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에 가면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보인다
장기에 가면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보인다
  • 등록일 2019.06.20 20:00
  • 게재일 2019.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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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고을과 유배문화
프롤로그 - 유배인들의 사상과 철학 녹아든 장기면

장기현감이 관장하던 장기읍성. 현감은 매월 점고를 통해 유배인들을 감독했다. /향토사학자 이상준 제공

어떤 사람들은 장기를 ‘유배지’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심지어 장기사람들을 유배 온 사람들의 후손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마치 장기지역 전체가 귀양지인 것처럼 인식된 이유는 조선시대의 형벌제도를 정확히 알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장기는 신라 때는 지답현(只沓縣)이었다.

 

유배인들이 머물다 간 유배지는 한 선비에게는 말 못할 고통의 장소였겠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문학의 산실이자 더 높은 문화의 보급 장소이기도 했다.
장기지역을 거쳐 간 수많은 유배객들도 그들이 머물렀던 이곳의 풍광과 서정을 주제로 많은 음영과 저술을 남겼다.

의금부노정기에 표시된 장기 관련기록.
의금부노정기에 표시된 장기 관련기록.


남으로는 경주의 감포 경계까지, 북으로는 현재의 구룡포와 호미곶까지를 관장하던 동해안의 관방요충지였다.

고려 태조23년(940)에 장기현(長 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현종9년(1018)에 경주부의 속현이 되었다.

공양왕2년(1390)에 현으로 승격하여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조선 태종 15년(1415)에 동해안으로 들어오는 왜구를 막는 해방(海防) 요충지임을 감안하여 무신으로서 벼슬이 높은 자를 지현사(知縣事)로 파견하였다.

관내에는 신라 때에 설치한 시령산성, 만리성 등의 고대 산성들과 고려 현종 2년(1011년)에 토성으로 쌓아 조선 세종 21년(1439년)에 석성으로 개축하였다는 장기읍성이 있다.

세종 때는 현감 외에 장기 모포리에 포이포진을 설치하고 종4품 무관인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배치하여 진을 관장토록 했다.

경상도거춘등도류안(慶尙道去春等徒流案). 1894년(고종 31)부터 1895년 3월 사이에 경상도 각지에 정배된 죄인들의 유배안으로 1895년 4월에 경상감영에서 만들었다. 죄인별로 정배지·죄인의 성명·도배 연월일·보수주인의 이름과 직역 등이 기재되었다.  /향토사학자 이상준 제공
경상도거춘등도류안(慶尙道去春等徒流案). 1894년(고종 31)부터 1895년 3월 사이에 경상도 각지에 정배된 죄인들의 유배안으로 1895년 4월에 경상감영에서 만들었다. 죄인별로 정배지·죄인의 성명·도배 연월일·보수주인의 이름과 직역 등이 기재되었다. /향토사학자 이상준 제공

유배지에서는 유배인들에 대한 감시와 감독이 필수적이다. 장기는 유배인을 감독할 수 있는 감독청으로 현청뿐 아니라 수군만호까지 한 개 더 있다는 점과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연해지역이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조선시대 유배지로는 적격이었다. 유형의 종류는 유배의 거리, 죄의 경중, 집행방법에 따라 구분된다. 조선 초기 ‘경국대전’에는 거리에 따라 유 2천리, 유 2,500리, 유 3천리의 세 등급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대명률(명나라 법률)의 규정을 적용한 것이므로, 아무리 먼 곳도 한양에서 2천리가 넘지 않는 조선 땅에는 사실상 이 규정이 적합하지가 않았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거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돌아가는 곡형제도를 쓰기도 하였으나 뚜렷한 기준이 없었다.

후에 태종은 대명률의 유배에 관한 규정을 우리 실정에 맞춰 속전(贖錢·형벌대신 내는 금전)을 내면 거리를 감하여 주는 ‘유죄수속법(流罪收贖法)’을 시행하였으나 이도 문제점이 많긴 마찬가지였다. 이에 세종은 전국적으로 유배지를 단축하고 혹은 우회하여 도착시키는 식으로 변용하여 우리 실정에 맞게 ‘배소상정법(配所詳定法)’을 만들었다.

조선조 장기 유배인들의 실상을 알아보기 위해 최근에 세운 장기유배문화체험촌 모습.  /향토사학자 이상준  제공
조선조 장기 유배인들의 실상을 알아보기 위해 최근에 세운 장기유배문화체험촌 모습. /향토사학자 이상준 제공

즉 경성·경기에 사는 사람들이 유 3천리 형을 받을 경우는 경상도·전라도·평안도·함길도 내에 있는 30개 역(驛) 밖 빈해(바다에 가까운 땅) 고을로 보내고, 유 2천500리는 25개역 밖, 유 2천리는 20개 역 밖에 있는 각 고을로 보내도록 해당고을을 법으로 미리 정해놓은 것이다.

이에 따르면 장기는 경성(京城)에서 유 3천리 빈해(濱海) 지역에 해당되었다. 이로서 의금부에서 죄인의 배소를 지정한 곳을 기록한 ‘의금부노정기’에 유3천리 유배지로 장기가 등재되었고, 조선 내내 유배지로 널리 활용되었던 것이다.

영조 때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흑산도와 같이 험한 곳이나 무인도에는 유배를 금지시켰으므로 영조 이후에는 장기로 유배 온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아졌다.

‘의금부노정기’에 따르면, 경성에서 장기까지 유배길은 한양-남태령-안성(죽산)-충주-문경-상주-함창-의흥-신령-영천-경주-장기로 연결되는 영남대로였다. 이 길은 서울에서 860리 이고 하루 95리를 걸어 9일 반이 걸려야 도착하는 긴 여정이었다. 유배형은 조선후기에 이르면 ‘증보문헌비고’에서 볼 수 있듯이 천사(遷徙), 충군(充軍), 정배(定配), 위노(爲奴) 등으로 세분화 된다.

천사는 죄인을 고향으로부터 외방 먼 곳으로 이주시키는 형벌이다. 충군은 군역을 부과하는 것이고, 위노는 관의 노비로 삼는 것을 말한다. 정배는 한 장소를 정해 죄인을 유배시키는 것을 말한다.

노론계 인사들과 지역 선비들이 우암의 학풍을 계승하기 위해 세웠던 죽림서원 안내판.
노론계 인사들과 지역 선비들이 우암의 학풍을 계승하기 위해 세웠던 죽림서원 안내판.

정배 중에 안치(安置)는 유형중에서도 행동의 제한을 가장 많이 받는 형벌로서 유형지에서 다시 일정한 지역 내로 유거하게 하는 것이다.

안치는 유거의 성질에 따라 본향안치, 절도안치, 위리안치 등이 있다. 이외에도 유형의 일종으로서 집행방법에 따라서는 부처(付處)가 있는데, 이것은 유배인의 평소 공로나 정상 등을 참작하여 유배지로 가는 중간지점 한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처분이다. 그래서 ‘중도부처’라 하였다. 위에 열거한 형벌은 용어 자체의 뜻은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유형을 뜻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유배지는 모두 408곳 정도이다.

이중 경상도가 81곳으로 가장 많고 전라도가 74곳, 충청도는 70곳이다.

실록 등을 분석하면 조선의 대표적인 관직에 나아가 중요 직책이나 고위직에 오른 사람치고 유배길에 오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시대 유배는 관리들에게 흔한 의식치례였다.

조선조 장기로 유배가 결정된 유배인은 대략 220여 명(계속 조사 중, 유동적 임)으로 확인된다.

이는 단일 현(縣)지역 유배인 수로는 국내에서 제일 많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조선 태조 1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종1품)로 있던 설장수(<5070>長壽)가 정몽주와 같은 파였다는 탄핵을 받아 장기로 유배 온 것을 비롯하여 세종 때는 개국공신 홍길민의 아들인 대사헌 홍여방, 세조 때는 단종복위 운동에 연루된 박팽년의 가족들이 연좌되어 대거 이곳으로 왔다. 연산군 때(1500년)는 무오사화에 연루된 대사간 양희지가 왔고, 숙종 때(1675년)는 우암 송시열이 제 2차 예송(禮訟) 사건으로, 기사환국(1689년) 때는 영의정 김수흥이 왔다. 경종 1년(1721년)에는 판서 신사철이 신임사화에, 정조 때(1801년)에는 다산 정약용이 신유박해 사건에 각각 연루되어 장기로 오기도 했다. 유배인들이 머물다 간 유배지는 한 선비에게는 말 못할 고통의 장소였겠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문학의 산실이자 더 높은 문화의 보급 장소이기도 했다.

장기지역을 거쳐 간 수많은 유배객들도 그들이 머물렀던 이곳의 풍광과 서정을 주제로 많은 음영과 저술을 남겼다. 특히 다산 정약용은 장기에 머물면서 결코 유배지의 한을 좌절과 절망으로 여기지 않고 학문연구와 시작에 전념하였다.

그가 직접 전해들은 이곳 사람들의 애환과 관리들의 부패상을 우화적이고 은유적인 시로 표현함으로써 현실적 설득력을 보탰다. 그런 경험은 후에 그가 ‘목민심서’를 저술하는데도 큰 계기가 되었다.

그보다 120여년 먼저 온 우암 송시열은 4년 여간 장기에 머물면서 남인 세력들이 득세한 경상도에 노론계의 학파를 형성할 정도로 후학양성에도 힘을 썼다. 이곳을 거쳐 간 유배인들의 영향으로 장기는 학문을 숭상하고 선비를 존경하며 충절과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풍토가 조성되었다.

종4품 무관인 수군만호가 관장하던 포이포진의 현재 모습(장기면 모포리).
종4품 무관인 수군만호가 관장하던 포이포진의 현재 모습(장기면 모포리).

비록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바닷가 작은 고을이었지만 중앙의 올곧은 관리들과 좋은 서적들을 접하면서 지식과 문화교류를 활발히 전개하여 충절과 유현의 고을로 환골탈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장기에 가면 유배문화의 흔적들이 있다.

영의정을 지낸 퇴우당 김수흥처럼 이곳에서 객사한 유배인도 있고, 이시애의 난에 연루된 사람들의 가족들처럼 끝까지 복권되지 않아 지역민으로 살다가 한과 애환을 품은 채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이들의 이야기들을 시대별로 엮으면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

무슨 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그들은 유배지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지냈으며, 그들이 남긴 사상과 철학은 장기사람들에게 어떤 형태로 녹아있는지를 헤쳐 보려 한다.

이 글을 접한 이들이 장기를 찾아 한번쯤은 유배인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약력

-영남대 대학원 한국학 전공

-향토사학자, 수필가

-대표 저서

‘장기고을 장기사람 이야기’, ‘영일 유배문학 산책’, ‘포항의 3.1운동사’, ‘해와 달의 빛으로 빚어진 땅(공저)’, ‘포항의 독립운동사(공저)’, ‘포항시사(공저)’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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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재 2019-06-22 07:01:05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내내 향토 역사에 대한 관심이 더해 지길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