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경북의 멋과 맛을 찾아서
추억의 음식 짜장면

소설가 성석제 씨가 자신의 글에서 언급한 경북 봉화 ‘용궁반점’의 짜장면.

이제는 잊어버린 단어가 있다. ‘청요릿[淸料理]집’ ‘유니짜장’ ‘유슬짜장’ 등이다. 이 단어를 기억한다면 50대 이상 나이다. 청요릿집은 중식당의 옛 이름. 청나라, 중국 음식을 파는 집이란 뜻이다.

유니짜장[肉泥炸醬]은 고기 혹은 고기와 채소를 잘게 다져서 고명, 양념으로 쓴다. 고기는 돼지고기다. 유슬짜장[肉絲炸醬]은 고기, 채소를 길게 썰어 실처럼 만든 후 고명으로 쓴다. 이제 청요릿집, 유니짜장, 유슬짜장은 대부분 사라졌다. 화상(華商)이 아닌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식당이 훨씬 많아졌다.

 

서울 짜장면, 한국식 짜장면
중국인들이 보기에 얼핏 보면
중국식 짜장면과 흡사한데 전혀 다르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짜장면은
중식이라기보다 한식이다

◇ 짜장면은 한식인가, 중식인가?

이제는 사라진 중식당이다. 2014년 문을 닫은 경북 경주 ‘산동반점’. 화교(華僑) 장충선 씨가 운영하던 화상노포. 장씨가 70세를 넘겼다. 나이가 들면 중식당의 웍(WOK, 중화요리용 팬)을 잡는 일이 힘들어진다. 조용히 50여 년의 역사를 접었다.

이제 따님 장수화 씨가 서울 은평구에서 중식당을 운영한다. 몇 해 전 따님을 통해 이 집안의 청요릿집 역사를 들었다. 여느 중식당 이야기와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짜장면은 한식인가, 중식인가?” 대부분 잠깐 망설이다가 “중식”이라고 답한다. 북경에는 한때 ‘한쳥짜장면[漢城炸醬, 한성작장]’이 유행한 적이 있다. 한성은 서울이다. 서울 짜장면, 한국식 짜장면이란 뜻이다. 우리가 먹는 짜장면이다. 중국인들이 보기에 얼핏 보면 중국식 짜장면과 흡사한데 전혀 다르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짜장면은 중식이라기보다 한식이다.

짜장면의 짜장[炸醬, 작장]은 “장을 터뜨리면서 볶는다”는 뜻. 장은 발효식품이다. 발효식품에는 탄산가스가 있다. 장을 볶으면 작은 기포(氣泡)들이 생긴다. 기포는 장을 볶는 과정에서 생기고, 터진다. ‘터뜨리면서 볶는다’고 표현한다. 짜장면은 ‘볶은 중국 장(醬)을 얹은 국수 요리’다.

‘중국식 장’은 첨면장(甛麵醬)이다. 첨면장은 우리의 된장과 닮았다. 콩, 혹은 콩과 밀, 콩과 다른 곡물들을 섞고 소금과 종국(種麴)을 넣어서 발효시킨다. ‘종국’은 ‘씨 누룩’ ‘누룩의 씨’다. 정제한 효모(酵母)다. 우리가 흔히 ‘춘장’이라고 부르는 ‘중국 된장’이 첨면장이다. 첨장(甛醬)이라고도 부른다.

‘첨면장’의 ‘첨(甛)’은 ‘달 감(甘)’과 ‘혀 설(舌)’이 합쳐진 글자다. 혀에 달다는 뜻이다. ‘첨(甛)’은 한편으로는 낮잠을 뜻한다. 세상에 낮잠만큼 단 것도 없다. 첨면장은 “면을 맛있게(달게) 하는 장”이다.

‘춘장’은 애매모호 하다. 첨장이 춘장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봄에 만든다고 춘장(春醬)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억지스럽다. 대부분 장이 봄에 만든다. 우리의 된장도 한겨울에 장을 담고, 봄에 장 가르기를 한다. 굳이 중국 첨면장만 봄에 만든다고 주장할 일은 아니다. 또 다른 해석도 있다. 파는 한자로 총(蔥)이다. 파를 찍어 먹는다고 ‘총장(蔥醬)’이고, 발음이 바뀌어 춘장이라 부른다는 주장이다. 정설도 다수설도 없다.

중국 짜장면은 한국인의 된장찌개 비빔밥이다. 우리가 “된장찌개를 밥에 얹은 다음 쓱 쓱 비벼 먹듯이” 중국인들은 볶은 첨면장을 국수에 얹어서 비벼 먹는다.

문을 닫은 전북 익산 ‘국빈반점’의 물짜장.
문을 닫은 전북 익산 ‘국빈반점’의 물짜장.

◇ 이제 원형 첨면장은 사라졌다

흔히, “인천 ‘공화춘’에서 짜장면이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는 않다. 인천시도 이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공화춘’은 ‘짜장면을 메뉴로 내놓았던 집 중 하나’다. 짜장면을 처음 들여온 것도 아니고, 처음 메뉴로 내놓았던 것도 아니다. 중국 짜장면의 역사는 수천 년을 헤아린다.

‘공화춘(共和春)’은 ‘공화국의 봄’이다. 공화국은 1911년 건국한 중화민국, 현재의 타이완이다.

젊은 화상 우희광(于希光, 1886~1949년)은 ‘산동회관’을 경영하다가, 중화민국 건국과 더불어 이름을 ‘공화춘’으로 바꿨다. 1912년 무렵이다. 후손들이 운영하던 ‘공화춘’은 1983년 폐업했다. 현재의 ‘공화춘’은 원래 ‘공화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름만 남았고, 국내 대기업이 상표권을 가지고 있다.

짜장면 마니아들은 인근의 ‘신승반점’을 ‘짜장면 원조집’으로 여긴다. ‘신승반점’의 주인 왕애주 씨는 우희광 씨의 외손녀다. 우희광 씨는 1남 5녀를 두었고 그중 막내딸 우란영 씨가 화교 왕입영 씨와 결혼, 1남 2녀를 낳았다. 그중 맏딸이 왕애주 씨. 왕입영·우란영 부부는 ‘공화춘’에서 일하다가, 1980년 독립, ‘신승반점’을 열었다.

짜장면은 중국 서민들의 일상적인 음식이다. 제대로 형식을 차린 음식도 아니고 길거리 손수레, 작은 가게에서 내놓던 서민 음식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청나라 병사들이 한반도로 몰려들었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했다. 한반도와 가까운 중국 산둥[山東]성에서 중국인이 한반도로 들어왔다. 1894년 청일전쟁. 청나라 병사들이 들어왔고 민간인들도 따라왔다. 대부분 산둥성과 가까운 인천을 통해 들어왔고 그중 일부가 한반도에 정착했다.

1930년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한반도로 연결되는 중국 만주지역은 일본군인 천지였다. 인천-산둥반도의 뱃길이 편했다. 인천이 중국인들 조차지가 되고 인천에서 중식이 시작된 까닭이다.

부두 노동자들, 서민 화교들은 길거리 수레, 작은 구멍가게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일제강점기, 인천에는 ‘중화루’ 등 ‘5대 청요릿집’이 있었고 그중 하나가 ‘산동반점, 공화춘’이었다. 길거리 음식이 ‘공화춘’ 등 정식 가게로 들어왔다.

일제강점기에 개항한 군산 언저리로 중국인들은 모여들었다. 한 사람이 건너와서 자리를 잡는다. 가족들이 통째로 들어온다. 친척, 지인도 불러들인다. 한국에 사는 화교, 한화(韓華)사회는 이렇게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한반도 여기저기로 옮겼다. 강원도 깊은 산골 탄광촌에도 50년을 넘긴 화상노포가 남은 이유다.

경주에서 ‘산동반점’을 하던 장충선 씨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 1940년대 언저리 한반도로 건너왔다. 대구에 중식당을 운영하는 형이 있었다. 형네 가게에서 중식 만드는 일을 돕다가 경주로 간다. “밀가루 부댓자루를 메고 대구에서 경주까지 걸어 갔다”. 아들 장충선 씨는 1938년생. 열 살 때까지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하고 중국에서 살았다. 한국전쟁 직전 장충선 씨는 아버지가 사는 한반도로 건너온다. 1960년대, 장충선 씨 부자는 경주에서 ‘산동반점’의 문을 열었다.

‘마마수교자’의 짜장면. 주인 장수화 씨의 아버지 장충선 씨는 1960년대 경주에서 ‘산동반점’을 열었다.
‘마마수교자’의 짜장면. 주인 장수화 씨의 아버지 장충선 씨는 1960년대 경주에서 ‘산동반점’을 열었다.

◇ ‘미공법 480조’가 짜장면의 역사를 바꾸다

짜장면 역사를 바꾼 것은 미국 법령 ‘미공법 480조(Public Law 480)’다. 한국전쟁이 끝났을 무렵, 미국은 밀을 대규모 잉여생산한다. 남아도는 밀을 일본, 한국 등에 거의 무상으로 원조한다.

귀하던 밀가루가 흔해졌다. 주재료인 밀가루가 흔해지니 중식당은 호경기를 만났다. 미공법 480조에 의한 원조는 1965년까지 진행되었고, 그 이후에도 밀가루 값은 쉬 오르지 않았다. 짜장면 전성시대. 이 시기, 짜장면은 중식에서 한식으로 변화한다.

1960년 언저리 오늘날의 춘장, ‘한국식 첨면장’이 개발된다. 콩, 곡물가루, 물, 소금으로 만들던 천연식품 첨면장은 수급이 불안정했다. 중식당 주변의 화교 가정이 ‘수제 첨면장’을 만들었다. 화교 상인은 이 첨면장을 모아서 식당으로 배달했다. 문제는 공급 물량 부족. 수요는 늘어나는데 수제 첨면장은 부족하다.

공장에서 첨면장을 만들기로 한다. 콩, 밀가루 등을 비빈 후, 짧은 시간 발효시킨다. 오래 묵은 첨면장은 색깔이 검다. 짧은 시간 발효시키면 색깔은 누렇거나 붉은색이다. 황장(黃醬)이다. 1년 묵은 첨면장도 붉은 색깔이다. 식당 주인들은 오래 묵은, 검은색의 첨면장을 원한다. 캐러멜색소를 넣는 이유다. 원형 캐러멜색소는 설탕을 태운 것. 달고 윤기가 난다. 여기에 조미료를 넣는다.

2년 묵은 첨면장. 첨면장은 매일 뒤집고 저어서 공기 노출을 해야 맛이 좋아진다.
2년 묵은 첨면장. 첨면장은 매일 뒤집고 저어서 공기 노출을 해야 맛이 좋아진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인들이 중식당 조리사, 혹은 주인이 된다. 화상들은 대부분 은퇴한다. 경주 ‘산동반점’ 장충선 씨도 마찬가지. 1960년대, 20대의 나이로 아버지와 식당을 열었던 그는 이제 일흔이 됐다. 은퇴한 이유다.

많은 화상노포가 문을 닫는다. 첨면장은 화상노포들과 더불어 사라진다. 전북 익산의 ‘국빈반점’도 문을 닫았다. 주인 유비홍 씨는 화교 2세. 아버지는 금강 유역으로 한반도에 들어왔고, 한국에서 태어난 아들 유비홍 씨는 1960년대 아버지 가게였던 ‘국빈반점’을 물려받았다.

‘원형 작장면’은 장을 볶아야 한다. 웍으로 장을 볶는 일이 힘드니 물과 전분을 넣고 걸쭉하게 끓인다. 여기에 당근, 양파, 감자 등을 넣는다. 한국식 짜장면, ‘한쳥짜장미엔’이다.

누구나 자기만의 ‘짜장면 맛집’을 지니고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 손 잡고 갔던 청요릿집 혹은 중식당이다. ‘추억’을 이기는 ‘맛’은 없다. 추억 속의 음식은 늘 최고의 음식이다. 짜장면 맛집의 순위를 따지기 힘든 이유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