓰고, 또 졸곡(卒哭) 전에 포(脯)를 서로 증정하였다는 것이다. 졸곡제사는 사람이 죽은 지 석 달 만에 오는 첫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가려서 지내는 것인데, 마침 이때가 태종이 죽고 아직 졸곡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의주목관(義州牧官) 창고에 있던 그 노루와 사슴 고기들은 공물로 받아 둔 것들이었다. 당연히 궁중에 써야할 것들이었는데, 이를 사사로이 뇌물로 제공했으니 사건이 더 커지게 된 것이다.

왕실에서 쓰는 포육(脯肉)은 공물로 받는 것 외에도 왕실의 사냥인 강무(講武) 때 잡은 노루와 사슴으로도 마련하였다. 더러는 음식 조리를 담당하는 별사옹(別司饔)을 지방으로 파견하여 직접 만들게도 하였다. 녹포로 만들지 않은 고기는 소금에 절여 숙성 시킨 녹해를 만들어서 제례에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윤복이 이것들을 뇌물로 쓸 세종(世宗)대에는 인구가 늘어나 산을 개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노루와 사슴이 매우 귀했다. 그럼에도 중앙의 각 관사(官司)에서는 사용량이 줄지 않아 지방관들에게 공납을 독촉했다. 이를 조달하지 못해 숫자를 감하거나 제외해달라는 충청도 도절제사(都節制使)의 문서는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노루와 사슴 건포(乾脯)를 준비하기 위해 사냥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이 산과 들을 덮고 열흘 동안이나 사냥을 해도 잡은 짐승은 두세 마리에 불과했다. 이래서는 도저히 할당량을 조달하지 못하겠으니 공물에서 제외해 달라는 지방수령들의 다급한 상소가 빗발쳤음은 물론이다. 공급이 달렸으므로 궁중의 의료와 시약(施藥)을 관장하는 전의감(典醫監)에 바치는 녹각(鹿角)과 여러 도(道)의 군기(軍器) 장식(粧飾)에 사용되는 사슴뿔 한 척(隻) 값이 면포로는 한 필이 넘었고, 미곡으로는 20여 말(斗)에 달한다고 했다.

이렇게 귀한 노루와 사슴고기가 마침 의주목 관아에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 의주 목사(義州牧使)는 김을신(金乙辛)이었는데, 그도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 생각은 않고 판관과 똑 같이 권력 있는 집과 호세(豪勢)한 곳에 공공연히 뇌물보내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의주는 국경지역에 있었으므로 명나라로 드나드는 고관대작들이 반드시 머물고 가는 곳이었다. 관리의 인사권을 갖고 있는 이조(吏曹)의 요직자나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정승들이 주로 사신으로 임명되어 이곳을 지나쳤다.

이 사건에서 뇌물을 받은 사람은 형조판서 이발(李潑)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수(李隨)였다. 이들은 태종(太宗)이 돌아가신 것을 명나라에 알리기 위한 부고사(訃告使)와 부사(副使)가 되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주목에 들렀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목사와 판관이 모두 포수(脯脩:얇게 잘라서 말린 고기)를 뇌물로 제공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태형을 가하는 장면. 유배객들은 통상적으로 곤장을 맞고 유배를 떠났다.
조선시대 태형을 가하는 장면. 유배객들은 통상적으로 곤장을 맞고 유배를 떠났다.

의금부에서 관리를 파견해서 감찰을 해보니 그동안 김을신이 관청 안의 가죽과 살코기를 뇌물로 쓴 장물(贓物)이 1백 89관이었고, 최윤복이 거들낸 게 13관이나 되었다. 1423년 9월 26일, 의금부에서는 이 사건의 죄책을 물어 김을신을 경상도 안음으로, 최윤복을 경상도 장기현으로 각각 귀양을 보냈다. 그 뇌물로 쓴 물건들은 한성부로 하여금 추징하도록 했다. 하지만 뇌물을 받은 이발(李潑)과 이수(李隨)는 면직되는데 그쳤다. 요즘과 다르게 뇌물을 받는 사람보다도 주는 사람을 더 가혹하게 처벌했던 이상한 시대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언제 자신들도 같은 처지가 되어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정자(爲政者)들의 고육지책(苦肉之策)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이때 장기로 유배를 온 최윤복은 1년 4개월이 지난 1425년 1월에야 풀려났지만 바로 사망하였다. 남부럽지 않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관료 길에 들어서서 탄탄대로를 걷던 그였지만, 후회와 괴로움을 곱씹다가 인생을 마친 것이다. 사망 후인 1425년 11월 20일에야 사면이 된다. 공신의 아들임이 참작되었기 때문이다.

뇌물과 청탁으로 권력을 획득하거나 이득을 취하려는 시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한 순간 잘못된 선택들이 후대의 냉혹한 평가를 받고, 역사에 우셋거리로 남아 회자된다는 사실을 이 사건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역사는 미래라고 하지 않았나. 역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앞날을 예찰(豫察)하라는 귀중한 울림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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