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주는 사람들(2)
포항선린애육원을 찾아

선린애육원 직원들 회의모습.
선린애육원 직원들 회의모습.(가운데 박문하 이사장, 오른쪽 박정민 원장)

□ 1천여명 배출… 각 분야서 맹활약 

포항선린애육원(이사장 박문하, 원장 박정민)이 3월 현재 개원 67주년을 맞았다.

선린애육원은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3월 설립한 이래 부모를 잃은 큰 아픔을 지닌 아이들과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가정 내에서 보호가 어려운 아이들에게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부모로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왔다.

이 기간 1천여 명의 아이들이 목사, 교사, 경찰, 간호사, 피아니스트, 기업체 사장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 활동하고 있다. 몇 년 전에는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도 있다.  

29일 오후 10시30분 포항선린애육원을 찾았다. 선린애육원은 환호여자중학교와 항구초등학교 인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선린애육원 진입로에 들어서자 왕벚나무 꽃과 개나리꽃이 만개,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진입로 옹벽에 그려진 바다, 게, 하늘, 잠자리, 개구리, 꽃, 시계, 버스 등의 재밌는 벽화는 한층 평안함을 줬다. 자그마한 동산에 오르니 선린애육원, 선린아동복지관, 농구장, 축구장, 자립생활관과 인근의 환호여중, 항구초등학교, 포스코, 영일만이 한눈에 들어왔다. 선린애육원과 주변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아름다웠다.  

걸어서 출근하던 60대 여성 자원봉사자는 “1988년 1월 대신동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란 욥기 8장7절이 이뤄졌음을 알게 한다”고 말했다.

 

선린애육원 전경.
선린애육원 전경.

□ 선린꿈터․선린동산․선린나래도 운영

선린애육원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박정민 원장이 취재팀을 반겨 맞았다. 박 원장의 안내로 선린복지재단시설을 둘러봤다. 포항선린복지재단(선린애육원)은 선린애육원과 지역아동센터 ‘선린꿈터’, 장애인주간보호시설 ‘선린동산’, 학대피해아동쉼터 ‘선린나래’를 운영하고 있었다. 

선린애육원에는 선린애육원 출신의 박정민 원장, 정진동 사무국장, 한은진 행정부장(18년 근무), 김영분 부장(32년 근무) 등 31명이 자립전담요원, 생활복지사, 상담지도원, 간호사, 영양사, 임상심리상담원, 생활지도원, 사무원, 조리원 등으로 80명의 아이을 양육하고 있었다. 

 

□ 유아부터 대학생까지 80명 생활

80명의 아이는 유아 10%, 초등생 30%, 중고생 50%, 대학생 10%로 이뤄져 있다고 했다. 입소는 0세부터 만 18세까지라고 했다. 그러나 포스코와 공동모금회가 2010년 퇴소 이후 마땅히 갈데없는 아이들을 위해 1억5천만 원을 들려 선린애육원 건물 옆에 2층 규모의 자립생활관을 지어줘 남학생 5명, 여학생 3명 등 8명의 대학생이 생활하고 있다고 들려줬다.  

선린애육원 직원들이 29일 애육원 앞마당에서 왕벚나무 꽃을 배경 삼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선린애육원 직원들이 29일 애육원 앞마당에서 왕벚나무 꽃을 배경 삼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가정집 같은 시설에 축구장까지… “작은 학교 같아”

선린애육원 1층에는 아동숙소인 화랑의집과 예지(예수님의 지혜)의집, 컴퓨터실, 멀티룸, 사무실, 응접실, 원장실, 자원봉사자실, 회의실로 꾸며져 있었다.

가정집 모양의 화랑의집에서는 교사와 자원봉사자가 첫돌을 맞은 아이에게 간식을 먹이고 있었고 3명의 영유아는 평온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2층에는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숙소인 하율(하나님의 율법)의집, 하음(하나님의 음성)의집, 하닮(하나님을 닮은)의집, 하일의집과 도서실, TV시청이 가능한 거실, 교사 집무실인 도담방이 있었다. 집집마다 사워실과 화장실이 잘 갖춰져 있었다.  

3층에는 여학생들의 숙소인 예찬(예수님 찬양)의집, 예품(예수님 품격)의집, 독서실, 컴퓨터실, 1~3학습실, 게스트룸, 피복창고 등이 들어서 있었다. 

지하에는 주방, 식당, 직원쉼터, 양호실, 유아놀이방, 연주실, 세탁실, 미술심리치료실, 상담실 등을 갖추고 있었다. 
 

□ “이젠 보일러 가동에 연탄 갈지 않아도 되죠”

경력 32년의 김영분 교사(부장)는 “신물 나게 빨았던 미군 군용 담요도 어느새 솜이불로 바뀌었고, 매일 갈았던 연탄도 보일러 가동으로 갈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을 맛보고 있다”며 “누군가 먼저 운동화를 신고 가는 바람에 여자아이 운동화를 구겨 신고 수학여행을 다녀온 아이가 어느새 성인이 되어 든든한 후원을 하고 있다”고 감격했다.

김 교사는 이어 “44번째 가출한 아이가 교사들의 사랑에 힘입어 태권도선수로 활약했고, 고교 졸업 땐 학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돼 상을 받았다”며 “그때 교사들이 대견스런 아이를 보다 너무 기쁜 나머지 많이 울었다”고 회고했다. 
 

□ “조금만 공부하면 국가장학금 받아 대학 진학”

교사들은 “옛적에는 드럼 한 대와 기타 한 대만 있어도 행복하던 아이들에게 지금은 바이올린, 첼로, 트럼펫, 플롯을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해 오케스트라가 생겼다. 선배들이 구구단을 지도하고 숙제를 지도해주던 옛날과는 다르게 과외 지도도 받도록 뒷받침해주고 있다. 조금만 공부하면 국가장학금을 받아 대학도 갈 수 있는 환경이 됐다”고 했다. 

교사들은 “서울 여행만 해도 행복해 하던 우리 아이들이 이제 태국으로, 필리핀으로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배냇저고리에 싸여 우리 곁으로 왔던 아이가 자라 초등학생 6학년이 되어 ‘이모 힘들면 제 어깨에 기대세요’한다. 이 한마디가 부족한 저희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며 행복해 했다.
 

정부에서 최초로 건립한 아동복지관 전경.
정부에서 최초로 건립한 아동복지관 전경.

□ 국가 최초 건립 아동복지관 의미 더해

선린애육원과 인접한 선린아동복지관을 찾았다. 선린아동복지관은 정부가 2004년 3월 13억7천여만 원을 들려 건립했다. 국내 국비 1호 아동복지관이라고 했다.

3층 규모의 선린아동복지관에는 지역아동센터 ‘선린꿈터’와 장애인주간보호시설 ‘선린동산’, 학대피해아동쉼터 ‘선린나래’가 입주해 있었다.

1층은 선린꿈터(센터장 남정임)와 사무실, 삼성화재 드림놀이터 등으로 꾸며져 있었다. 선린꿈터는 2011년 12월 포항시로부터 지역아동센터로 인가 받아 문을 열었다고 한다.

권윤경 사회복지사가 초등학교 1~3학년 20명을 지도하고 있었다. 방과 후 지역 내 부모에 의한 보호와 양육이 적절히 이뤄지기 어려운 아동들을 대상으로 숙제학습과 교과학습, 전통놀이를 지원한다고 했다. 또 숲캠프와 역사탐험연극관람, 인라인스케이트 타기, 세계사 퀴즈대회, 체육대회, 종이접기 등도 진행된다고 했다.
 

□ “몸은 힘들어도 자라는 아이들 보면 피로 잊어”

권윤경 사회복지사는 “몸은 힘들어도 성장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 밀려오는 뿌듯함에 피로를 잊게 된다”고 했다. 

옆에는 아이들과미래재단이 지난해 9월 ‘삼성화재 드림놀이터 27호’로 개관한 놀이터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민 원장은 “이 놀이터는 아이들로부터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다”고 귀띔했다. 

2층에는 선린동산(원장 김은희)와 선린나래(원장 홍경애), 사무실, 도서실, 실습실, 예체능실, 상담실, 의무실 등이 들어서 있었다. 선린동산은 2014년 8월 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원장과 사회재활교사 등 5명이 15명의 아이들을 지도한다고 했다.
 

놀이방.
놀이방.

□ “경주 첨성대 등 체험활동 큰 인기”

김은희 원장은 “장애인들이 가정에서 느낄 수 있는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복지서비스를 제공, 연고자들이 사회적, 경제적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했다. 또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장애인의 개인관리능력 및 사회적응력을 향상시켜 향후 사회구성원으로 참여 또는 복귀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돕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 아쿠아리움 체험과 경주 첨성대 체험, 경주 보문단지 단풍놀이, 외식체험, 볼링장 이용하기, 경주 양동마을 체험, 영덕 풍력발전소 체험, 경북 수목원 체험, 블루벨리농장 체험, 전통음식 만들기 체험에 이어 택견 수업, 성탄파티 등은 큰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선린나래(원장 홍경애)는 지난해 5월 오픈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원장과 직원 5명이 학대피해 받은 아동들을 일시적인 기간 동안 격리․보호하고 있다고 한다.홍경애 원장은 “입소 기간 동안 아이들이 가정과 같은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숙식, 치료, 보호, 양육, 자립 등 다양한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받아 치유, 회복을 통해 밝고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3층에는 강당, 노래방이 있었다. 강당은 내외부 공연이 이어지고 성탄절에는 성탄발표회가 진행된다고 했다.또 포항시립합창단이 해마다 1월 이곳을 시작으로 ‘찾아가는 사랑의 음악회’를 이어간다고 했다.
 

아이들의 사물함.
아이들의 사물함.

□ 네일아트반 등 동아리활동 왕성

강당 앞 벽에는 사진으로 보는 선린꿈쟁이들의 네일아트반, 홀로어르신 찾아뵙기반, 독서토론반, 성경쓰기반, 수화찬양반, 영화토론반, 음식만들기반, 텃밭가꾸기반 등 동아리활동과 여행, 도움을 주신 기관, 단체, 개인의 사진이 부착돼 있었다.

박정민 원장은 “선린애육원생들로 구성된 ‘경북천사오케스트라’의 활동은 2016년 10월부터 이어지고 있다”며 “예천군 송라면 실버힐하우스, 구룡포 석병 양로원, 경주 예티쉽터 등 인근 지역의 기관을 찾아 공연을 했다”고 소개했다.
 

□ 농구장․축구장선 경기 즐기며 우정 쌓아

선린아동복지관 앞에는 농구장이 조성돼 있었고, 선린애육원 아래에는 축구장이 조성돼 있었다. 아이들은 주말과 휴일 이곳에서 농구와 축구시합을 하며 우정을 쌓고 체력을 증진하고 있다고 했다.

축구장은 포스코케미칼(옛 포스코캠텍)이 1억 원을 들려 건립했다며 고마워했다. 축구장은 야간경기를 할 수 있는 조명등까지 설치돼 있었다.
 

□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자원봉사자와 후원자들

후원도 이어지고 있다. 포스코와 포스코건설, 포스코케미칼, 포스코에너지, 대구은행, 국민은행, 한국선급 등 8개 업체가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또 20여개 봉사단체 및 개인, 자원봉사자 100여명이 시설정비, 주방봉사, 학습지도, 특기지도, 레크리에이션 봉사, 체험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국회의원, 경북도지사, 경북도교육감, 대구고법원장, 포항시장, 포항시의회 의장, 대구지검 포항지청장, 해양경찰서장, 국가인권위원장, 포항시청 새살림회, 해병대, 성철수씨, 포항시립합창단, 늘사랑교회 여전도회, 그리메, 새침봉사단, 롯데마트, 적십자 하나로봉사단, 라면천국, 박성도씨, 포항세관, 포항해운조합, 포엔시, SBI저축은행, 포스코에너지, 산업인력공단, 성광, 현대해상, 스톨베르그&삼일, 김선애 씨, 포스코휴먼스, 꽃마름샤브샤브뷔페, 두호남부초등학교, 두호의용소방대, 시크릿봉사단, 선린대학교, 권남순씨, 이비덴, 한동대 법률대학원, 해양과학고, 로봇융합연구원, 연예인협회가 위문공연, 환경정화, 생활용품지원, 아동놀이지원 등을 했다.

또 국제라이온스협회 포항제일라이온스, 포항시 북구 환여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포항시 유도유단자회, 포항교육지원청, 포항시립예술단, 두호동 하얀e치과, 포항시 북구보건소, 포항스틸러스, 롯데백화점 포항점, 선린대학교, 포항대학교, 포항시시설관리공단, TBN 경북교통방송, 포항수협, 포스코 외주파트너사협회, 경북 포항빙상클럽,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포항지역 3개 지회, 포항시 북구 환여동 청년회, 포항북부경찰서, 포항성시화운동본부 등도 생활용품, 환경정화 등을 지원했다.

박정민 원장은 “포항선린복지재단이 긴 세월 동안 경북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지평을 넓혀온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재단 설립에 도움은 준 미국 선교사들, 미 해병대, 역대 이사장과 이사, 원장, 교사들은 물론이거니와 후원자들의 사랑과 희생과 헌신과 눈물과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감사했다.

□ “절대 포기마라. 언젠가는 일어설 것”

1천여 명의 포항선린애육원 출신 중에는 목사와 교사, 경찰, 기업체 사장, 농부 등 다양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선린애육원을 고향이자, 본적지로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다.

이태수 목사(온누리교회 담임)는 “6살 때 어머니와 헤어진 뒤 남의 집을 전전긍긍하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많은 사람들의 신세를 졌다. 누군가가 나를 선린애육원까지 데려다 줬다.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참 감사하다”며 “선린애육원에서  학업을 마치고 목사가까지 됐다”고 회고했다.

이 목사는 이어 “후배들에게 꼭 한 마디 들려주고 싶다”며 “내가 나를 포기하면 이미 내 인생은 끝난다.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일어서라. 맞아도, 굶어도, 아파도, 싫어도, 미워도, 죽고 싶어도, 넉넉해도, 실패해도, 헤어져도, 안 보여도, 절대로 자기를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도와주신다. 언젠가는 일어서게 하신다”고 조언했다.  

김두호 전 포항대동고 교사(미술)는 “이명석 원장님, 정진율 원장님, 서두표 원장님, 김동원 원장님 등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포항중, 포항고, 서울 서라벌 예술대학을 졸업한 뒤 죽장중에 이어 대동중학교에서 정년을 무사히 마쳤다”고 감사했다.

김 전 교사는 그런 뒤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며 “목표를 정하고 최선을 다 하면 반드시 이뤄진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다. 투철한 신앙심을 가져라.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1952년 3월 대신동에 문을 연 포항선린애육원 전경.
1952년 3월 대신동에 문을 연 포항선린애육원 전경.

□ 포항선린애육원, 6․25 전쟁 중 탄생

포항선린애육은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3월 미국 아담스(한국명 안두화) 선교사와 라이언(한국명 나의온) 선교사, 미국 해병대 클리브즈 군목, 지역 교회들에 의해 포항 대신동 선린병원 자리에서 문을 열었다. 선린애육원은 1천272평 부지에 건물 한 동 뿐이었지만 13명의 전쟁고아를 수용할 수 있었다.

당시 이름은 ‘미 해병대 기념 고아원’이었다. 나의온 선교사가 초대 원장을 맡았다.

미 해병대는 그해 고아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450만원을 모아 870평의 농지를 구입, 선린애육원에 기부했다.

선린애육원은 1988년 1월 환호동 산 17번지에 연건평 2천718m²의 지하 1층, 지상 3층 현대식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2010년에는 16억8천500만원(자부담 12억7천여만 원, 정부보조 4억1천400여만 원)을 들여 리모델링을 했다.

2017년 11월 15일 발생한 규모 5.4 포항지진으로 다시 리모델링을 해야 했다. 지진은 선린애육원 건물 곳곳에 균열을 발생시켰고, 천장 마감재를 떨어뜨려 원아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난해 8월 정부와 법인, 후원금 등 10억 원 가량을 들여 건물 리모델링을 해 현재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 “미국 선교사와 미 해병대가 세워”

포항선린애육원의 설립의 주역 중 한 명인 안두화 선교사는 대구․경북지역 선교의 아버지 아담스(한국명 안의와)의 장남이며, 계명대학교의 설립자이다.

나의온 선교사는 1929년부터 대구․경북지역에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펼쳤으며, 주로 경주, 포항, 영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클리브즈 군목은 포항에 주둔하던 미군 해병대 33연대 소속 군목이었다.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은 물러갔지만, 포항시가지는 거의 초토됐고, 전쟁으로 인한 부상자와 가족들과 헤어진 아이들은 갈 곳이 없어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그때 미군 군목실에서는 시민을 상대로 전도활동과 부상자 치료를 위한 의료사업, 전쟁고아들을 위한 구제사업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들에게는 포항에 주둔하던 미군들과 군목들은 천사와 같이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 지역 5개 교회 모두 이사회 설립 참여

미군 해병대 33연대 소속 군목실의 스미스 목사는 2대 선린애육원장을 맡아 미군들로부터 식량과 생필품 등의 물자를 조달 받을 수 있도록 큰 다리 역할을 하며, 원생들을 자식처럼 따뜻하게 돌봤다. 1953년 9월 결성된 선린재단 창립이사회에 종군목사의 몫으로 참여, 3년 가량 법인이사를 맡아 재단 발전에 큰 도움을 줬다.

이사회에는 포항제일교회, 북부교회(현 기쁨의교회), 남부교회(현 늘사랑교회), 중앙교회, 대도교회 등 포항지역 5개 교회 모두 참여했다.

이사회는 미 해병대에 포항선린애육원의 증개축을 요청했고, 1954년 12월 미 해병대에 의해 4개동을 증․개축했다.
 

□ 부례문 선교사, 원아들에 장학금 전달

부례문 선교사는 안두화 선교사의 후임으로 1958년 선린복지재단 이사로 선임됐다.

부례문 선교사는 학원선교 목적으로 경동노회를 통해 경주의 문화중과 문화고를 인수해 경영했다. 이때 선린애육원의 고아들에게 장학금을 주면서 문화고등학교에서 학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했다. 10여명의 원생들이 문화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선린애육원 출신의 이태수 목사는 “부례문 선교사를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은사”라고 회고했고, 서희건설 이봉관 회장은 “시각 장애인 한 명을 돌보는 조건으로 문화고에 들어가 학업을 할 수 있었고,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도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내겐 그저 기적 같았다”고 회고했다.

1956년 미군철수 후에도 1969년까지 미 해병대 관계자는 법인의 이사로 재직하면서 이사회의에 참석 및 인적.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등 지극정성으로 고아원 운영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에도 미 해병대와의 교류는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1986년 대신동에서 환호동으로 선린애육원 이전을 추진할 때는 팀스피리트 훈련에 참가했던 미 해병대에서 공병대 불도저 2대를 보내 40일간 부지정리 작업을 해 줬다.
 

□ “미군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 없었을 것”

박문하 이사장은 “미군과 미국 군민들에게 감사하다”며 “미군이 없었다면 선린애육원은 없었을 것이고, 대한민국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민 원장도 “6․25전쟁 당시 미군 4만8천명이 숨졌다”며 “대한민국 국민들이 미국의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교역자들의 사랑이 교인들 울려”

윤병식 목사(포항제일교회)는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포항지역 아동들의 형편을 돌아보고, 제일교회 이명직 장로 등과 함께 전쟁고아 보금자리인 선린애육원 설립에 참여했다. 윤 목사는 그 어렵고 참담한 시절에 1대 이사장을 맡아 헌신했다.

윤 목사는 교회에서 교역자들에게 제공하는 성미를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성미 본래의 취지대로 가난한 교인들에게 나눠줬다. 당시 제일교회 교인들은 정성껏 성미를 모아 교역자에게 성미를 드렸다. 윤 목사는 이 성미를 교인들 몰래 외투 밑에 숨겨 가지고 가서 어려운 교인들 집에 두곤 했다.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안 한 장로가 목사님 집을 찾았다. 그 집 장독대에는 쌀 한 톨도 없었고, 사모님은 굶고 있었다.

당시 6.25 전쟁으로 교인들의 생활이 궁핍했다. 끼니를 거르는 교인들이 많았다. 윤 목사는 자신보다 굶주린 교인들을 먼저 돌봤다.
 

이명석 장로는 2대 이사장을 맡아 법인정관인 ‘포항선린애육원 유지재단 기부행위’를 담은 ‘재단법인 선린애육원’의 등록을 정부 보건사회부에 신청, 인가를 받았다.

또 4대 이사장 등 법인이사 24년을 지내면서 선린애육원과 선린복지재단 발전에 공헌했다. 4대 애육원장을 맡아서는 13년 가까이 재임하면서 원생들을 돌보며 헌신했다.

이 장로는 포항YMCA를 창립했고, 사단법인 포항문화원을 발족, 초대 원장을 지냈다. 전쟁 중에 배움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기관인 ‘애린공민학교’도 설립 운영했다.
 

□ 이사장 사랑에 종이꽃으로 보답한 아이들

오태근 목사(포항북부교회)는 미 해병대 클리브즈 군종목사와 라이언 선교사와 함께 선린애육원 설립을 추진했다. 3대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1951년 부유층이 아니면 꿈도 못 꾸던 유치원(교회 부설 북부유치원)을 설립했다. 그 뒤 용흥동교회(현 늘사랑교회)에서 3년가량 시무하고 포항시내 첫 합동교단측 교회인 성남교회(현 큰숲교회)를 개척했다.

정진수 5대 이사장(장로)은 포항 항구동서 비교적 큰 석유회사인 경북광유를 운영했다. 정 이사장은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평생을 근검절약하는 삶을 살았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란 성경말씀에 순종하며 가난한 이웃에게는 한없이 퍼주는 삶을 살았다.

선린애육원 이사장 부임이후 가장 먼저 직원들의 급여를 대폭 인상했다. 신실한 청지기들의 삶이 그러하듯 자신에게는 단벌 양복뿐이었다. 그가 소천 했을 땐 선린애육원 원아들이 모두 흰 종이꽃을 접어 그의 관을 장식했다.

□ “한국의 슈바이처․고아의 아버지로 불려”

김종원 6대 이사장(장로)은 1970년 7월부터 20여 년간 최장기간 재임했다. 김 이사장은 북한에 두고 온 세 아들 대신 200~300명의 어린이와 이웃을 섬겨왔다. 그는 한국의 슈바이처, 고아의 아버지, 할아버지 의사로 불렸다.

1960년 선린의원, 1962년 선린병원, 1983년 선린대학을 세웠고, 1997년 자신 1천여억 원의 병원을 조건 없이 한동대학교에 기증했다.

그의 간증은 세상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줬다. 간증은 이랬다. “제가 포항과 숙명적인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하나님의 손길 때문이었다. 포탄의 웅덩이에서 보았던 그 아이들이 어쩌면 예수님의 다른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박문하 포항선린복지재단 이사장이 20018년 1월 25일 선린아동복지관 강당에서 취임식을 갖고 주요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문하 포항선린복지재단 이사장이 20018년 1월 25일 선린아동복지관 강당에서 취임식을 갖고 주요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 역대 이사장과 역대 원장

△역대 법인대표이사(이사장)

클리브즈 군목 설립자, 1대 윤병식 목사, 2대 이명석 장로, 3대 오근목 목사, 4대 이명석 장로, 5대 정진수 장로, 6대 김종원 장로, 7대 이상길 장로, 8대 박흥식 장로, 9대 김현호 장로, 10대 강태중 장로, 11대 김정치 장로, 12대 김영문 장로, 13대 한중석 장로, 14대 박문하 장로.

△역대 원장

1대 라이언 선교사, 2대 스미스 목사, 3대 정진율 장로, 4대 이명석 장로, 5대 서두표 장로, 6대 김동길 장로, 7대 이희동 장로, 8대 박세혁 장로, 9대 박정민 초대 선린동산원장.

△현 이사장 및 이사

박문하 이사장, 정승수 이사, 김용문 이사, 문봉기 이사, 최순택 이사, 박선해 이사, 임소연 이사, 박세혁 이사, 김수현 이사, 김정섭 이사

/김규동기자 kdkim@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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