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도(風流道)
신라의 청년들을 찾아서 ③

경주시 교동 한옥마을에서 약 200m 거리에 있는 재매정. 화랑출신 김유신의 집터로 전해지는 곳에 깊이 5.7m, 최대지름 1.8m 규모의 정사각형의 우물과 1872년에 세워진 비각이 있다. 1991년부터 시행한 발굴조사에서 청동기 시대 주거지 3동, 신라시대~고려시대 건물지 61개소를 비롯한 다수의 우물과 배수로 등이 확인되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풍류도’라는 철학·종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육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수련했던 신라의 화랑들. 우리에겐 그들을 바라보는 선입견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문학작품과 영화에서 묘사되는 화랑은 그 유형이 비슷하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신라가 멈춤 없이 발전하고 인근 국가들과의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청년 리더인 화랑이 존재한다. 그들은 왕을 충성으로 섬기는 사군이충(事君以忠)의 정신을 어떤 상황에서도 잊지 않았고, 전쟁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기개로 무장한 강위력한 조직의 구성원들이었다.”

지난 시절. 정통성과 합법성이 부족했던 독재 정권은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효과적으로 고취시킬 필요성이 있었고, 황산벌 전투(660년)의 불리한 여건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전세(戰勢)를 뒤집은 신라의 화랑 관창(官昌)과 반굴(盤屈) 등을 ‘10대 애국 소년’으로 부각시키고자 했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자면 20세기 중후반 한국 소설에 등장하는 화랑의 모습도 이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이쯤에서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신라의 청년 지도자들은 모두 ‘전투하는 기계(?)’에 불과했을까? 화랑이 ‘용맹’과 ‘애국심’만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화랑을 지도했던 이념인 풍류도의 소프트웨어는 대체 뭘까?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2016년 발행한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은 이런 의문에 답한다. 책은 이렇게 쓰고 있다.
 

문무겸전 인재로 길러낸 ‘화랑’
흥이 넘치고 멋을 알았던 신라 청년들
아름다운 모습 표현으로 화장하기 등
한국 문화의 원형이라 추정되는 1천500년 전
우리 민족의 정체성·21세기 한류 ‘고스란히’

◆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해야 진정한 화랑

‘화랑도의 교육 방법, 수련 방법은 철저하게 조화적·중용적 인간상에 맞추어졌다. 삼국 정립기에 창설되고 조직화했던 만큼 화랑도가 무(武)의 수련에 치중하였을 법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무에 못지않게 문(文)을 중시하여 문무겸전한 인재를 길러냈다. 또 인간의 정신과 육신을 함께 건전하고, 조화 있고, 균형 있게 발전시켜 나가야 된다는 정신을 이 땅에 뿌리 내렸다.’

이 설명처럼 화랑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용맹한 애국심’ 하나만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신적 성숙과 학문에 매진하는 태도 역시 화랑이라면 가져야 할 기본이었다. 화랑의 생활양식과 교육 방법을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기도 하고, 가악(歌樂)으로써 서로 즐기기도 하며,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아주 멀어도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를 보고 그들의 사정(邪正·그릇된 것과 올바른 것)을 알아서 그 가운데 좋은 사람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김부식의 진술처럼 화랑의 이념적 근간이었던 풍류도는 육체와 정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인간을 지향하고 있었다. ‘도의로써 연마한다’는 것이 이성적 영역의 학습이라면, ‘가악으로써 즐기며, 산수를 좋아하는’ 것은 감성적 범주에 해당된다. 이 둘의 조화와 균형이 신라의 화랑들을 ‘점잖고 조숙하며 피 뜨거운 청년’으로 만들었던 게 아닐까? 앞서 말한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은 이런 가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다음과 같은 서술을 통해서다.

“화랑들은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가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버리면서도, 인간 본래의 정감과 순수성을 잘 갈고 닦았기 때문에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화랑들은 자연환경이 빼어난 곳을 찾아다니며 심신을 수련하고, 가악으로써 정감을 발휘했던 것이다. 국토를 순례하면서 애국심을 높이고 개인의 정감을 문학과 예술로 승화시켰다.”

◆ 풍류도는 오늘날 ‘한류(韓流)’의 뿌리?

풍류도, 풍월도, 화랑도를 주제로 한 논문 여러 편을 검토하면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상당수 역사학자들은 풍류도를 지도 이념으로 성장했던 화랑을 ‘흥이 넘치고 멋을 알았던 신라 청년들’로 묘사하고 있었다.

이는 ‘풍류’라는 단어를 ‘신명’ 혹은, ‘신바람’이라 바꿔 사용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는 학계의 일부 주장과도 맞물려 있다. 이처럼 신라의 화랑도는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탁월한 줄타기’를 보여준 선진적인 조직체였다.

풍류도와 화랑도의 운영 체계를 살피다가 매우 흥미로운 논문 하나를 찾아냈다. 철학자 권상우가 2007년 ‘동서철학연구’에 발표한 ‘한류의 정체성과 풍류정신’이다. 권상우는 풍류사상의 특징을 멋, 한, 삶으로 파악했고 이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부연한다.

“풍류의 ‘멋’에는 외형적인 멋과 내면적인 멋이 있다. 외형적인 멋은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는 현상이며, 내면적인 멋은 창의적이고 역동적이면서 개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은 여러 개성들을 어우르는 특징이 있음을 설명한다.

또, 풍류에서의 ‘삶’이란 내세적이고 초월적인 가치관이기보다는 현실의 생활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권상우는 1990년대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돼 현재는 미국과 유럽까지 전파된 한국 대중문화의 유행 현상, 즉 ‘한류’의 뿌리를 ‘풍류정신(풍류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논문 ‘한류의 정체성과 풍류정신’은 한류가 발생할 수 있었던 요인을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기법, 열정, 활력, 다양성, 개성 등에서 찾고 있으며, 이런 특징을 한국인의 문화적 기질로 파악하고 있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는 연출자, 배우, 관객이 하나로 어우러져 제작되는 경우가 많고, 내용에 있어서도 독자성과 우수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어우러짐’이 한과 삶을 강조하는 풍류문화의 특징과 연결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재매정의 우물. 선덕여왕 4년(645년)에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던 김유신 장군이 백제군의 침범 소식을 듣고 쉴 사이도 없이 재출전하는 길에 자기 집 앞을 지나게 되자, 병사를 시켜 우물물을 떠오게 하여 마신 다음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라면서 떠났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해진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ameil.com
재매정의 우물. 선덕여왕 4년(645년)에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던 김유신 장군이 백제군의 침범 소식을 듣고 쉴 사이도 없이 재출전하는 길에 자기 집 앞을 지나게 되자, 병사를 시켜 우물물을 떠오게 하여 마신 다음 “우리 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라면서 떠났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해진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ameil.com

◆ 단재 신채호 “화랑은 우리 민족의 얼”

풍류도와 화랑이 가졌던 위상을 높이 평가한 사학자는 일제강점기에도 있었다. 단재 신채호(1880~1936)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신채호는 단군시대부터 백제의 멸망, 그리고 부흥운동까지를 담아낸 저서인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화랑을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현대적 문장으로 풀어서 인용한다.

“화랑은 신라 발흥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후세에 한(漢)문화가 발호해 사대주의파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과 풍속, 학술계를 지배할 때 가까스로 ‘조선을 조선되게’ 한 정신이다. 어느 시기 이후 화랑의 말과 글이 연기처럼 사라져 비록 직접적으로 감화를 받은 사람은 드물지만, 그 유풍(遺風·후세로 이어지는 가르침)은 간접적으로라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朝鮮史)를 말하는 것은 골을 빼고 사람의 정신을 찾는 것처럼 우매한 일이다.”

권상우는 단재의 문장에 이런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을 조선되게 하는 민족의 얼을 화랑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화랑은 인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정체성으로서의 ‘화랑도’ 또는 ‘풍류도’를 말한다.” 이에 더불어 권상우는 풍류정신을 한국 문화의 원형이라 추정한다.

앞서 말했듯 풍류정신의 특징은 멋, 한, 삶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름다운 외모에 창의적인 개성을 갖추고, 각각의 개성을 융합시켜 동시대가 처한 현실에서 즐거움을 찾아가려 했던 한류. 그 거센 바람이 처음으로 불기 시작한 때인 1990년대 중반. 일본과 중국, 베트남의 대중들은 한국 문화콘텐츠의 힘을 ‘명확한 테마’ ‘넘치는 활력’ ‘격렬한 율동’ ‘뜨거운 열정’ ‘개성의 강조’ 등에서 찾는다고 입을 모았다.

당시 동남아의 젊은이들은 “미소년, 미소녀로 구성된 그룹이 빠른 음악에 맞춰 역동적인 춤을 추며 폭발적인 에너지와 힘을 드러내는 건 다른 어떤 나라의 가수나 그룹도 흉내 내기 어렵다”며 열광했다. 이는 고대의 풍류도가 가졌던 ‘감성의 힘’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현대 사회에서 발휘된 것이라 말해도 되지 않을까?

조금은 자의적 해석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신채호가 말한 바 ‘조선을 조선되게 하는 우리의 얼’인 풍류도(화랑도)가 세계 속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건 ‘한국인의 정신’이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가정(假定)이 근거 빈약한 자만이거나, 쇼비니즘(Chauvinism)이 돼서는 곤란하겠지만.

◆ 풍류도 정신에선 ‘페미니즘’의 향기도….

한류의 진화 과정을 이야기하자면 ‘보이 밴드(Boy band)’의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걸 그룹(Girl group)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의 여성 아이돌(Idol)들은 이 분야에서만큼은 일찌감치 양성평등을 이뤄냈다.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적지 않은 한국 여성 가수와 배우들이 아시아 전역 소녀들의 ‘롤 모델’이 된 형국인 것.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풍류도가 ‘여성 존중 의식까지 담고 있었다’는 학설은 독자들에게 좋은 차원에서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이와 관련해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16권 ‘신라의 언어와 문학’에는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신라 사회의 여성 존중 의식은 (유·불·선이 융합된) 고유의 신앙 풍류도 정신과 짝하고 있다. 풍류도를 실현한 구체적 표상인 화랑제도에서도 구성원의 시작은 소녀들인 ‘원화(源花)’였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이후 소년 화랑들로 조직이 변화되었을 때도 그들에게 화장을 시켜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게 한 것은 풍류도의 정신이 여성적 세계를 지향하는 심미적 영성(靈性)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을 환기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풍류도’는 파고들수록 그 오묘한 내적 시스템에 대한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신라의 통치 이념과 종교적 기반을 닦은 이들은 이미 1천500년 전 21세기의 ‘한류 열풍’과 바뀐 시대의 주류로 자리한 ‘페미니즘’을 예언하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풍류도는 ‘미래학’의 범주에도 포함될 수 있을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