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정치평론가 정두언이 자살로써 생을 마감하였다. 우리나라는 1년에 1만4천명이 자살하고, 인구 10만명 당 자살률이 26.5명으로 세계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자살자 중에는 노인, 인기 연예인, 유명 정치인도 포함된다. 검찰의 조사 과정에 있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 성완종 전 의원, 노회찬 전 의원의 자살은 우리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이번 정두언 전 의원의 자살은 검찰 조사와는 상관없는 일이어서 그의 자살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고 있다. 인기 정치평론가로 신망을 받아온 그가 당일 오전 방송에 출연하고, 오후에 유서 한 장만 남기고 자살한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는 운전기사 아버지와 공사장 잡일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1956년 3월6일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무척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공부를 잘하여 경기고, 서울대를 나와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20년 공직생활을 하였다. 2000년대 초 이회창의 권고로 정치에 입문하고,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 서울시 정무부시장도 역임하였다. 서대문을에서 17대에서 19대까지 내리 3선하고 20대 총선에서 패하였다. 그는 이명박 선거 캠프 기획본부장으로 활동한 결과 한 때 ‘왕의 남자’로 불리며 대통령을 보좌하였다. 그는 한 때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여 음반까지 낸 적도 있다. 그는 자살 직전까지 시사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일식집도 경영한다고 밝힌 바 있다.

정두언은 ‘정치할 생각은 없다’면서도 여러 해 동안 정치평론가로 활동하였다. 필자가 자주 시청하는 CBS의 ‘월간 정두언’이나 MBN ‘판도라’에서도 그의 직설적인 논평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는 ‘만사형통’이라던 시절 권부의 핵심 이상득을 비판하다 권좌에서 밀려나기도 하였다. 그는 보수적 입장에 있으면서도 극우보수를 비판하고, 합리적인 보수의 길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는 진보 정치의 허구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두언은 좌우 양측 어느 측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여 정치인으로서의 설자리를 잃어버렸다. 그가 자초한 고난의 길을 걸은 셈이다. 이번 정두언의 비극은 참된 보수를 지향하던 정치인의 말로를 보는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을 지울 수 없다. 한국의 정당 정치를 빙자한 패거리 정치에 적당히 야합하면 생명은 부지할 수 있는데 그는 이를 거부하여 정치적 실패자가 된 사람이다. 그를 감싸고 있었던 현실 정치에 대한 혜안과 비판이 그의 용기 있는 발언으로 비춰지기도 하였다. 물론 그는 뇌물혐의로 구속되기도 하고, 20대 대선의 쓰라린 실패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의 수차례의 정치적 실패, 이혼과 재혼 등이 인간에 대한 환멸로 연결되어 그의 지병인 우울증을 더욱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는 늘 밖으로 도셨고 수시로 어머니를 구타했다”고 정신적 상처를 진솔하게 고백한 적도 있다. 그가 자살 당일 오전 명쾌한 정치 평론을 끝내고, 오후 스스로 선택한 자살은 우울증이라는 무서운 병리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노회찬에 이은 그의 자살을 계기로 우리의 혼탁한 정치 풍토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국리민복이라는 정치의 대의를 상실하고 정쟁으로 치닫는 한국의 정당 정치,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서로 ‘내로남불’을 외치면서 당리당략에만 치중하는 패거리 정치, 이러한 왜곡된 정치 풍토가 존립하는 한 양심적인 정치인은 생존하기 어렵다. 정두언은 한국 정치의 왜곡된 현실을 직설적인 비판을 통해 대리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우울증이라는 정신적인 질병관리에는 실패하였다. 우리 주변에는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고 있고 유명 정치인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정두언의 자살을 계기로 우리 정치 풍토와 정치인의 정신건강을 체크해볼 시점이다. 정치평론가 정두언의 비극 앞에 그의 명복을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