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가리는‘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바다란 영생의 이미지, 궁극적인 위안과 내세의 약속이 아니던가? 조금 시적이긴 하지만…… 영혼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야 할 터. 그것이야말로 영혼이 과학에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머잖아 학자들은 영혼의 정확한 피부와 밀도와 비상 속도를 계산해낼 것이다. 유사 이래 하늘로 올라간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하면 울어 마땅하다. 얼마나 막대한 에너지원이 낭비된 것일까. 영혼이 승천하는 순간 그 에너지를 잡아둘 수 있는 댐을 건설했다면, 지구 전체를 밝힐 만한 에너지를 얻을 수도 있었으리라. 머잖아 인간은 송두리째 활용되리라(13면).” 과학이 인간을 송두리째 활용하게 될 때, 과학에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혼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이라고 로맹 가리는 말하고 있다. 그는 이런 슬픈 말을 할 때조차 아름답고 우리의 삶은 아프다.
로맹가리는‘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바다란 영생의 이미지, 궁극적인 위안과 내세의 약속이 아니던가? 조금 시적이긴 하지만…… 영혼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야 할 터. 그것이야말로 영혼이 과학에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머잖아 학자들은 영혼의 정확한 피부와 밀도와 비상 속도를 계산해낼 것이다. 유사 이래 하늘로 올라간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하면 울어 마땅하다. 얼마나 막대한 에너지원이 낭비된 것일까. 영혼이 승천하는 순간 그 에너지를 잡아둘 수 있는 댐을 건설했다면, 지구 전체를 밝힐 만한 에너지를 얻을 수도 있었으리라. 머잖아 인간은 송두리째 활용되리라(13면).” 과학이 인간을 송두리째 활용하게 될 때, 과학에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영혼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이라고 로맹 가리는 말하고 있다. 그는 이런 슬픈 말을 할 때조차 아름답고 우리의 삶은 아프다.

△이력-나다

이력은 신발을 뜻하는 ‘리(履)’와 역사를 의미하는 ‘역(歷)’이라는 한자를 사용한다. 그러니 이력은 말 그대로는 “신발을 끌고 다닌 내력” 정도다. 그래서 ‘이력’은 발자취 곧 ‘족적’이다. 이 단어는 흔히 ‘나다’라는 동사와 결합한다. ‘이력(이) 나다’는 버릇처럼 익숙해지는 행동을 뜻한다. 이때 이력은 ‘이골’이라는 단어와 맞바꿀 수 있다.

하여, 이력은 나의 행적이자 족쇄이기도 한 셈이다. 어떤 일을 통해 이력을 쌓을 수도 있지만 어떤 일에 이력이 날 수도 있는 법이니까. 이력이라는 단어는 이런 식으로 분화하여 벌어질 수 있을 만큼 벌어진다. 이력서의 이력이 한 극점이라면 이력이 나다의 이력이 또 다른 극점이 된다. 그 극점을 지나는 원이 ‘이력’이라는 단어가 살아갈 수 있는 생존 영역이 된다. 단어는 그렇게 하나의 도시를 가진다.

△도시

세계적 도시란 그 지역적 특수성이 모두 소멸된 공간일 것이다. 서울은 서울만의 냄새가 없고, 서울의 음식은 독특함이 없다. 그러기에 어떤 음식이든 먹을 수 있으며, 특정한 냄새가 없기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마치 철제와 유리로 된 건물에 우리의 흔적이 스미지 않는 것처럼, 냄새 없는 음식은 우리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진다.

흔적은 경험의 또 다른 이름이다.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우리의 경험이 축적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반대일 수 있다. 햇살이 내뿜는 빛줄기가 흰빛을 띠는 것은 모든 빛들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도시는 그러한 빛과 같이 모든 문화와 인간을 삼켜버렸고 그런 이유로 텅 빈 공간이다.

이것이 도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모든 문화와 인간을 삼켜버린 사람이라면, 그리하여 너무 배가 불러 지쳐버린 자라면, 그 대단한 식욕으로도 포만감을 누릴 수 없는 거식증의 환자라면, 그의 존재적 양태 역시 텅 빈 공간과도 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 안에서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을 하나도 발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손

나의 손이 가장 무용하게 느껴질 때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과 길을 걸을 때, 혹은 사랑하고 싶은 사람과 우산을 쓰고 갈 때, 사랑하고 싶은 사람과 나란히 붙어 앉을 때다. 손은 그녀의 어깨 혹은 그녀의 손을 잡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기에 나의 손은 무용하다. 그녀의 몸에 스치기라도 하고 싶어 일부러 과장된 행동을 할 때, 그 때는 특히 외롭다.

아무런 소품도 주어지지 않은 배우의 팔을 볼 때 나는 자꾸 외롭다. 칠레의 피노체트가 지배할 당시 의문사를 당했거나 실종된 사람들을 다룬 ‘과부들’이라는 연극에서 대위는 지휘봉을 들거나 총을 든다. 시체를 기다리는 소피아에게 어울릴 만한 소품은 없다. 그녀는 늘 빈손이며, 그녀의 손은 손의 사용 용도에 가 닿지 않는다. 손이 사물과 결합할 때 완전해진다는 것을 조각가들은 분명히 알고 있다. 빈손의 조각상을 찾기는 그만큼 어렵다. 그러므로 연출은 배우의 손에 소품을 쥐어주어야 한다. 그들의 손이 완전해질 수 있도록….

△형광테이프

막과 막 사이에는 어둠이 있고, 그 어둠 속에는 형광테이프가 있다. 형광테이프의 쓸모는 극장의 발전과 관련된 것이므로 그것 역시 연극의 일부다. 저 자리에는 어떤 배우 혹은 어떤 소품이 놓이게 될 것이다. 연출은 공간의 쓸모를 고민하는 반면, 배우나 소품은 그 공간을 소진하여 자리 잡힌 공간을 빈 공간으로 되돌려 놓는다. 공간의 쓸모가 다 했을 때 비로소 다른 막으로 넘어갈 수 있다. 연출은 빈 공간을 채우려 하고 배우는 찬 공간을 비우려 한다. 이 긴장 속에서 연극은 다음 장으로 막으로 넘어갈 수 있다. 채움과 소진의 변증법, 그 사이에 형광테이프가 있다. 형광테이프는 정확히 빈 공간에 있다. 이 말은 얼마나 부정확한가? 형광테이프가 빈 공간에 있다면, 그것은 이미 빈 공간일 리 없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빈 공간 속에 놓여 있다. 공간의 일부라고도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것은 연극 속에서 연극이길 거부한다.

△세계

세계를 창조하지 않고선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 세계 속에는 낱낱의 세계가 꼼꼼하게 박혀 있다. 세계를 창조하는 일은 그 세계 속에 자리잡은 낱낱의 세계까지를 창조하는 일이다. 그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많은 낱낱의 세계들. 낱낱의 세계는 서로에게 무관심하지만, 그 어떤 의무적이고 의식적인 관심보다 더 치밀하게 관계한다. 그러니 세계와 낱낱의 세계는 다를 뿐 거기에 위계는 없다. 크리슈나의 입속에는 우주가 있고, 더 더 들어가면 입을 벌리게 한 크리슈나의 양어머니 역시 그 입속에 있다. 시작과 끝,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꼬리를 삼키는 우로보로스의 뱀. 세계의 유일한 진리, 순환 논증.

△순환논증

가령 이런 대화를 생각해보자. 당신이 나에게 “이게 뭐지”라고 묻는다. 나는 “응, 컵이야”라고 답한다. 그렇게 말하면 당신은 ‘아, 이것은 컵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에게 답을 들은 당신은 이제 ‘이것’에 알게 되었을까? 자, 이렇게 분절해서 생각해보자. 인식 주체 즉 ‘나’는 ‘이것은 컵이다’라고 했다. 이 발화에서 ‘이것’은 인식 대상이며 ‘컵’은 인식 내용이다. 그런데 가만, 당신이 ‘컵’을 보고도 ‘나’에게 ‘이것’이 무엇인지를 당신은 ‘컵’이 뭔지도 모르는 바보인가. 당신이 바보가 아니라면,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을 ‘컵’이라고 규정했을 때, ‘이것’은 컵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말일까, 아니면 컵의 모양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컵과 같은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일까? 컵은 인식 대상의 형태를 의미할 수도 있고, 그 기능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인식 주체는 인식 대상의 전체가 아닌 부분만을 규정한다. 인식 대상은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오직 인식 대상은 인식 주체의 입을 빌려서만 말 되어지기 때문에 인식 대상은 훼손된다. 인식 대상과 인식 주체 간의 간격을 어떻게 건너뛸 수 있는가. 아마 최선의 방법은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순환 논증은 오류가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명징한 언어일 것이다.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라고 한 어느 노승의 말은 온 삶을 통해 깨달은 최상의 말하기 방식이었을 것이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영원의 탕진

결단이든 결심이든 단 한 순간에 이뤄진다. 숙고는 그 뒤를 메워 결단을 추진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결국 우리는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을 사후적으로 합리화한다. 우리의 결단은 순간 속에서 이뤄진다. 아무리 중요한 결단조차 순간 속에서 이뤄진다. 순간에 이뤄진 결단이 우리를 영원히 지배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원을 지배하는 것은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러한 순간을 아니 영원을 어제부터 오늘까지 주구장창 탕진 중이다. 영원히 탕진해도 탕진할 수 없는 것이 ‘영원’이라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