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과 편파가 없는 왕도를 걷고자 했던 뜻이 이 한 접시에 담겼을까
붕당과 편파가 없는 왕도를 걷고자 했던 뜻이 이 한 접시에 담겼을까
  • 등록일 2019.02.20 19:27
  • 게재일 2019.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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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다른 지역엔 태평초가 없다고예?
고춧가루식혜, 헛제사밥 비빔밥과 탕평채다.

◇ “그라마 다른 데 사람들은 뭘 먹는교?”

네댓 해 전 겨울 저녁이었다. 늦은 시간 배가 제법 출출했다. 경북 예천 읍내. 식당들도 고만고만하다. 자영업자 한 명, 농사짓고 소 키우는 이 등 토박이 셋에 예천 출신 출향인과 필자 등 5명 일행이었다. 가까운 분식집(?)으로 갔다. ‘태평초’나 먹을 겸. 난로 위에 먹음직한 태평초가 놓였다.

태평초는 신 김치가 주인이다. 더러는 메밀묵이 더 중하다 하지만 역시 듬성듬성 썰어 넣은 신 김치가 태평초 맛을 좌우한다. 신 김치, 기름진 돼지고기, 메밀묵. 여기에 두부를 썰어 넣어도 좋다. 고명이라야 고춧가루와 김 부스러기 정도다. 채소를 좀 썰어 얹어도 탓할 이는 없다. 막걸리가 두어 순배 돌았을 때 필자가 문득 말했다. “하여튼 여기 사람들은 태평초 무지 좋아하네요. 저녁마다 태평초네요.”

출향인이 거들었다. “그렇죠. 태평초 좋아하지요. 이거 아무 것도 아닌데, 외지 가면 겨울에는 가끔 태평초 생각이 납니더. 서울에도 태평초 내놓는 집이 없으니.” 토박이가 한참 쳐다보더니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태평초가 없다고예? 그라마 외지 사람들은 겨울에 태평초 말고 뭘 먹니껴?”

경북북부 사람들은 겨울이면 난롯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태평초를 끓이고 밥과 술을 먹고 마신다. 일상적이다. 토박이들 상당수는 “겨울에는 전국 어디나 다들 태평초를 먹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태평초가 경북북부의 특이한 음식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탕평책을 펼치며 탕평채를 만든 것이 아니다. 탕평채를 보고 탕평책을 떠올렸다. 탕평채가 민간에서 널리 팔릴 때 이 광경을 보고 탕평책을 생각했다는 뜻이다.

◇ 탕평채가 영조대왕 탕평책에서 시작되었다?

태평초는 도무지 뿌리를 알 수 없는 음식이다.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음식’이라고 억지 해석을 해도 마찬가지. 태평성대와 이 지역만의 특별한 연관은 없다.

굳이 이 지역에서만 태평성대를 기원하고 태평초라는 음식을 만들었을까? 이해하기 어렵다. 발음의 유사성을 들어 “탕평채의 서민 버전이 태평초가 아닐까?”라고 지레짐작할 뿐이다.

탕평채는 태평초와 달리 널리 알려진 음식이다. 조선시대에 이미 탕평채가 나타난다. 서울 등 대도시의 한식집에서도 그럴 듯한 요리로 탕평채를 내놓는다.

“탕평채는 영조대왕의 탕평책에서 시작되었다. 영조대왕이 여러 가지 채소를 모둠으로 내놓으면서 조정의 신하들을 골고루 채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탕평채는 탕평책을 드러내는 음식이다.”

널리 알려진 내용이다. 더러는 채소가 가진 색깔이 각각의 붕당을 설명한다고 말한다. 이 설명은 틀렸다.

도토리묵이 들어간 탕평채.
도토리묵이 들어간 탕평채.

‘탕평’은 ‘서경(書經)’에서 시작된 표현이 다. ‘탕탕평평’이다. ‘탕탕평평’은 “붕당과 편파가 없으면 왕도가 탕탕하고 평평하다”하다는 뜻이다. ‘탕탕평평’은 왕도, 왕의 행동거지에 대한 표현이다. 통치자가 평소 매사에 부끄럼이 없으면 하는 일이 거리낌 없다는 뜻이다. ‘탕(蕩)’은 확 쓸어버린다는 뜻이다. ‘탕평’은 ‘거침없이 확 쓸어버린다’는 뜻이다. ‘인재를 고르게 등용한다’는 뜻이 아니다. 탕탕평평, 탕평을 고른 인재 등용과 연관한 탕평책으로 바꾼 이는 영조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2년(1496년) 3월18일의 기사다. 제목은 ‘대간이 봉보부인 · 정문형의 일을 서계하다’이다.

지금 유온(乳媼)은 은혜를 믿고서 전횡하여, 노비(奴婢)를 사급(賜給)하고 족친(族親)을 종량(從良)하는 등의 일을 제멋대로 아뢰어 욕망을 채우니, (중략) 단 왕자(王者)는 사(私)가 없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본디 탕탕평평(蕩蕩平平)하여 대공지정(大公至正)한 도로써 자처하셔야 하는데, 지금 우상(右相)에 대하여 의논한 것을 신들에게 보이지 않으시니 무슨 까닭입니까?

탕탕평평하지 않고 우상과의 논의를 숨겼다는 것이다. ‘유온’은 여기서 연산군의 유모다. 연산군 즉위 2년차, 유모가 각종 특혜를 받았다고 대신들이 따진다. “국왕이 탕탕평평하고 공정한 정치를 펼쳐야 한다”고 말한다. ‘우상과 속닥속닥 나눈 이야기를 숨기지 마라’고 말한다. 그래야 탕탕평평이다. 탕평은 인재를 고르게 쓴다는 뜻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영조가 탕탕평평을 위해 인재를 고르게 쓰겠다고 밝혔고 그걸 탕평책이라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탕평책은 정조대왕 시절 도드라진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뜻을 이어 여러 차례 탕평책을 이야기하고 실행한다. 영조든 정조든 탕평책과 탕평채의 관계를 보여주는 정확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영조의 탕평책과 탕평채는 아직은 근거가 없는 야사일 뿐이다.

섞어서 비빈 탕평채. 당근, 미나리, 청포묵, 숙주나물, 김가루, 계란 지단 등이 보인다.
섞어서 비빈 탕평채. 당근, 미나리, 청포묵, 숙주나물, 김가루, 계란 지단 등이 보인다.

◇ 영조와 영남의 관계? 탕평채는 엉터리다

영조대왕과 오늘날 경북 지역의 ‘인연’을 되짚어 보면 ‘영조대왕 탕평책’과 경북 북부 탕평채는 근거가 없는 억지다.

영조대왕을 평생 괴롭힌 트라우마는 ‘이복형 경종 살해설’이다. 병석에 누워 있는 이복형 경종에게 게장과 감을 올렸고 이걸 먹고 경종이 죽었다는 이야기다.

역적으로 잡혀온 죄수가 영조 앞에서 “그날 이후로 저는 게를 입에도 대지 않았습니다”라고 내뱉었다.

‘그날’은 경종이 죽은 날이다. ‘신(臣)’이라고 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영조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복형 독살설의 정점은 ‘이인좌의 난’이다. 이인좌의 난은 영조 4년(1728년)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이 일으킨 난이다. 주모자는 이인좌, 정희량 등. 난을 일으킨 명분이 문제다. “연잉군(영조)이 게장과 감으로 이복형 경종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했다.” 대역죄다. 여기에 “연잉군은 숙종의 자식이 아니니 밀풍군 탄(坦)을 추대한다”고 내세웠다. 이인좌의 난은 한편으로는 ‘영남란’이라고도 부른다. 시작은 충청도였지만 안동, 상주를 기점으로 영남 남쪽에서 넓은 호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들이다. 영조는 난을 평정한 후 대구부(大邱府)의 남문 밖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워 영남을 반역향으로 못 박았다. 반역의 고장인 영남을 ‘탕탕평평’했다는 뜻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안동을 제외한 경상좌도와 경상우도 전체’가 반역향으로 몰렸다. 과거에도 제한을 두었고, 벼슬길에도 제약이 따랐다. 겉으로는 영조 통치 기간인 ‘50년 동안’이었지만 실제로는 조선 말기까지 남인, 소론은 중앙정계에서 대부분 배제되었다. 순조부터 고종까지 중앙정계의 벌열(閥閱) 비율이 노론 77%, 남인 1%라는 통계도 있다(차장섭, 조선후기벌열연구, 일조각, 1997). 이 시기 소론도 불과 14%. 노론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조선후기는 당쟁이 심했던 시기가 아니다. 사색당파, 당쟁이 끝나고 일당독재 세도정치의 시대다. 영조를 옹립했고 이인좌의 난을 해결한 노론은 이때부터 힘의 우위를 갖추고 정조 시대를 넘긴다. 순조가 열 살의 어린 나이에 등극한다. 수렴청정. 영조 계비 정순왕후 김 씨와 더불어 장동 김 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조선은 사색당파로 무너진 나라가 아니다. 사색당파가 끝나고 노론 일당독재 세도정치 100년에 무너졌다. 당파가 살아 있고 탕평책을 썼으면 오히려 허무한 망국의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다.

영조와 경북북부 지역은 대척점에 있다. 이 지역 선비들은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왕은 이 지역을 반역의 땅으로 몰아세웠다. 영조의 탕평책과 경북 북부의 탕평채? 뭔가 어색하지 않은가?

청포묵을 곱게 깐 탕평채.
청포묵을 곱게 깐 탕평채.

◇ 탕평채는 영조의 음식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 홍선표가 출판한 ‘조선요리학’에서 “영조 때 노소론을 폐지하자는 잔치에 묵에 다른 나물을 섞어 탕평채라고 하였던 것이 초나물의 시작”이라고 했다. 믿을 수는 없다. 영조가 탕평채를 거론했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초(酢)나물은 맛이 신 식초 등을 넣어서 버무린 것을 말한다. 여러 가지 나물 모둠 쟁반인 잡채와 닮았다. 잡채를 버무릴 때 식초를 넣으면 바로 홍선표가 말하는 초나물이다. 다른 점은 묵을 넣는다는 점이다.

조선후기 학자 조재삼(1808-1866년)은 1855년(철종 6년)에 완성한 책 ‘송남잡지’에서 탕평채의 연유를 다른 곳에 두었다. “탕평채: 청포에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섞어서 이것을 만들기 때문에 곧 나물의 골동(骨董)이다. 송인명이 젊은 시절에 가게를 지나가다가 탕평채 파는 소리를 듣고 사색을 섞어 등용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탕평사업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음식 100년’ 탕평채, 경향신문 2011. 07.19

태평초(태평추). 겨울철 경북 북부에서는 태평초를 즐겨 먹는다. 이 지역의 특이한 음식.
태평초(태평추). 겨울철 경북 북부에서는 태평초를 즐겨 먹는다. 이 지역의 특이한 음식.

‘송남잡지’는 조재삼이 기록한 백과사전이다. 단어의 어원 등을 상세히 밝힌 책이다. 이 책에서 탕평채를 설명한다. 젊은 시절 송인명이 이미 저자거리에서 팔고 있던 탕평채를 보고 탕평사업, 탕평책을 생각했다는 내용이다. 장밀헌 송인명(1689~1746년)이 젊은 시절 이미 탕평채를 보았다는 기록이 설득력이 있다. 탕평책을 펼치며 탕평채를 만든 것이 아니다. 탕평채를 보고 탕평책을 떠올렸다. 탕평채가 민간에서 널리 팔릴 때 이 광경을 보고 탕평책을 생각했다는 뜻이다.

장밀헌은 숙종 45년(1719년) 급제한 후, 영조 시절 무거운 직책을 모두 맡았다. 동부승지, 대사간, 이조판서 등의 벼슬은 국왕에게 인사 문제를 건의할 수 있는 자리다. 지금까지 나타난 기록으로는 송인명이 저자거리의 탕평채를 보고 탕평책을 생각해서 영조에게 건의했다는 설이 믿을 만하다.

태평초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탕평채는 영조의 탕평책 이전에 있었다. 영조의 탕평채 자체가 엉터리다. 경북북부 탕평채의 뿌리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존재다. 경북북부의 태평초와 탕평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맛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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