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화 시대, 무엇이 더 나쁜지도 모르겠지만…”
“다원화 시대, 무엇이 더 나쁜지도 모르겠지만…”
  • 윤희정기자
  • 등록일 2019.03.14 19:40
  • 게재일 2019.03.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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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타자들’

이졸데 카림 지음·민음사 펴냄
인문· 1만6천원
트럼프를 당선시킨 미국, 마크롱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충돌하는 프랑스, ‘브렉시트’로 혼선을 빚고 있는 영국에서 오늘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진정한’ 정치의 실현을 위해서 ‘새로운’ 정치 현상을 분석하는 시도가 도처에서 이뤄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붕괴에 대해 준엄히 경고하는 자유주의 정치사상가들, ‘지성’의 반대편에 ‘반지성’을 설정하는 정치평론가들부터 ‘좌파 포퓰리즘’(샹탈 무페)이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좌파까지.

그 모든 분석에서 공통적인 지적은 정치가 예전같이 작동하지 않으며, 대중이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 지구적 세계화로부터 소외된 자들의 귀환이라는 도식 속에서 ‘포퓰리즘’은 비이성과 연결되고, ‘난민 혐오’는 극복해야 할 부정적 감정이 된다. 그리고 이 모든 도식은 결국 계몽이나 각성이라는 공허한 구호를 남긴다. 이졸데 카림에 따르면, 이것은 아직도 중요한 논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론적으로도 틀렸고 전략적으로도 멍청하다. 무엇이 더 나쁜지도 모르겠지만.”(188쪽)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 이졸데 카림(60)은 ‘나와 타자들: 우리는 어떻게 타자를 혐오하면서 변화를 거부하는가’(민음사)에서 ‘타자’와 ‘변화’를 축으로 새로운 논의를 전개한다. 현재의 변화를 제대로 진단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전의 과거와 비교해야 한다.‘상상된 공동체’인 민족 국가의 형성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이 유명한 개념에서 방점은 ‘상상’에 있다. 민족이라는 공동체는 ‘상상’이었다. 그런데 이 말은 민족이 단지 허상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민족은 허구의 개념인데도 우리를 현실적으로 규정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개인들은 그냥 여성이기보다 한국 여성이고, 독일 남성이거나 팔레스타인 남성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강력한 민족 규정은 불과 지난 20~30년 사이에 침식됐다. 민주주의적 국민국가에 동질성을 제공한 민족이 침식되면서, 동질 사회가 천천히 사라졌다. 즉 다원화 사회가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뤄진 변화의 본질이다.

이졸데 카림이 ‘타자’를 말할 때, 이는 관용이나 환대라는 윤리학적 개념을 또다시 역설하는 것이 아니며, 자아와 타자를 둘러싼 기나긴 형이상학을 재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카림은 타자성을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시내 어디에나 있는 케밥집, TV를 틀면 등장하는 트랜스젠더 연예인, 마트 계산대에서 마주치는 외국인 노동자에서 본다. 현재 우리는 길에서, 매체에서 ‘이방인’을 일상적으로 만나고 있다. 이 이방인들은 ‘그들은 누구인가’만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다시 말해 나의 정체성을 흔드는 것이다.

‘나와 타자들’은 정체성을 둘러싼 변화 과정을 따라가면서 개인주의의 층위를 역사적으로 구분한다. 첫째, 19세기 국민국가가 형성될 때 기존의 관계망에서 벗어나 동등한 개인들이 처음 출현했다. 이것이 1세대 개인주의다. 둘째, 1960년대에 와서 정당과 같은 소속을 통한 운동이 각자의 정체성을 통한 개인의 운동으로 분화된다. ‘정체성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2세대 개인주의다. 그리고 세 번째가 지금의 다원화 사회에서 대두한 3세대 개인주의다.

1세대 개인주의에서 주체가 다른 존재로 변화했고, 2세대 개인주의에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주장했다면, 오늘날 주체는 ‘감소’된다. 다문화 속에서 ‘당연한’ 문화가 사라지며, 정상성을 규정했던 남성, 민족, 이성애자 주체가 헤게모니를 잃는다.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가 완전히 다르게 살 수 있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60쪽) 타자 혐오는 바로 이 ‘작아진 자아’가 취하는 방어 태세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적인 문제를 지역적으로 풀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때 다음과 같은 입장을 내세운다. 우리는 그 문제를 풀고 싶지 않다. 우리는 거부한다. 울타리를 치고, 장벽을 세우며, 철조망을 쳐서 변화의 반대편에 설 것이다. 이것은 외부적인 방어인 동시에 내면적인 방어다. 불안한 주체를 완전한 주체로 고정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장벽 뒤에서 옛날의 완전한 정체성은 배타적이고 폐쇄된 것으로 바뀌고 만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바꾸는 다원화 사회에 살고 있다. 돌아갈 방법은 없다.” ─ 본문 중에서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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