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설립된 흥해교회 보다 4년이나 빨라
지역 최초 전도자는 일본서 예수 믿은 한국인
포항 기독교 118년 자취 찾아

포항지역의 최초 교회가 포항대송교회의 전신인 괴동교회로 확인됐다.
또 이 지역에 최초 복음을 전한 기독교인은 외국인 선교사가 아니라 일본에서 귀국한 한국 청년으로 밝혀졌다.
이 지역 400여개 교회 중 100년이 넘는 교회는 24곳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포항지역 최초 교회인 괴동교회 설립자 박군현씨.
포항지역 최초 교회인 괴동교회 설립자 박군현씨.

▢ 설립 100년 넘은 교회 24곳이나 돼

포항시 승격 60년사와 포항대송교회 100년사, 포항제일교회 100년사, 포항시기독교교회연합회 50년사 등과 지역 교회 교인들의 증언을 종합 분석한 결과, 이같이 파악됐다.

포항시기독교교회연합회가 2008년 10월 '50주년 기념'으로 펴낸 포항시 기독교사를 보면 성법교회가 1903년 설립돼 포항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1905년 흥해교회(흥해중앙교회와 흥해제일교회의 전신), 1906년 대도교회, 1907년 괴동교회(현 대송교회), 조사리교회, 화봉교회, 1908년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 발산교회, 대곡교회(현 기북교회), 1909년 송라침례교회, 계원침례교회, 1910년 화진교회 순으로 설립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면서 포항시 기독교사는 괴동교회에 대해 더 연구하고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적었다. 이유로는 일본에서 주를 믿고 입교인이 되었던 박군현이에 의해 1901년 괴동교회가 설립됐다는 ‘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 ‘경북교회사’와 1907년 괴동교회가 대도교회로부터 분립됐다는 ‘조선야소교장로회사기’(280쪽)의 다른 점을 근거로 들었다.

2010년 4월 발간한 포항시 승격 60년사도 성법교회의 설립일을 제외하면 포항기독교교회연합회가 발간한 50년사와 거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포항시 60년사를 보면 1905년 흥해교회, 1906년 대도교회, 1907년 괴동교회, 화봉교회, 조사리교회, 1908년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 발산교회, 대곡교회(현 기북교회), 1909년 송라침례교회, 계원침례교회, 화진침례교회, 1911년 칠포교회, 1912년 신계침례교회, 방산교회(장기교회 전신), 1913년 성법교회, 대전리교회, 중명교회, 1914년 청하교회, 1915년 장기교회, 월포침례교회, 1916년 제일침례교회, 1917년 죽장교회, 청하 유계교회, 1919년 죽장 상옥교회 순으로 설립된 것으로 파악됐다.

1904년부터 1913년까지 미국 맹의와(McFarland, Edwin Frost) 선교사가 설립한 교회 현황도 포항시 60년사 등 앞의 두 기록과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맹의와 선교가 설립한 교회 현황을 기록한 경북교회사와 구미인조사록, 기독교백과사전 5권, 내한선교사총람,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하는 1906년 대도교회에 이어 1907년 괴동교회, 1908년 포항교회(현 제일교회), 대곡동교회, 1911년 칠포교회, 1912년 방산교회(장기교회 전신), 1913년 성법교회 순으로 설립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1901년 괴동교회 설립 당시 박군현씨의 사랑채.
1901년 괴동교회 설립 당시 박군현씨의 사랑채.

▢ “박군현씨, 1901년 괴동교회 설립”

그러나 대송교회의 100년사와 교회 홈페이지를 보면 대송교회가 1901년 설립된 괴동교회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나타났다.
괴동교회는 1901년 일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뒤 귀국한 박군현이 자신의 사랑채(영일군 대송면 본동)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괴동교회 설립자 박군현은 1902년 안종덕(동필)과 박문찬을 전도했고, 1903년에는 교인수가 10명으로 늘어나자 예배당을 조성했다.

이 같은 내용은 1928년 발간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上)과 현대종교 1991년 6월호, 울릉도 90년사에도 아래와 같이 기록돼 있다.
“영일군 괴동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본리인 박군현이 일본에서 신주(信主)하고 귀가하여 자기 가(집) 협실에서 예배하며 열심(히) 전도하야 안종필, 박문찬 외 남녀와 아동 수십 인이 상계 신종하야 예배당을 신축하니 교회가 수성하니라. 그 후 신종한 이는 조사 황경선, 금석범, 김순여, 김병호, 송문수, 조기철, 이춘중 제인이러라.”

1923년 펴낸 경북교회사에서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01년 영일군 대송면 괴동교회 입하다(세워지다). 본동 박군현이 회히 일본에서 주를 믿고 입교인이 되었던바 본년(1901년)에 귀래하여 자기 협방에서 예배하며 열심(히), 전도한 결과 박천필, 안종필, 박문찬, 임일규, 김중집, 정순금 외 부인 및 아동 27인의 신자를 득하야(얻게 되어) 주일마다 각 교인의 집으로 순회 예배를 드리다.”

박군현이가 일본에서 어떤 생활을 한 지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포항 대송교회 100주년 화보편찬위원장 김재영 장로는 “일본은 한국보다 기독교를 먼저 받아들였다”며 “일본에서 생활하던 박군현이 귀국한 뒤 나라(조선)의 어려움을 극복해 보겠다는 의지로 자신의 사랑채 한 칸을 예배당으로 삼아 전도하며 예배를 드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괴동교회는 1907년 맹의와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것이 아니라 1901년 박군현이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확인 할 수 있다.
괴동교회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들려다 보면 이해할 수 있다.

▢ “괴동교회 교인들, 대도교회 등 교역자로 활동”

1904년에는 조사(목사나 선교사를 도와 전도하는 교직) 황경선, 금석범, 김순여, 김병호, 송문도, 조기철, 이춘중 등과 믿음생활을 했다. 이후 이들은 지역 곳곳으로 흩어져 교회를 세우는데 기여했다. 1904년 문을 연 대도동교회(현 대도교회)와 1905년 세운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의 교역자 등으로 활동했다.
1907년에는 괴동교회 출신의 박문찬, 박천필 등 10여명이 오천동(연일)에 3칸의 예배당을 구입했다. 맹의와 선교사가 설립자란 일부 기록도 있다.

그러나 대송교회 김재영 장로는 “당시 괴동교회 교인들이 ‘옥석구분’의 화로 핍박을 받아 흩어졌고 교회활동은 자연히 일시 중지된 적이 있었다”며 “그래서 1907년을 괴동교회의 설립일로 보는 일부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고 추정했다.

포항지역 목회자들은 “경북교회사를 보면 박군현이 1901년 괴동교회를 설립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며 “1924년 경북교회사의 교열을 본 사람이 박문찬이다. 박문찬은 괴동교회 설립자인 박군현이가 전도한 사람이다. 1907년 괴동교회 출신의 박문찬(전 대구제일교회 담임목사·전 경북노회장) 등이 대도교회를 나와 괴동교회의 역사를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대도교회에서도 괴동교회를 분립했다는 기록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 장흥교회와 합병으로 대송교회 탄생

괴동교회는 1922년 교인들이 늘어나자 영일군 대송면 괴동 647번지 160평 부지에 60평 건평으로 교회를 신축했다.
1925년에는 송래교회(현 동부교회)를 개척했다. 거리상 불편함을 겪던 교인들에게 이 교회에 출석토록 했다.

1969년에는 포항제철 연관단지 부지조성으로 인한 철거 상황에서 놓이자 장흥교회와 합병해 대송면 제내리로 이주한 뒤 교회 이름을 대송교회로 명명하다. 대송교회는 현재까지 이곳에서 교회건물 증개축 등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 “1904년 문 연 옛 장흥교회, 전쟁 중 화재로 소실”

만주에서 활동하던 배재범, 김병진, 김상룡, 배재만, 배영생이 1904년 조선(한국)으로 들어와 포항 장총리에서 예배를 드렸다.
장흥교회는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화재로 인해 해체상황에 처했다. 30여명의 교인은 흩어졌다.

1955년 오천리에 옛 장흥교회와 별개의 장흥교회가 설립됐다.
교회 설립에는 박천석 장로와 최분향 집사, 조두리 집사, 전순이 집사, 김귀순 집사, 도두리 집사, 김정진 집사가 참여했다.
장흥교회 출신인 배두만 성도(포항제일교회)와 이원기 장로(대송교회)는 “당시 괴동교회와 합병된 장흥교회는 1904년 설립된 장흥교회와 별개”라고 증언했다.
장흥교회는 1969년 5월 괴동교회와 합병한 뒤 대송면 제내리로 이주, 대송교회로 불렸다.

이척우 전 대송교회 담임목사는 “19세기 말은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동학란이 일어나고 당파싸움이 벌어지고 친일파와 친러파로 갈라져 나라가 어지러울 때였다”며 “그 당시 박군현 씨가 일본에서 일본 젊은이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고 복음을 받아들인 뒤 1901년 귀국 후 자신의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대송교회 전신인 괴동교회의 출발이었다”고 말했다.

포항대송교회(담임목사 김대훈)는 지난 2월 17일 교회 본당에서 제자훈련 수료예배를 드리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포항대송교회(담임목사 김대훈)는 지난 2월 17일 교회 본당에서 제자훈련 수료예배를 드리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괴동교회 후신 대송교회서 인재 쏟아져 나와

괴동교회와 장흥교회가 합병한 대송교회는 1969년 대송면 제내리 313번지 150평의 부지에 34평의 교회건물과 12평의 교역자 사택을 건립, 제2의 부흥에 들어갔다.

당시 이주교인은 괴동교회 출신의 임종선 전도사, 정영출 전도사, 김작지 집사 가정, 김유생 집사 가정, 황장봉 안수집사 가정, 최영만 집사 가정, 김동균 성도 가정, 김술연 집사 가정 등과 장흥교회 출신의 조두리 집사 가정, 그의 아들 이원기씨(훗날 장로), 임신부 집사 가정, 김귀순 권사 가정, 이헌도 청년(훗날 목사), 정우영 집사 가정, 도두리 권사 가정 등이었다.

1978년 7월에는 예배당을 증축했고, 1981년 8월에는 교회 우측 부지 80평을 매입해 교육관을 준공했다.
1982년 3월에는 대송 어린이선교원을 개원했으며, 초대원장은 이기준 목사, 초대원감은 권경환 장로, 교사는 김은숙·김정심 씨가 1개 반 49명을 맡아 양육했다.
1983년 5월에는 대성전 270평 건립을 위한 1차 공사 기공예배를 드렸고, 그해 8월 교육관 조립식 건물 60평을 건립했다.
1999년 3월에는 대송교회 홈페이지를 개설했으며, 2013년 12월에는 비전센터 준공 입당 감사예배를 드렸다. 2017년 1월에는 현재의 담임 김대훈 담임목사가 부임했다.

역대 담임목회자는 김병호 목사(당시 조사), 이춘중 목사(당시 조사), 박순석 목사(당시 전도사), 최후덕 목사, 정철수 목사, 정덕수 목사, 오이식 전도사, 김상우 목사(당시 전도사), 이동환 강도사, 이영춘 목사, 최조웅 목사(당시 강도사), 임종성 목사(당시 전도사), 장은수 목사(당시 전도사), 이기준 목사, 이척우 목사, 신수일 목사, 김대훈 목사(현) 등 17명이다.

대송교회는 박문찬, 김해덕, 김재진, 김상해, 안영모, 최조웅, 김성생, 김상용, 이헌도, 김명관, 최인걸, 장태식 목사 등의 목회자를 배출했다.

특히 박군현이 처음으로 전도했던 교인 2명 중 한 명인 박문찬은 목사가 돼 대구제일교회 담임목사와 경북노회장을 지냈다.
박 목사는 대구대학교 설립의 기반을 닦았고, 그의 사위 이영식이 대구대학교를 설립했다. 그의 아들 이태영이가 총장을 지냈다.

김대훈 담임목사는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오직 예수님만 높이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이 주인이신 교회, 행복을 누리고 나눠주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포항대도교회(담임목사 임정수)는 지난달 28일 교회 본당에서 40일 전도대 예배를 드린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포항대도교회(담임목사 임정수)는 지난달 28일 교회 본당에서 40일 전도대 예배를 드린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미국 맹의와 선교사, 대도교회 설립

역시 포항대도교회 홈페이지도 포항시 60년사 등과 달리하고 있다.
대도교회 홈페이지를 보면 교회 설립일은 포항시사 등에서 기록된 1906년이 아니라 이보다 2년 빠른 1904년으로 나타났다.
미국 맹의와(McFarland, Edwin Frost) 선교사가 1904년 봄 대구 계성학교 학생전도대를 이끌고 각지로 전도하던 중 전도대원 김병호씨와 함께 대도동에서 전도를 시작했다.
맹의와 선교사의 포항 전도는 포항지역에서 외국인 전도사의 첫 전도활동으로 기록돼 있다.

이 때 정일찬, 최경진, 김란수씨가 결신했다. 열심히 전도하도록 해 수십 명의 결신자를 얻어 교회를 세웠다. 그해 5월 4일 정일찬이 영수에, 김란수가 집사에 피택됐다. 설립자는 맹의와 선교사로 기록하고 있다.

포항흥해중앙교회(담임목사 고복남)가 지난 7일 교회 본당에서 사랑장학회 장학금 전달식을 갖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포항흥해중앙교회(담임목사 고복남)가 지난 7일 교회 본당에서 사랑장학회 장학금 전달식을 갖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흥해중앙교회·흥해제일교회 전신은 옛 흥해교회”

흥해교회의 후신인 흥해중앙교회(1995년 12월 발행 90년사)와 흥해제일교회의 홈페이지는 포항시 60년사 등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흥해중앙교회와 흥해제일교회의 전신인 흥해교회는 1905년 5월 1일 설립됐다.
이춘옥, 김균옥, 김성옥(김상현) 등이 대구합동 공의회 맹의와 선교사로부터 파송 받은 이기우에게 복음을 전해 듣고 김균옥 집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이날이 1905년 5월 1일이다. 초대 교역자는 서성오 조사였다.

1908년 2월 흥해읍 약성동에 초가 3칸을 구입하고 벽을 헐어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초대 영수로 이춘옥을 선출했다. 설립자는 안의와 선교사다.
안의와 선교사는 5월 1일 흥해 교회를 설립한 뒤 그달 12일 포항제일교회를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3년 2월 교단분립(기장)으로 흥해교회에서 흥해제일교회로 분립됐고, 남아 있던 교인들은 흥해교회를 흥해중앙교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포항흥해제일교회(담임목사 정언용)는 지난 2월 10일 교회 본당에서 중고등부 찬양예배를 드리고 있다. 사진은 중고등부 합창 모습.
포항흥해제일교회(담임목사 정언용)는 지난 2월 10일 교회 본당에서 중고등부 찬양예배를 드리고 있다. 사진은 중고등부 합창 모습.

▢ 포항제일교회, 3·1운동 주도 이어 교회 개척 ‘러시’

포항제일교회 100년사도 포항시 60년사 등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포항제일교회의 전신인 포항교회의 설립일이 1908년이 아니라 1905년 5월 14일로 나타났고, 설립자도 맹이와 선교사가 아닌 안의와 선교사로 확인됐다.

안의와(James Edward Adams·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와 서성오, 김상오가 1905년 5월 14일 ‘포항교회’를 개척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1907년 제주도 전도여행을 떠나던 중 포항에 머무르던 길선주 목사와 이기풍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했다.
1911년 11월에는 영흥초등학교를 설립했으며, 1911년 3월에는 칠포교회를 개척했다. 1919년 3월 11일에는 포항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주동자 6명이 체포되어 실형을 받았다.

포항제일교회(담임목사 박영호)는 지난달 21일 교회 본당에서 부활절예배를 드렸다. 교회학교 아이들이 교회 마당에서 워십을 하고 있다.
포항제일교회(담임목사 박영호)는 지난달 21일 교회 본당에서 부활절예배를 드렸다. 교회학교 아이들이 교회 마당에서 워십을 하고 있다.

1945년 4월 용흥교회(현 늘사랑교회)를 개척했으며, 1946년 3월 북부교회(현 기쁨의교회), 1953년 1월 동부교회(현 송도교회), 6월 대련교회, 1954년 2월 장동교회(현 송동교회), 1954년 7월 죽천교회(현 그루터기교회), 1975년 3월 우각교회, 1980년 5월 구계교회, 7월 환호교회를 개척했다. 해외교회 개척도 29곳이나 된다.

안의와 선교사.
안의와 선교사.

▢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 ‘안의와 선교사’

포항시사와 지역 교회들에 따르면 1904년 봄 맹의와 선교사가 대구 계성학교 학생전도대를 이끌고 포항을 찾았으며, 1905년 안의와 선교사와 서성오, 김상오가 포항에 와서 전도했다. 이듬해인 1906년 맹의와 선교사가 다시 포항지방 담당 순회선교사로 왕래했다.
포항지역 초기 교회 설립은 안의와 선교사와 맹의와 선교사의 선교 영향이 컸다.

안의와(James Edward Adams·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는 대구·경북지역 선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안의와 선교사는 1895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해 부산선교부에서 2년간 한국어와 지방풍습을 공부하고 1897년 대구 선교부로 파송된다.

이듬해인 1898년 자신의 집에서 교회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대구제일교회의 모태가 됐다. 의사인 죤슨 선교사와 함께 제중원을 설립했다. 이 제중원이 지금의 동산병원이다. 계성중학교도 세웠다. 지금의 대구제일교회와 동산병원 부지, 계명대학교의 구 캠퍼스 모두 안의와 선교사가 선교사역 가운데 확보한 땅이다.

그는 전 재산을 복음전도기금으로 내놓았고, 1923년 대구선교부를 은퇴하기까지 40년가량 한국선교를 위해 드렸다.
그는 26세 젊은 나이에 한국에 와서 사역 중 아내 넬리 딕(43세)을 잃었지만 고통가운데에서도 조선 사랑을 이어가 주위를 감동시켰다.

그의 장남인 안두화 선교사는 계명대학교 설립자이며, 포항선린애육원 설립자 중 한 명이다.
안의와 선교사는 포항지역에서 흥해교회(흥해중앙교회·흥해제일교회의 전신)와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 방산교회(장기교회 전신) 등을 개척했다.

안의와 선교사가 설립한 경북지역 교회는 최소 26개나 됐고, 전도기금으로 본인 대신 전도인을 파송해 설립한 교회도 1930년 1월 당시 경북노회 전체 설립교회의 25%나 됐다. 이 전도기금에 의해 계속 운영된 교회는 73개나 됐다.

대구·경북 최초 교회인 대구제일교회의 설립자는 배위량 선교사(William M. Baird·베어드)와 안의와 선교사로 기록돼 있다. 대구제일교회의 설립일은 1893년이다.

▢ 맹의와 선교사, 포항 등 경북서 21개 교회 개척

맹의와(Mcfarland, Edwin Frost) 선교사는 1904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부산선교부에 도착해 2년간 어학공부를 마쳤다. 1906년 경북지방 순회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대구제일교회를 근거지로 삼아 대구를 중심으로 북쪽 지역을 책임 맡아 시무했다.

후에 그의 선교구역은 안동지방까지 확장됐으며, 1923년부터는 경북지역 선교확장을 위한 ‘아담스 선교기금’의 후원을 받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22년 부인이 귀국한 뒤 세상을 떠나자 그림스와 재혼하고 선교활동을 이어갔으나 그 역시 건강을 잃고 1928년 선교사직을 사임했다.

그는 1904년부터 1913년까지 대도동교회(현 포항대도교회), 대곡동교회(기계면), 칠포교회, 장기교회, 성법교회 등 경북지역 21개 교회를 세웠다.

성법교회 전경.
성법교회 전경.

성법교회 설립일, '1913년' 확인

앞서 언급했듯이 포항시기독사와 포항시사가 뚜렷한 차이를 보인 것은 성법교회의 설립일이다.
포항시기독교사는 성법교회의 설립일을 1903년으로 기록했으나 포항시사는 1913년으로 적었다. 설립자는 맹이와 선교사로 동일했다.

경북교회사와 구미인조사록, 기독교백과사전 5권, 내한선교사총람,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하는 맹의와 선교사가 1904년 조선에 들어와 부산 선교부에서 2년간 어학연수를 받은 뒤 1906년 경북지방 순회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대구제일교회를 근거로 삼아 선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맹이와 선교사가 1913년 성법교회를 설립했다고 적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포항시기독사에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에 오지 않았던 맹의와 선교사가 1903년 기계면 성법교회를 설립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법교회 출신 박정기 장로(포항중앙교회)는 “역사를 추적해 보면 맹이와 선교사가 1913년 성법교회를 설립한 것으로 보인다”며 “포항시기독사에 오류가 발생한 것은 1959년 9월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 ‘사하라’ 여파로 성법교회의 기록을 소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정리했다.

▢ “성경적 교회는 거룩한 자들의 모임”

이건오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 관계자는 “성경에서 보면 ‘교회는 거룩한 자들의 무리’이다.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cclesia)’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모임이다”며 “최근에 들어 교회와 예배당을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교회사는 기록과 증언이 중요하다”며 “결정적인 기록이나 증언이 나오면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2004년 포항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세계성시화운동 세계대회.
2004년 포항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세계성시화운동 세계대회.

▢ “포항엔 교회·기독대학·기독방송·기독단체·기독학생회 등 활동 왕성”

앞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포항에는 1901년 괴동교회가 설립되면서 교회중심의 신앙 활동이 전개됐다.
일제치하에서 신앙의 자유를 위협받던 기독교는 해방과 더불어 급격한 신장을 보였다. 이러한 성장의 이면에는 교세의 이견으로 인한 분파와 대립이 기독교 내부에 일어나 많은 교파와 교단이 분립됐다.

해방 이후 대한예수교 장로회는 차례로 경북노회, 경동노회, 포항노회의 관할이었으나 교파의 분열로 인해 각 교단별로 별개 노회의 관할을 받게 됐다.
이 밖에 기독교 한국침례회,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한국기독교 장로회 등이 교세를 가지고 있다. 현재 포항에서 교세가 가장 왕성한 교단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이다.

포항에는 포항시기독교교회연합회(회장 김영걸)와 포항성시화운동본부(대표본부장 조근식), 포항시기독교기관협의회(회장 김원주) 등이 조직돼 있다. 교회 수는 400여개(2010년 포항시사에 418개 교회·기도원 이름 소개)에 이르고 있다.
한동대학교(총장 장순흥)와 선린대학교(총장 김영문) 등 기독교 이념으로 설립된 대학교와 역시 같은 이념으로 설립된 포항대동고와 포항예고 등 2개 고등학교가 있다.

포항cbs, 포항극동방송, 포항cts 등 3개 기독방송과 지역 최대 병원인 포항세명기독병원 등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세운 병원들이 많다.
포항YMCA, 포항YWCA, 국제와이즈멘 포항클럽, 각종 선교단체, 기독실업인회, 직장별 기독신우회, 중·고·대학교 학교별 기독학생회 등 기독교 관련 단체들도 왕성한 활동을 펴고 있다.

▢ “한국교회, 한일합방 뒤 일제 탄압으로 수난”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개신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때는 1885년(고종 22년)경부터다.
1885년 우리나라가 구미 제국과 수교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가문호를 개방해 외국인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됐으며, 이 시기 많은 선교사들이 국내 들어와 순탄하게 선교를 했다.

1885년 미국 북장로교회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 아펜젤러가 인천에 상륙하면서부터 주로 미국계 신교의 각 교파에 속하는 많은 선교사가 국내 들어와 복음을 전했다.
교회는 정식 수교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확고한 선교정책에 따라 급속도로 빠르게 복음이 전해졌다.

1910년 한일합병 후 한국교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수난을 받기 시작했다.
일제는 신민회와 교회를 망라한 서북지방의 민족세력을 발본색원하려 했다. 1910년 11월 무관학교 설립자금이 발각된 안악사건과 관련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으로 날조, 서북지방의 기독교인들을 대거 검거했다. 이 ‘105 사건’ 등이 기독교 탄압의 첫 조짐이었다.

총독부는 1915년 사립학교 규칙을 개정해 많은 기독교계 학교의 교육을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일제의 무단통치에도 위축되지 않고 1919년 3·1운동에 대거 참여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자유·평등·정의의 성서적 이념은 후일 역사에도 교훈과 생명력을 불어 넣는 지표가 됐다.
이어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국어운동, 독립자금조달운동, 교육계몽 및 농촌운동 등을 폭 넓게 전개했다.

일제는 1935년경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써 한국 기독교에 최대의 멍에를 씌웠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 등 여러 기독교인들이 이에 항거했다. 이 같은 어려운 시대적 여건 속에서도 기독교인들은 한국의 근대화와 항일운동에 앞장서 종교적 사명을 감당해 왔다.

/김규동기자 kdkim@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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