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이라는,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감정
‘부끄러움’이라는,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감정
  • 등록일 2019.03.18 18:52
  • 게재일 2019.03.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민호의 書架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인간실격’ 저자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저자 다자이 오사무.

인간의 마음은 마치 잔잔한 바다 속 깊이 감춰진 물결처럼 빠르게 흐른다. 걷거나 뛰고, 일하고 사랑하는 그 순간에도 마음 속에는 생각이 물결처럼 계속해서 빠르게 흐르고 있을 것이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기만 하는 바다 속 물결의 흐름을 읽어내기 어려운 것처럼, 타인인 우리가 그 사람을 보아도 그 마음속에 어떤 거친 물살이 흘러넘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흐르고 있을까 하는 갖지 말았어야 할 호기심은 나를 공포와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자신이 쓴 철학서인 ‘존재와 무(L‘<00EA>tre et le n<00E9>ant, 1943)’에서 타인 내지는 타자의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에 대해서 궁금해 문에 귀를 대고 열쇠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본다는 가상의 상황을 제시한다. 그런데, 갑자기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서, 뒤늦게 깜짝 놀라며 부끄러움을 느낀다. 물론 내 숨어 있는 모습을 들킨 것이 아니니, 숨어 있던 사실을 남에게 들켜서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질투에서든, 호기심에서든 내가 타인에 대해 마음을 품고 그를 궁금해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일깨워져 부끄러운 것이다. 그가 그 즈음 쓴 희곡 ‘닫힌 방(Huis clos, 1944)’에서 버젓이 ‘타인은 지옥’이라고 선언했던 것은 아마도 그런 인간됨이라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신 앞에 선 똑같은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하나의 마음을 강요받았던 신화의 시대 이래로, 바벨탑 아니 그보다 한참 뒤에 모든 인간들이 각자의 인격을 갖고 자기가 창조한 마음 속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인간들은 이제는 서로의 마음 속에 흐르고 있는 생각을 알 수 없어 괴로워하고, 그것을 궁금해 했다는 사실 때문에 한 번 더 부끄러워한다. 사르트르에 의한다면, 지금 시대의 인간은 영원히 타자의 시선이 빚어내는 부끄러움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인 셈이다. 그러기에 부끄러움이란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감정이라 정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가 타인을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축복이면서 또한 저주이다.

 

1948년 치쿠마 쇼보에서 출판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겉 케이스.
1948년 치쿠마 쇼보에서 출판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겉 케이스.

이러한 시대에는 아마도 언어만이 타인의 내면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것이다. 지금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어른들이 수다를 떨고, 편의점 구석에서 고등학생들이 그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궁금해 하는 것, 그것은 바로 타인의 마음이다. ‘그날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이상하고 낯선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쳐다봤을까.’ 몇 명이 모여서 이야기해본들, 답이 나올 리 없다. 그것은 온전한 타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명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면 두려운 감정만큼은 사라진다. 분명 돌아오는 길 어름에는 이 모든 것들이 또 다시 부끄러워지겠지만, 타인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만큼은 위안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끊임없이 누군가와 타인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이리라.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지금 우리 시대의 소설이 대부분 타인의 내면을 다루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타인의 내면에 비교적 온전하게 접근할 수 있다. 언어를 다루는 작가가 예민하게 포착해낸 누군가의 속마음이 소설 속에는 오롯하게 들어 있는 것이다. 인물에 대한 묘사며, 시점이라는 장치며, 어느 것이나 독자로 하여금 소설 특유의 타인의 속마음으로 들어가는 기술을 극대화하는 방법일 것이다. 바로 옆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마음조차 쉽게 알 수 없는 인간에게 소설은 타인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가 아닐 수 없다.

 

1948년에 출판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표지.
1948년에 출판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표지.

이런 생각을 하며, 서가의 책들을 둘러본다. 사춘기 시절, 설명하기 힘든 기분에 빠져 있던 나에게 작은 위안을 주었던 책들이 여전히 그대로 서가에 꽂혀 있다. 기형도와 김승옥, 카프카와 손창섭…. 그때 나의 세계의 전부였던 것들은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부끄러운 것들이다. 하지만 나는 그 소설을 통해서야 겨우 내게 찾아온 타인의 감정에 대한 갈망을 비슷한 언어로 정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아무래도 알 수 없는 타인의 내면에 대한 자기에 대한 사랑과 자기에 대한 혐오와 부끄러움이었다.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갖지 않을 수 없는 감정이다.

어쩌면, 일본의 다자이 오사무(太宰治·1909~1948)라는 작가는 그러한 인간이 가진 감정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던 작가가 아닐까. 그의 대표작 ‘인간실격’을 꺼내 든다. 그 속에서는 낯선 표정으로 세상과 마주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다자이 오사무.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다자이 오사무.

소설 ‘인간실격’은 1930년 무렵 ‘요조’라는 주인공이 쓴 세 편의 수기를 누군가로부터 받은 작가가 이를 소설로 꾸미면서 앞과 뒤에 이야기를 덧붙인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기를 남긴 요조는 비교적 부유한 가족에서 생활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세상은 모두 낯설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요조의 수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라는 자기고백의 시작은 단지 특별한 인간의 자기고백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라면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근원적인 부끄러움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요조는 세상과 타인에 대해 깊은 감수성을 가진 인간이 모두 그렇듯이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 그 사이에서 근본적인 불일치를 경험하면서, 어린 시절 너무 일찍 자신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가 불협하다는 것을 이해해버린 것이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이지 자주 참 행운아다, 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 다자이 오사무, 김춘미 옮김, ‘인간실격’, 민음사, 2004, 16쪽.

 

2004년 민음사에서 번역된 ‘인간실격.
2004년 민음사에서 번역된 ‘인간실격.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그것, 나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지 않을 수 없는 근본적인 불일치일 것이다. 이 소설은 섣불리 타인의 이해나 앎을 말하기보다는 담담하게 바로 그 아픈 저주 같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 ‘인간실격’은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간됨조차 어떤 개인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것이라는 불안의식을 최초로 선언하여 낙관주의의 언어를 통해 은폐된 인간의 근본적인 불안과 공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비록 소설 속 요조는 익살로서 인간을 가장하거나, 동반자살에 실패하고, 폐병과 정신병을 앓으며 인간으로서의 하찮은 인생을 마치 광인처럼 살아간다. 그가 순수하거나 세상이 더러워서가 아니다. 세상에 던져진 그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것조차 갖지 못한 낯선 인간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의 수기를 읽으며 어떤 위안을 얻는 것은 결코 우리의 삶이 그의 삶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되기조차 어려워했던 그가 갖고 있던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실은 가장 인간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모두 잊어버렸던 나와 타인 사이의 거리가 이 소설 속에서는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소설은 화해되기 어려운 인간과 저 바깥 세계 사이의 간극을 다루는 가장 소설다운 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0년대 초에 김승옥은 다시, 다자이 오사무를 읽자, 는 제안을 하면서 다자이 오사무 전집을 출판하고자 기획했었다. 어린 시절 김승옥의 소설을 읽으며 타인에 대한 부끄러움을 읽어냈던 나는 다자이 오사무를 읽으며 한 번 더 그에게 공감한다. 이 탁월한 작가는 인간이 낯설었던 인간을 통해 우리 모두가 이미 한참 전에 잊어버렸던 것들을 불현듯 다시, 슬쩍 건네고 있는 것이다. /홍익대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