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감정과 과거청산
반일감정과 과거청산
  • 등록일 2019.07.18 18:38
  • 게재일 2019.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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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인류의 역사는 전쟁사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지배해온 역사다. 그리고 역사는 늘 승자의 편이었다. 전쟁에서 많이 이긴 자가 영웅이고 위대한 정복자였다. 그들이 건설한 대제국이 인류의 찬란한 유산이 되었다. 하지만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이어서 흥망성쇠의 부침이 또한 역사였다.

고조선이나 고구려가 융성했던 때를 제외하면 우리는 늘 약소국이었다. 오랜 세월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왕의 책봉을 받는 등의 굴욕을 당했다. 일곱 차례나 몽골의 침탈을 당했고 청나라에는 항복까지 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그래도 나라가 아주 없어지지는 않고 이어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고 민족의 저력이었다.

일본의 침략을 받은 것도 약육강식의 하나였다. 임진왜란은 일본을 통일하고 서양으로부터 신식무기인 조총을 들여와서 전투력이 강력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거듭되는 사화(士禍) 등으로 부패하고 나약해진 조선에 대해 상대적으로 힘의 우위에 놓이게 되자 침략의 야심을 드러낸 거였다. 1910년 한일합방에 따른 식민통치 역시 조선의 국력이 쇠약해 일본과의 힘의 균형이 깨어진 때문이었다.

침략전쟁과 식민통치 기간 중에 일본이 저지른 살상과 파괴와 약탈의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원한으로 치자면 불구대천의 원수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강대국이 되어 받은 만큼 되돌려 준다 한들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힘으로는 독립을 할 수 없었음에도 미국의 원폭투하로 일본이 항복을 하는 바람에 식민지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1965년에 열린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의 타결은 박정희 대통령의 우국충정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야당과 재야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인 것은 역사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미래에 대한 강한 의지와 비전이 없이는 결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사정을 당시에 발표한 특별담화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지난 수십 년간 아니 수백 년간 우리는 일본과 깊은 원한 속에 살아 왔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독립을 말살하였고, 그들은 우리의 부모형제를 살상했고, 그들은 우리의 재산을 착취했습니다. 과거만을 따진다면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무친 감정은 어느 모로 보나 불구대천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 그렇다고 우리는 이 각박한 국제사회의 경쟁 속에서 지난날의 감정에만 집착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제의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들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가 아니겠습니까,”

당시 한일국교정상화의 조건으로 박정희 정권이 제시한 것은 과거청산, 호혜평등의 기본관계 설정과 청구권 문제, 어업협정 문제, 60만 재일교포 처우 문제, 문화재 반환 등이었다. 물론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굴욕외교라는 반대가 거세었지만 그때 받아낸 유무상의 8억 달러로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 등의 국가기간산업에 투입하여 산업화의 기반을 다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의 우리나라 수출의 총액이 고작 1억 달러 남짓이었으니 그것이 얼마나 요긴한 종자돈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요즘 한일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위안부 문제의 재(再)거론과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위자료지급 판결에 노골적인 경제보복으로 맞서는 일본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이 영 불안하다. 가뜩이나 불황인 나라살림에 얼마나 큰 타격이 있을까 걱정들인데, 나라 경제는 아랑곳없이 반일감정이나 부추겨 대결구도로 가려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이런 결과를 고의로 자초한 게 아니라면 감정보다는 국익을 앞세우는 현명한 판단과 대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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