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무등산 자락에 자리한 작은 원룸에 둥지를 튼 지 어느덧 두 달. 경북대와 전남대 교환교수제에 따라 광주에서 1년을 보내기로 한 때문이다. 광주와 대구의 거점 국립대학으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전남대와 경북대. 그동안 학생교류는 지속적(持續的)으로 진행됐으나, 교수교류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경북대와 전남대 양교 총장이 교환교수제에 합의함으로써 실질적인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나는 거기에 첫 번째로 동승(同乘)한 셈이다.

예전에 민교협 회의나 국교련 회의차 광주에 들른 적은 있지만, 장기체류는 이번이 처음이다. 관찰자나 관광객이 아니라, 거주민의 한 사람으로 광주를 살펴봄은 초로(初老)의 인생살이에 하나의 전환점이 되리라 희망한다. 역마살 탓인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나라 곳곳을 떠돌며 지난 20년을 살아왔다. 자동차로 획득한 이동의 자유와 떠돌고자 하는 욕망에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닌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사계절 정착민으로 광주에 머물고 있다.

대구나 광주, 어딜 가나 눈에 밟히는 것은 시장이며 노점상이다. 거주지 부근에 있는 말바우 시장은 2, 4, 7, 9일이 장날이다. 열흘 가운데 나흘이 장날인 셈이다. 그때마다 길거리에 영감과 노파들이 노점(露店)을 펼치고 줄지어 앉아들 있다. 쑥과 냉이, 달래에서부터 양배추와 대파, 각종 한약재 등속을 펼쳐놓고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얼마 전에는 홍어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양동시장에도 들렀다. 노점은 거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대구의 크고 작은 재래시장이 떠올랐다. 그곳에 터를 잡은 숱한 노점상들의 모습과 매무새가 새삼스레 기억되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도처(到處)에 깔린 24시간 편의점과 각종 마트와 슈퍼마켓, 소규모 점방과 대규모 할인매장들이 두 도시의 닮은꼴을 형성한다. 간간이 들려오는 누추하고 낡은 트럭의 녹음방송이 광주와 대구의 친연성을 강조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렇게 고단한 나날을 영위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상념이 찾아든다.

거리거리에서 폐지를 실은 손수레를 끌고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노인들의 행장(行狀)도 광주나 대구나 매한가지다. 빈자는 어디에도 있고, 그들의 팍팍한 삶은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하되 대구와 광주는 확연히 다르다. “기억하고 행동할게요” 현수막이 내걸린 문흥초등학교 정문. 4·16 세월호 대참사 5주기를 추념(追念)하는 노란 현수막. 유민 아빠 김영오 씨가 광주에 정착한 데는 까닭이 있다.

‘무등 공부방’에서 열린 김용운 선생 초청강연 진행자는 대구의 성리학과 광주의 실학을 대비하여 말한다. 과거를 투영하는데 거금을 들이는 대구와 소액을 미래에 투자하는 광주의 차이를 지적하는 것이다. 영광스러운 조선의 성리학과 빛나는 과거와 벼슬자리와 가문을 추억하는 대구와 실패한 조선의 성리학과 민초들의 신산(辛酸)한 삶과 미래를 떠올리는 광주. 아마도 그런 차이가 5.18 민중항쟁의 광주와 간첩과 폭도 운운하는 대구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지난주에 문을 연 산수동의 인문연구원 ‘동고송(冬孤松)’ 창립대회는 은성(殷盛)했다. 한겨레신문 곽병찬 대기자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출판기념회를 겸한 개원식에 60명도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여 가난한 지역 문사들의 후원을 자처한다. 1980년대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폭력적인 군부정권 아래서 12년 도피 생활을 했다던 황광우 소설가가 잠시 운을 뗀 지난날의 회억(回憶)은 참으로 따스하고 인간적인 것이었다.

대구에서 광주로 올 때 어떤 분들은 대구에 없는 ‘무등 공부방’을 아쉬워했다. 반면에 대구에는 ‘지식과 세상’이나 ‘대경인문학협동조합’ 그리고 ‘가락 스튜디오’같은 곳이 있다. 그런 단체와 기관이 서로 어울려 소통하고 연대하면서 화합과 상생, 과거와 미래를 터놓고 논하는 자리를 만들어가는 것도 뜻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4월 하순의 상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