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갈비. 최근에 시작된 ‘왕갈비 구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Qing invasion of Joseon)은 1636년 12월28일(양력)부터 1637년 2월24일 사이에 있었다. 두 달간의 짧은 전쟁. 상처는 깊었다. ‘삼전도의 굴욕’을 넘어서는 참혹한 피해. 멀쩡한 조선사람 50만 명(추정)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대부분 노예로 팔리고, 평생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불과 예닐곱 달 후, 원수의 청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했던 국왕 인조다. 청나라 사신에게 잘 대할 수도, 소홀할 수도 없는 처지. 돼지고기 이야기가 나온다. ‘승정원일기’ 인조 15년(1637년) 8월28일(음력), 영접도감(迎接都監)의 대답이다. 그 전날인 8월27일, 인조가 “왜 돼지고기(저육) 대신 쇠고기(우육)를 마련했느냐?”고 물었다.

 

돼지는, 인간이 먹다남긴 음식 찌꺼기를 먹고 자란다.

인간이굶주리면 돼지사육은불가능하다.

‘음식디미방’에 돼지고기가귀한 이유다.

“(전략) 청나라 사람들이 우육(牛肉) 먹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이번 칙사의 행차가 추운 계절을 당하였으므로 생선 따위의 물종을 구해 올 길이 없습니다. 매일 연향(宴享)에 저육(猪肉)을 쓰는 곳이 매우 많아 부족할까 걱정되어 전날 반선에 우육을 마련하였는데 저육 두 근이 너무 소략한 것 같아서 우육을 한 근 더 마련한 것입니다. 이렇게 마련하고 나서 때가 되어 혹 저육을 먹자고 청하거든 저육으로 바꾸어 주겠습니다. (후략)”

승자의 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소홀할 수도 없다. 사신을 잘 대접하는 흉내라도 내야 한다.

이유원의 ‘임하필기 춘명일사’에 실린 순조와 돼지고기 이야기.
이유원의 ‘임하필기 춘명일사’에 실린 순조와 돼지고기 이야기.

청나라, 중국 사람들이 쇠고기를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궁중에서 의논하는 내용이 쇠고기 한 근, 돼지고기 두 근, 이런 식이다. 이날의 서글픈 대화 끝에는 인조의 최종적인 평가가 남아 있다.

“이러한 때에 기르는 소를 허다하게 도살하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고, 음식물을 더 주는 것도 타당하지 못한 듯하다. 한결같이 예전 사신을 대했던 대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쇠고기는 예나 지금이나 귀했다. 농사의 도구이니 국가에서도 함부로 도축하는 일을 막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투정을 부리는 인조의 모습이 슬프다.

돼지고기 수육. 조선시대엔 돼지고기를 주로 수육이나 국으로 먹었다.
돼지고기 수육. 조선시대엔 돼지고기를 주로 수육이나 국으로 먹었다.

◇ ‘음식디미방’의 야제육과 가제육

‘음식디미방’은 1670년 무렵 출간되었다. 이 책에 여러 요리법이 있다. 그중 돼지고기 요리법은 단 두 꼭지. 야제육[野猪肉]과 가제육[家猪肉] 요리법 즉, 멧돼지 요리법과 집돼지(사육 돼지) 요리법이다. 개고기[狗肉] 요리법이 11가지나 있는 것에 비하면 돼지고기 요리법은 초라하다. 인조가 청나라 사신을 맞았던 시기에서 겨우 30년이 지났다. 왕실이나 반가 모두 돼지를 널리 사용하지 않았다.

돼지는 17세기 후반부터 비교적 널리 나타나고, 사용된다. 15세기 중반, 세종대왕 때에도 돼지 기르는 법을 명나라에서 배웠다고 했다. 문종, 세조 때도 여전히 돼지사육법은 거칠다. 그로부터 불과 200년 후. 돼지가 흔해지고 친근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추정이다. 지구 전체가 겪었던 ‘소 빙하기(Little Ice Age·小氷河期)’ 탓이다. 지역마다 다르지만, 지구는 대부분 13~17세기 후반, 빙하기를 겪는다. 한반도는 고려 말기부터 조선 숙종 시대까지다.

돼지 불고기를 먹은 역사도 길지 않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시작된 음식.
돼지 불고기를 먹은 역사도 길지 않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시작된 음식.

빙하기에는 지구 전체의 기온이 떨어진다. 가뭄, 홍수, 장마, 한파, 한여름의 우박, 이상한 달무리 등이 지구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조선의 17세기, 100년도 바로 대기근(大饑饉)의 시기다. 경신대기근에 인구의 10%인 100만 명이 기아 혹은 역병으로 죽었다. 오죽했으면 임진왜란을 겪은 사람 중에는 “기근이 왜란보다 더 무섭다”라는 이도 있었다.

‘병정대기근(인조 4~5년, 1626~1627년)’ ‘계갑대기근(효종 4~5년, 1653~1654년)’ ‘경자-신축년의 대기근(현종 1~2년, 1660~1661년)’ ‘경신대기근(현종 11~12년, 1670~1671년)’ ‘을병대기근(숙종 21~22년, 1695~1696년)’이 줄을 이었다. 모두 17세기에 몰려 있다. 이중 ‘경신대기근’과 ‘을병대기근’이 특히 참혹했다.

17세기를 지나면서 곡물 생산이 늘어난다. 돼지사육도 비교적 편해졌을 것이다. 숙종-경종-영조-정조의 시대는 18세기다. 빙하기도 끝나고 생산성이 올라간다. 100년을 넘기면서 병자호란의 상처도 얼마쯤 아문다.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은 정유재란 이듬해인 1598년에 태어나서 1680년에 죽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에 태어나서 정유재란(1597년),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의 고통과 생채기를 모두 겪었다. ‘음식디미방’을 저술할 무렵인 1670년대는 경신대기근이 진행되었다. 돼지는, 인간이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를 먹고 자란다. 인간이 굶주리면 돼지사육은 불가능하다. ‘음식디미방’에 돼지고기가 귀한 이유다.

국산 생햄. 돼지 뒷다리로 만든다.
국산 생햄. 돼지 뒷다리로 만든다.

◇ 순조의 달구경과 숨겨둔 돼지고기

순조. 아버지 정조(1752~1800년)가 일찍 서거하지 않았다면, 이복형 문효세자(1782~1786년)가 어린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국왕으로 등극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정조는 마흔아홉 살에, 이복형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순조는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국왕이 되었다. 증조모인 정순왕후가 살아 있었다. 수렴청정. 열한 살짜리 국왕은 할 일이 없었다. 즉위 원년의 어느 늦은 밤, 어린 국왕은 궁궐 안에서 달구경을 나선다.

고종 시절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1814~1888년)의 ‘임하필기_춘명일사(林下筆記_春明逸史)’ 편에 실린 이야기다.

순묘(純廟)가 초년에 한가로운 밤이면 매번 군직(軍職)과 선전관(宣傳官)들을 불러 함께 달을 감상하곤 하셨다. 어느 날 밤 군직에게 명하여 문틈으로 면(麵)을 사 오게 하며 이르기를, “너희들과 함께 냉면을 먹고 싶다.” 하셨다. 한 사람이 스스로 돼지고기를 사 가지고 왔으므로 상(上)이 어디에 쓰려고 샀느냐고 묻자, 냉면에 넣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는데, 상은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셨다. 냉면을 나누어 줄 때 돼지고기를 산 자만은 제쳐 두고 주지 않으며 이르기를, “그는 따로 먹을 물건이 있을 것이다.” 하셨다. (후략)

‘순묘’는 순조다. 늦은 밤, 배가 출출하다. 궁궐 밖에서 냉면을 테이크아웃 하기로 한다. 냉면을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돼지고기를 사 온다. 아마도 수육[熟肉]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순조의 냉면과 돼지고기 이야기’다.

이유원은 어린 시절 들은 순조의 돼지고기 이야기를 그대로 옮겼을 것이다. 국왕 곁에 시립한 이가 돼지고기 수육을 사 왔다. 원문에도 ‘貿猪肉(무저육)’이라고 했다. 늦은 밤에도 돼지고기를 살 수 있었다. 돼지고기가 어느 정도 일상적인 식재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왕 순조도 역시 준비한 음식이 수육임을 알고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상적이었다는 뜻이다.

정조대왕 시절, 이덕무, 박제가, 서이수 등과 함께 ‘4검서(檢書)’라고 불렸던 영재 유득공(1748~1807년)도 ‘영재집_서경잡절(泠齋集_西京雜絶)’에서 “냉면과 찐 돼지고깃값이 오른다(冷麪蒸豚價始騰·냉면증돈가시등)”라고 했다. 서경은 평양이다. 18세기 후반에는 평양에서도 돼지고기를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살 수 있었다. 순조의 초년과 영재의 말년은 비슷한 시기다. 대도시 평양과 한양에 모두 돼지고기가 비교적 흔했다. 문제는, 엉뚱하게도, 돼지의 ‘정체성’이다.

‘규합총서’는 1809년(순조 9년)에 발간된 책이다. 필자는 빙허각 이씨(1759~1824년). ‘임원십육지’를 쓴 실학자 서유구의 형수다. 순조 초년과 닿아 있고, 영재 유득공의 ‘서경잡절’과도 비슷한 시기다. 이 책에서는 돼지고기를 지극히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돼지고기는 본디 힘줄이 없으니 몹시 차고, 풍병을 일으키며 회충의 해를 끼치니, 풍병이 있는 사람과 어린아이는 많이 먹으면 못 쓴다”라고 했다.

비슷한 시기인데 왜 순조, 영재 유득공, 빙허각 이씨의 돼지고기에 대한 인식이 다를까?

구이용 돼지 생고기.
구이용 돼지 생고기.

이유는, 돼지의 ‘정체성’의 문제다. 돼지의 뜻을 지닌 한자는 여러 종류다. 저(猪), 저(豬), 돈(豚), 시(豕), 해(亥) 등이다.

야생의 멧돼지가 있다. 야생의 멧돼지를 포획하여 집에서 기른 돼지가 있다.

흔히 ‘가저(家猪)’라고 표현한다. ‘저(猪)’를 멧돼지로도 표기한다. 품종개량이 없었던 시절이다. 멧돼지를 포획하여 집에서 기른 후, 그 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집에서 기른 돼지’가 된다. 그렇다고 돼지의 DNA가 달라질 리는 없다. 여전히 야생의 성질이 남아 있다. 이 모든 돼지에 대한 구분이 정확하지 않다. 비슷한 시대지만, 영재 유득공, 순조, 빙허각 이씨의 돼지, 돼지고기에 대한 인식이 다른 이유다. 어떤 돼지인지 알 수 없다. 뒤섞여 있다.

실험(?) 삼아 돼지를 길러본 적이 있다. 흑돼지 새끼를 분양받아 쌀뜨물과 음식물 찌꺼기만 먹이고 11개월을 길렀다. 60㎏을 넘기지 않았다. 지금 도축하는 돼지는 120~125㎏이다. 두 배 이상이다. 종자, 사육법, 먹이가 모두 다르다. 돼지고기 이야기는, 그래서, 조심스럽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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