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의 선물로도, 뇌물로도 사용

유채꽃에 이어 피어나는 아카시아의 군락지로 이동하기 위해 벌집을 손질하는 양봉업자들.

옥담 이응희(1579∼1651년)의 시 한 편으로 ‘꿀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의 제목은 ‘심 직강 인시가 편지와 함께 꿀을 보냈기에 사례로 보내주다[謝贈沈直講姻侍致簡遺蜜]’이다.

고맙게도 그대 늙은 나를 불쌍히 여겨/그동안 끊임없이 안부를 물어주었지/한 폭 편지는 천금처럼 귀하고/항아리 가득 꿀은 백화(百花)의 정화/봉투를 뜯으니 정이 가득 담겼고/ 꿀을 삼키니 묵은 병이 낫는 듯/보답하고 싶으나 경거(瓊琚)가 부족해/송료(松醪)를 만안으로 담아 보내노라

옥담은 비록 왕손에서는 멀어졌지만, 왕족 신분이다. 시에 나오는 직강(直講)은 정5품직 벼슬아치다. 안산 수리산 기슭에서 전원생활을 했지만, 왕족이니 꿀 선물이 있었을 것이다. 선물은 꿀과 편지다. 답으로는 편지와 답례품을 보내야 한다. 대신 이 시구를 보냈을 것이다. 문장이 짧아서(‘경거’가 부족해) 그럴 듯한 답장을 보내지 못한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꿀 대신의 답례품은 ‘송료’다. 송료는 ‘소나무 술’이다. 중국에서는 송방(松肪, 송진) 혹은 송화(松花)로 빚는 술이라고 설명한다. 송방주 혹은 송화주라고 부른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솔향이 좋은 술이었을 것이다.

세종대왕은 양녕대군의 동생이지만 먼저 세상을 떠난다. 세종은 마지막까지 양녕을 챙긴다. 술고래이면서 ‘문제적 인간’이지만 ‘조선왕조실록’ 군데군데 형을 향한 세종의 따뜻한 마음씨가 드러난다. 세종 6년(1424년) 3월 7일의 짧은 기사다. ‘약주 10병과 청밀(淸蜜) 한 그릇을 양녕 대군에게 내려 주었다.’

꿀은 ‘청밀(淸蜜)’이라고 불렀다. ‘밀’이 꿀이다. 청밀은 맑은 꿀이다. 봉밀(蜂蜜)은 벌꿀이 만든 것이라서 붙인 이름이다. 색깔이 누렇다고 황밀(黃蜜), 상품(上品)으로 흰 색깔을 띤 맑은 것이라서 백청밀(白淸蜜)이다.

조선 시대에도 양봉을 했지만 꿀은 자연산이 대부분이었다. 귀한 것은 아니지만, 채취가 불안정하니 수급이 고르지 않았다. 가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꿀을 둘러싸고 사건, 사고가 잦았던 이유다.

중종 24년(1529년) 5월, 홍문관의 유여림이 민간에서 발생한 살인 미수사건을 보고한다. ‘계동’은 떠돌이 꿀 장사다. 꿀 장사 계동을 유인, 자기 집에 재운 사람은 어리금이다. 계동은 이미 꿀 장사를 통하여 말도 한 필 마련했고 무명도 지니고 있었다. 어리금은 계동의 말과 무명이 탐났다. 어리금은 계동을 죽이려 했지만 다행히도 실패한다.

유여림은 이 사건을 보고하면서 “민간에 떠도는 이야기라서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소문을 전한다”고 말한다.

16세기 초반에 이미 ‘민간의 꿀 장사’가 있었다. 주막도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꿀 장사는 전국을 떠돌고 있었고, 민간에서 숙박을 미끼로 꿀 장사를 유인하는 일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듬해인 중종 25년(1530년) 이행(1478∼1534년), 윤은보(1468∼1544년) 등이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한성부 편에 꿀을 파는 가게가 등장한다. ‘청밀전(淸蜜廛)’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청밀전 도가는 하피마병문(下避馬屛門) 동쪽 가에 있다”라고 했다. ‘하피마’는 ‘아래 피맛골’이다. 서울 종로구 장사동 일대다. ‘전(廛)’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가게다. 당시 공식적인 전의 주 고객은 궁중과 세금을 대납하는 공납업자들 혹은 권문세가, 부호들이었을 것이다.

꿀은 궁중에서도 귀하게 사용했다. 궁중 내부에서 사용하기도 하고, 중국, 일본 규슈, 오키나와 등과의 조공무역에도 사용했다.

‘승정원일기’ 인조 17년(1639년) 12월 3일의 기사다. 제목은 ‘세 사신이 요구한 청밀 등의 숫자를 줄여서 주고 정 역관에게도 약간 지급하겠다는 호조의 계’다.

김육이 호조의 말로 아뢰기를, “정 역관(譯官)이 세 사신이 청구한 청밀(淸蜜) 각 10두(斗), 호도(胡桃) 각 15두를 얻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숫자대로 주지는 못하나 각각 1, 2두를 줄여서 주되, 정 역관이 으레 세 사신이 청구할 때 또한 바라는 바가 있었으니 약간을 아울러 구해 지급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사신들이 원하는 것은 호두 각 15두와 청밀 각 10두다. 그대로 줄 수는 없다. 양이 부족하다. 더 큰 문제는 꾸짖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다. 통역관들이 늘 문제다. 중간에 이간질도 하고 사신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한다. ‘정 역관이 으레 바라는 바가 있다’는 표현은 이제까지 대부분 역관이 부정부패, 추가 뇌물 요구에 능했음을 보여준다. 굴욕적인 병자호란(1636∼1637년)이 끝난 지 겨우 2∼3년이 지났다. 국가 재정도 엉망이다. 처절하게 당한 패전국이다. 힘센 나라가 억지로 요구하는 공물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조의 태도가 눈에 보인다.

꿀을 구해서 세금으로 올리는 지방의 문제는 더 심각했다. 꿀 공납을 빌미로 각종 부정부패가 일어났다.

‘승정원일기’ 영조 3년(1727년)11월 24일의 기사 제목은 ‘품질이 좋지 않은 청밀(淸蜜)을 진상한 영광(靈光) 등의 해당 봉진관을 엄하게 추고할 것 등을 청하는 사옹원 감선 제조의 계’다.

박필철이 (중략) 아뢰기를, “전라도에서 12월에 각 전에 진상하는 물품이 (중략) 청밀(淸蜜)의 품질이 몹시 좋지 않아 색과 맛이 모두 나쁩니다. (중략) 부득이 퇴짜를 놓아 보내고 (중략) 봉진관이 신중을 기하지 못했으니 일이 몹시 놀랍습니다. 그러나 허다한 수령을 일시에 모두 파직할 수는 없으니 영광(靈光) 등 37개 읍의 해당 봉진관을 모두 엄하게 추고하고, 감사도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역시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놀랍게도 꿀 문제를 일으킨 지방 관청의 숫자가 무려 37개 읍이다. 인근의 모든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문제가 일어났다. 추고(推考)는 사건의 경과를 따져본다는 뜻이다. 당장 벌을 내리는 것은 아니되, 일의 경과와 잘못 여부를 따져보는 일이다. 지방 관청의 벼슬아치로서는 번거롭고 불편한 일이다. 이유는? 꿀의 색과 맛이 나쁘기 때문이다.

꿀은 조선 초기부터 꾸준히 문제를 일으킨다.

세종 5년(1423년)2월 14일,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다. 제목은 ‘사헌부에서 김득상을 탄핵하다’이다.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김득상(金得祥)이 사천 병마사(泗川兵馬使)가 되었을 때에, 관청의 물건으로 집정(執政)과 모든 친한 이에게 뇌물을 주고, 화살촉과 청밀(淸蜜) 등을 거두어들이고, 탐오(貪汚)하여 법을 어기면서 백성의 재물을 손해 보였으니, 죄를 주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으나, 일이 사죄(赦罪) 전에 있었다고 하여 죄를 주지 말도록 하고, 다만 장물(贓物)만 징수하도록 명하였다.

다행히 사면령 이전에 죄를 지어서 장물만 징수 당하고 끝난다.

비슷한 시기인 세종 11년(1429년) 1월, 형조의 보고다. 내이포(乃而浦, 경남 창원 진해)의 천호 조안중이 크고 작은 죄를 저질렀다. 보고 중에 “선군(船軍) 2인의 역을 면제하여 주고 대신 꿀(淸蜜, 청밀) 4그릇을 거둬들였다”는 내용이 있다. 꿀 4그릇을 뇌물로 받고 배를 젓는 등 힘든 일에서 빼주었다는 것이다. 사천병마사 김득상에 비하면, 그리 큰 죄가 아닐 듯한데 조안중은 곤장 80대를 맞았다. 곤장 80대는 중벌에 속한다.

꿀을 귀하게 다룬 이유는 간단하다. 약재나 과자를 만들 때 반드시 꿀이 필요했다.

의학 서적인 ‘의방유취 권1_총론_원약(圓藥) 만드는 방법[員藥法]’에 “꿀[蜜]이 들어간 약제에는 약물 1근(斤)당 꿀 1근을 사용한다”는 내용이 있다. ‘의방유취’는 1445년(세종 27년) 편찬했다. 원전은 중국 송(宋)나라 주좌(朱佐)가 편찬한 ‘주씨집험방(朱氏集驗方)’이다.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일찍부터 꿀을 약재에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꿀은 민간의 문서에서도 나타난다. 경북 성주의 ‘성산 이 씨 문중_이해진가(李海鎭家)’ 고문서 중 간찰(簡札, 편지)에 꿀이 나타난다. 1771년(영조 47년), 이 집안 이정언(李正言)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 “편지를 바란다. 객병(客病)이 남아있으니 한탄스럽다. 석어와 민어, 꿀 등을 보낸다.”는 내용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새해 인사와 안부를 묻는 것이다. 석어(石魚)는 석수어(石首魚)로 조기다. 민어와는 사촌지간이다. 둘 다 말려서 유통했다. 제사 필수품이다. 꿀도 마찬가지. 제사를 모시려면 조과(造菓), 과자가 필요하다. 과자를 만들려면 꿀이 필수적이다. 이외에는 나이든 노인들이 ‘약으로 여기고 한, 두 숟가락’ 먹는 정도였다.

사족이다. 경북 북부 일대는 꿀의 명산지다. 사람 발길이 드문, 태백산 깊은 산속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벌꿀도 있다. ‘안상규 벌꿀’이다. 꿀에 양봉하는 이의 이름을 붙인 경우다. 경북 경산의 ‘안상규 벌꿀’은 대추나무 벌꿀이 특이하다. 경북 안동 예안의 ‘박영근 벌꿀’도 마찬가지. 농장주 이름을 걸었다. 속이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박영근벌꿀’은 ‘숙성 벌꿀’이다.

/맛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