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열한동대 교수
장규열 한동대 교수

오늘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무엇을 누구에게 어떻게 배워 지금 내가 된 것일까? 학교에서 책으로 배우고 집에서 부모에게 익히며 친구들, 선생님들, 지인들과 전하고 나누며 새기고 다져진 결과물이 오늘 나의 모습이 아닐까. 세상의 온갖 소식들을 전달하는 미디어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언론과 미디어가 호기심과 알 권리를 채워주는 덕에 배우고 깨닫는다. 산더미처럼 쏟아지는 뉴스와 익힐 거리들의 의미를 전해 들으면서 배우고 깨우친다. 배우고 익혔던 대로 펼쳐지는 일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는 현실에 절망하기도 한다.

바람처럼 일어나 지금도 번져가고 있는 ‘미투(Me-too)’현상은 사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 주었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성인지 감수성’의 실체를 보여 주었다. 상대가 누구든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여야 하며 상대를 그 어떤 도구로도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깨우치고 있었다. 성희롱, 성폭력 등 민감한 성적 이슈에 대하여는 지극히 조심하여야 하며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기 어려울 것임을 배우고 있었다. 이를 비웃기라도 했었을까. 버닝썬, 장자연, 김학의 사건으로 불리는 뉴스들이 알려지면서 그 모든 운동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우리에게 있어야 할 도덕적 기준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공적인 기대는 듣고 배웠던 것과는 어쩌면 이렇게 멀리 있었던 것일까.

연예인이나 정치인이 되면 저토록 무너진 인성을 보란 듯이 발휘해도 되는 것인가. 배경 든든한 공권력도 얼마든지 내 편 만들어 바람막이로 쓸 수 있는가. 권력은 결국 자기들끼리 한 편이 되어 버리는가. 언론도 때로는 돈과 힘을 따라가는가. 아직도 여성은 남성의 폭력에 힘없이 무너지는가. 이런 판에 피해자가 궁금한 당신은 또 누구란 말인가. 지위가 높았으면 이 정도 드러나도 별 일없이 지낼 수 있는가. 등장인물 저들은 과연 공인인가 마귀인가. 대통령이 나서야 겨우 손볼 만큼 가벼운 일인가. 이런 일로 우리는 공소시효를 따져야 하는가. 이런데도, 아직 뒤에 숨어있는 당신은 누구인가. 어디까지 드러낼 것인지 고민할 일인가. 이게 이념의 오른쪽 왼쪽을 가릴 일인가. 함께 보고 있는 다음 세대에게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숨길 길은 없다. 그들이 무엇을 배우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는가.

사람은 배운 대로 자라지 않는다. 사람은 본 대로 자란다. 하염없이 가르쳐도 한 순간에 날아간다. 앞에 선 이들이 보여준 삶의 모습은 따라오는 세대에겐 치명적이다. 예절과 격식을 배웠어도 성욕과 폭력이 앞설 터이다. 성실과 진심을 가르쳐도 힘과 돈으로 살아갈 터이다. 정직하게 살자고 하면 눈가림으로 막아설 것이다. 실력을 쌓자고 하면 폭력을 길러내지 않을까. 좋은 친구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면 권력의 실세들을 찾아 나서지 않을까.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고 하면 패거리 문화건설에 집착하지 싶다. 이성을 배려하자고 하면 여성을 범할 궁리만 하고 있을까. 병든 사회를 바꾸어 보자면, 당신이나 잘하라는 빈정거림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겨우 대통령이 나서는 것으로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이 또한 지나갈 것으로 기대하는 저 냉소가 보이지 않는가. 오늘의 심대한 도전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결연히 ‘사회문제 공론화’에 나서야 한다. 미래로 당당하게 나아가기 위하여 좌도 우도 없이 모두 나서야 한다. 노인은 당신의 지혜로 앞서야 하며 청년은 당신의 패기로 나서야 한다. 못난 정권에 ‘이게 나라냐’며 일어섰던 기개를 일그러진 사회에 다시 던져야 한다.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 어떤 나라를 물려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