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무역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일본의 저열한 음모에 대한 해석은 충분하다. 일본 아베 총리의 ‘정치적 악용’행태는 물론, 따라붙고 있는 한국의 기술력을 떨쳐버리려는 ‘사다리 걷어차기’ 횡포라는 분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정말 아리송한 것은 지난해 10월 일제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의 배상판결 이후 8개월간 우리 외교는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 하는 의문이다. 예측도 대처도 사라진 만신창이 한국외교를 복구하는 작업이 절실하다는 여론이다.

엉뚱하게도 외교당국이 아닌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이 앞장서서 문제를 점점 더 시궁창으로 몰아넣고 있다. 뜬금없이 ‘죽창가’를 들먹거려 감정적 대응을 부추기더니 이번에는 정부 외교에 대한 언론의 비판을 문제 삼는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도 덩달아 나서서 국내언론의 일본판 기사들을 나열하며 공격을 퍼붓고 있다.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의 입’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이 그렇다는 얘기인데, 이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정부 정책을 반대하고 비판하는 언론이나 인사들에게 ‘친일파’, ‘토착 왜구’라는 사나운 이미지 딱지를 붙이려는 음모가 진행 중이라면 이는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언행이 일본의 무역보복을 가벼운 일로 여기고, 이 비상사태를 민심 갈라치기의 소재로 삼겠다고 하는 심산이라면 그야말로 나라 말아먹을 역적 행각에 다름 아니다.

일본 마쓰야마대 장정욱 교수는 “아베 정부는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내년 7월쯤에야 타협에 나설 것”이라는 끔찍한 진단을 내놓는다. 진보언론들마저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해도 수년이 걸려 우리 기업의 어려움을 당장 풀기 어렵고, 승소한다 해도 보복 철회나 피해 원상회복을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다”고 우려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에서 혐한 분위기가 들끓고 아베 정부가 대놓고 칼을 갈고 있는데도 사전 경계와 예방은커녕 ‘무대응’을 전략이랍시고 내걸고 줄곧 손 놓고 있었던 정부의 대응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5년 독도문제와 관련해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기어이 고치겠다”고 발언한 이후 완전히 냉각돼 있던 한일관계를 극적으로 풀어낸 김대중 대통령의 용단이 떠오른다. 1998년 10월 일본을 국빈방문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선언’을 창출해 1965년 국교정상화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의 한일협력을 이끌어냈다. 탁월한 ‘외교력’이야말로 약소국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다. 외교관 자리를 대선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는 떡쯤으로 여겨온 한국 정치가 빚어낸 희대의 외교 참사가 벌어지고 있다. 청와대가 정치적 계산기 두드리며 나서는 일은 백해무익하다. 빈사 상태의 ‘외교력’부터 살려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