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도살은 엄벌…조선 정조대왕 때에야 고기 문화 시작
소 도살은 엄벌…조선 정조대왕 때에야 고기 문화 시작
  • 등록일 2019.06.12 20:22
  • 게재일 2019.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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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는 ‘또 다른 가족’이었다

소는 식용의 대상이 아닌 농사의 도구였다. 한반도의 쇠고기 문화는 불과 200년 남짓이다. 먹음직하고 예쁘게 장식된 쇠고기 요리.

이른 새벽이었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의 목소리. “쟈, 오늘 먼 길 가는데 콩대도 좀 넣고. 여물 잘 끓여서 멕여라.” 아버지의 대답. “예, 그러잖아도, 콩대 마이 넣고, 보리쌀도 쫌 넉넉하게 넣니더.”

1960년대 후반 어느 겨울 새벽, 외양간에는 누렁이가 여물을 먹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 우시장에 팔려나간 누렁이는 도살장으로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저녁 무렵, 아버지는 오백 원 지폐 한 뭉치와 어린 송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오셨다.

소는 식용의 대상이 아니었다. 우경(牛耕). 농사의 주요 도구였다. 겨울철, 송아지는 열심히 먹고 몸을 불린다. 봄철, 얼마쯤 자란 송아지는 코뚜레를 꿴다. 일할 준비를 한다. 한 해 동안 일하고 몸을 불리며 송아지는 점점 자라 슬슬 소의 모습을 갖춘다. 더러는 겨울을 넘기고 이듬해에도 우리 논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겨울날의 어느 이른 새벽, 다 자란 소는 마지막 식사를 하고 우시장으로 향했다.

한반도 소의 역사는 길다.

소는, 농가의 ‘가족’이었다. 황소는 20인분의 일을 해낸다. 장정 몇이 파내지 못하는 큰 돌을 소는 쟁기질 한 번으로 뽑아낸다. 우리는 오랫동안 소를 농사의 도구로 이용했다. 이밥에 고깃국은 우리 민족의 소망이었다. 남쪽은 1970년대에 이루었고, 북쪽은 아직도 ‘소망’으로 남았다.

농경민족이다. 부여, 고구려 등 기마, 수렵민족의 피를 물려받았으나 한반도로 들어온 우리 선조들은 농경(農耕)을 업으로 삼았다. 고기를 도축하고, 먹는 북방 수렵민족의 피는 희미해졌다. 10세기 말, 북방의 기마, 수렵민족이 한반도에 나타난다.

눌재 양성지(1415~1482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세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섬겼고, 많은 서적, 기록을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소 도살’을 금하자는 양성지의 상소문이 여러 군데 남아 있다. 1456년(세조 2년), 1467년(세조 13년), 1469년(예종 1년)이다.

경북 영덕의 ‘아성식당’ 불고기.
경북 영덕의 ‘아성식당’ 불고기.

소 도살은 심각한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상황이 점점 나빠진다는 점이다. 양성지는 십수 년 동안 여러 차례 ‘소 불법 도살 문제’를 엄중하게 제기한다. 그동안 양성지는 집현전 직제학, 대사헌, 공조판서 등으로 관직도 달라진다.

1456년 3월, 양성지의 상소문이다. 제목은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춘추 대사, 오경, 문묘 종사, 과거, 기인 등에 관한 상소’다. 긴 내용을 인용한다.

“(전략) 대개 백정을 혹은 ‘화척(禾尺)’이라 하고 혹은 ‘재인(才人)’, 혹은 ‘달단(韃靼)’ (중략) 백정(白丁)이라 칭하여 (중략) 지금 오래된 자는 5백여 년이며, 가까운 자는 수백 년이나 됩니다. 본시 우리 족속이 아니므로 유속(遺俗)을 변치 않고 (중략) 혹은 살우(殺牛)하고 혹은 동량질을 하며, 혹은 도둑질을 합니다. 또 전조(前朝) 때, 거란(契丹)이 내침(來侵)하니, 가장 앞서 향도(嚮導)하고 또 가왜(假倭) 노릇을 해 가면서, (중략) 지금도 대소(大小)의 도적으로 체포된 자의 태반이 모두 이 무리입니다. 친척(親戚)과 인당(姻黨)이 팔도(八道)에 연면(連綿)하여, 적으면 기근(饑饉)되고, 크면 난리를 일으키니, 모두 염려가 됩니다. (중략) 그 홀로 산골짜기에 거처하면서 혹 자기들끼리 서로 혼취(婚娶) 하거나 혹은 도살(屠殺)을 행하며, 혹 구적(寇賊)을 행하고 혹은 악기(樂器)를 타며 구걸하는 자를 경외(京外)에서 엄히 금(禁)하여, (중략) 저들도 또한 스스로 이 농상(農桑)의 즐거움을 알게 되어 도적이 점점 그칠 것입니다.

쇠고기와 무청 시래기탕.
쇠고기와 무청 시래기탕.

백정, 소를 도축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이름이 여럿이다. 화척, 재인, 달단, 백정 등이다. 하는 일은 무엇인가? 농사를 짓지 않으니 소를 도축한다. 일거리가 없으면 동냥질, 도적질에 나선다. 언제 한반도에 왔는가? 이미 내륙 혹은 국경 언저리에 있었다. 거란이 침입하니 앞잡이가 되어 거란의 고려 침공을 돕는다. ‘전조(前朝)’는 고려다. 거란의 1차 고려 침략은 993년이다. 양성지의 상소문과 비교하면 460여 년 전이 일이다. ‘오래된 자는 5백 년’이란 표현이 맞다. 지금으로 치자면 1,100년 전이다. 한반도에도 북방 유목민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이 고기 문화를 한반도에 전한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 1091~1153년)이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고기 다루는 솜씨가 허술하다”라고 한 것은 1123년 무렵이다. 거란의 고려 침입 130년 후다. 여전히 한반도의 우리 선조들은 고기 다루는 솜씨가 늘지 않았다. 생활 습속이 다른 이민족은 고기를 도살하고 먹었지만 고려, 조선은 이단시한다.


양성지가 상소문을 올린 조선 초기에는 이들이 사회 문제였다. 화척은 자기네들끼리 모여 산다. 결혼도 자기들끼리 한다. ‘강원도, 경상도’에 산 것은, 이 지역이 태백산맥 산악지대이기 때문이다. 산에는 짐승이 있다. 할 일이 있다. 외부에서 관군이 오더라도 버티기 쉽다. 거꾸로 관군들은 이들을 쫓기 힘들다. 차라리 깊은 산속에 사는 것이 낫다. 한양이나 대도시에 나타나면 불법 도축하고 사회적으로 말썽을 일으킨다.

조선 정부는 이들이 ‘농상(農桑)의 즐거움’을 알고 농사에 편입되기를 기대한다. ‘농상’은 농사짓고, 뽕나무 기르며 누에 치는 삶을 뜻한다. 화척들은 호락호락 조선 사회에 편입되지 않는다.

‘달단(韃靼)’은 ‘가죽을 잘 다루는 종족’이라는 뜻이다. 달단은 ‘타타르(tatar)’ 혹은 ‘타르타르(tartar)’ 족이다. ‘타타르 스테이크’는 날고기로 만든 스테이크다. 우리의 육회와 닮았다. 타타르 족은 터키, 동유럽 등으로 이주한다. 유목, 기마, 수렵민족이다.

1467년(세조 13년) 1월, ‘대사헌 양성지’가 또 상소문을 올린다. 제목은 ‘농우 도살 금지에 관한 상소문’이다.

(전략) 남산의 소나무는 진실로 없어서는 안 되지만, 설혹 없다손 치더라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중외(中外)의 소[牛畜]는 농사를 지어 살아가는 데 자산(資産)이 되니,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중략) 곡식을 생산하는 소가 없다면, 곡식을 들여다 저장하는 창고가 있더라도 이를 장차 무엇에 쓰겠습니까? 옛날에는 백정(白丁)과 화척(禾尺)이 소를 잡았으나, 지금은 경외(京外)의 양민(良民)들도 모두 이를 잡으며, 옛날에는 흔히 잔치를 준비하기 위하여 소를 잡았으나, 지금은 저자 안에서 판매하기 위하여 이를 잡고, 옛날에는 남의 소를 훔쳐서 이를 잡았으나, 지금은 저자에서 사서 이를 잡습니다. 백정은 일정한 수(數)가 있으나 양민은 그 수가 무한(無限)하며, 잔치는 일정한 수가 있으나 판매하는 것은 끝이 없으며, 남의 것을 훔쳐서 잡는 것은 일정한 숫자가 있으나 소를 사서 잡는 것은 무궁(無窮)하니, 일정한 수효가 있는 소를 무궁한 날에 끝없이 잡는다면, 반드시 남산의 소나무와 같이 다 벤 다음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날에는 소를 잡는 도적[宰牛賊]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거골장(去骨匠)’이라 칭하고, 여염(閭閻)의 곳곳에 잡거(雜居)하면서 소를 잡아도 대소(大小) 인리(隣里)에서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중략) 무릇 소를 잡은 사람은 (중략) 수종(首從)을 가리지 말고 모두 다 즉시 사형에 처하되, 그 처자(妻子)와 전 가족을 변방으로 이주시키고, 소를 잡는 것을 고(告)한 자는 재산(財産)으로써 상(賞)을 주되( 후략)

살벌하다. 소를 불법 도축하면 주범이든 종범(從犯)이든 사형이다.

경북 영덕의 ‘아성식당’ 불고기.
경북 영덕의 ‘아성식당’ 불고기.

신고하면 범인의 재산을 신고자에게 준다. 남산의 소나무가 없어지듯이 조만간 소가 씨가 마를 것이라고 경고한다. 여전히 불법 도축은 사라지지 않았다. 소 잡는 도둑, ‘재우적’이라고 하더니, 드디어 소 잡는 장인, ‘거골장’이라고 한다. 민간인까지 소 불법 도축에 나선다.

1469년(예종 1년) 6월, 다시 양성지의 상소다. 더 절박하다.

우선 우리나라의 풍속으로 말하더라도 양수척(楊水尺)이라는 것은 전조(前朝)의 초기에 있었는데, 강도(江都) 때에도 또한 있었으며, 재인(才人)과 백정(白丁)은 충렬왕(忠烈王) 때에 있었는데 공민왕(恭愍王) 때에도 있었으므로, 먼 것은 5, 6백 년, 가까운 것은 수백 년을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 현가(絃歌)의 풍습과 재살(宰殺)의 일은 지금까지도 고치지 않았으며, (후략)

양수척은 고려 초기에 이미 있었다. 후삼국 시대에도 있었을 것이다. ‘강도’는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왕조를 이른다. 소를 도축하는 이들은 화척이었다. ‘현가의 풍습’이라고 못 박았다. ‘현가’는 거문고 타고, 노래 부른다는 뜻이다. 광대, 재인, 기생 등이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추정도 있다. 농사짓는 소를 도살하며, 무리 지어 노래 부르고 논다. 일은 하지 않는다. 조선 왕조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한반도의 쇠고기 문화는 이들로부터 시작된다. 조선 후기인 정조대왕 시절에야 고기 먹는 문화가 서서히 정착된다. 무려 300여 년 후다.

그동안 소의 불법 도살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도살은 늘어났다. 거꾸로 법 적용이 느슨해졌다. 양성지는 “소가 어느 날 남산의 소나무같이 없어지리라”고 경고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니 국왕 정조대왕부터 신하들과 고기 굽는 불판 앞에 앉는다. 난란회(煖暖會) 혹은 난로회(煖爐會)다. 한반도의 고기 문화는 이 무렵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맛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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