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3·1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대하며(下)

3·1운동 이후 포항헌병분대에서 이름이 바뀐 포항경찰서(현 중앙동)의 모습.
3·1운동 이후 포항헌병분대에서 이름이 바뀐 포항경찰서(현 중앙동)의 모습.

포항지역에 이주한 일본인들의 활동은 다양했다.

어업은 물론이고 잡화, 곡물무역, 금융, 농축산업, 어업, 제염업, 공업, 상업, 교통업, 공무원, 자유업 등에 종사하면서 큰 부를 축적하였다. 3·1 운동 당시 이들은 동해안의 어장과 대규모의 전답 및 목장을 갖추고 지역민들을 소작으로 고용하기도 하면서 사실상 포항의 경제와 정·관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반면 일부 지역민들은 호구지책으로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어장이나 상점 등에 고용되어 민생고를 해결하던 실정이었다.

 

포항으로 이주했던 일본인들
정·재계 장악해 막대한 부 축적
지역 의병 저항에 치안 불안도
역사적 공간·포항 중심지 ‘중앙동’
일본인 가옥 5채 옛 흔적 그대로
죽도시장 연계 역사체험사업 등
문화예술 허브공간 활성화 기대

구한말 여천장(현 포항시 중앙동).
구한말 여천장(현 포항시 중앙동).

일본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포항은 당연히 조선총독부에서도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비상한 관심을 갖고 치안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3·1운동이 있기 전 일본인들은 지역 의병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때문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건너온 일본 보병 제14연대 병력 중 1개 소대병력이 1907년 7월경 포항에 주둔하게 된다. 대도시가 아닌 영일만지역에 일본군 1개 소대병력을 배치한 이유는 장기와 포항 등지에서 무역이나 광산, 수산업을 하던 일본인들이 의병들로부터 많은 피해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현재의 포항 지역인 장기군 지역(현재 장기면, 구룡포읍, 호미곶면과 경주시 양남·양북 포함)에는 장헌문이 이끄는 장기의진이 있었다.

장기의진은 일본사람들이 경영하는 탄광 등 광산을 습격하여 화약을 빼앗고 일본인들을 쫒아내는가 하면, 구룡포를 거점으로 어업경영과 곡물 무역을 하던 도가와 야스브로(十河彌三郞) 경영의 장기 모포리 점포를 습격하기도 했다. 그보다 더 공격적인 산남의진은 흥해와 청하 등의 일본순사주재소를 수시로 공격했다.

포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나날이 들려오는 비보를 접해야만 했다. 장기지역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탄광과 일본인 장사치들이 피습당했다는 소문이 금방 퍼지는가 싶더니 흥해와 청하의 분파소가 의병들로부터 공격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불안에 떨었다.

일제강점기 포항 본정동(현 중앙동) 거리.
일제강점기 포항 본정동(현 중앙동) 거리.

급기야 나카타니 다케사부로(中谷竹三郞)의 집에 모여 일본군대를 포항에 급파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의했다. 청원서는 결사의 각오로 다케다 야스아키(武田安秋), 세토구치(瀨戶口), 산조오(三藏) 등 3인이 급히 대구에 있는 경북도청으로 가서 접수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마침 일본군 14연대의 병사 약 30명이 수비대장 나카지마(中島) 중위의 인솔로 포항에 도착한 것이다. 그제야 일본 거류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포항에 도착한 수비대들은 주둔할 막사가 없어서 나카타니 다께사부로의 집과 오카모토(岡本), 이와사(岩佐)등 세 명의 집에 나누어 거주하면서 의병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1910년 포항에 포항헌병분견소를 설치하였고, 1914년에는 이를 승격시켜 대구헌병대 관하의 포항헌병분대를 설치하여 영일군·영덕군·경주군·울릉군을 관할하게 하였다.

포항의 3·1운동은 이 같은 일군경의 삼엄한 경계와 무자비한 탄압을 따돌리며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당시 포항면의 인구 중 일본인이 차지하는 인구 비율이 24.35%로서 이들이 사실상 포항의 경제계와 정·관계를 지배하고 있었음에도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던 본정(本町)에서 당당하게 3·1운동을 전개하였다. 현재도 중앙동 일대에는 일본인들이 세운 일신해운(포항수협 관사)을 비롯한 약 5채의 일본식 가옥이 그 흔적으로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포항 동빈내항과 송도해수욕장. 육지쪽에는 일본식 건물들이 보이고 내항 건너편에 정어리공장도 보인다.
일제강점기 포항 동빈내항과 송도해수욕장. 육지쪽에는 일본식 건물들이 보이고 내항 건너편에 정어리공장도 보인다.

◇장소성을 살린 독립테마 역사체험프로그램 개발 필요

1913년 포항면(浦項面)이 생기면서 중앙동 일대가 포항동이 되고,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한 포항동에 포항면사무소가 들어섬으로써 이곳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1914년 형산강 사방축제공사가 착수되고 1915년에 연일 생지리에서 현 북구청 자리로 영일군청사가 옮겨옴으로써 중앙동(구 포항동) 일대는 급부상하였다. 이어서 경찰서, 세무서, 소학교, 역, 우편국, 지방법원출장소 등 대부분의 관공서가 이 일대에 이전 또는 신설하게 되자 이곳이 포항의 중심지가 되었다. 관공서 외에도 어업과 관련된 해운건물, 일본가옥들과 상가건물들이 들어섰다.

이후 중앙동에는 각종 어업 보조 산업이 번성하여 냉동공장, 통조림공장, 주물공장 등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 포항-울릉간 여객선 터미널은 이곳에 있다가 1995년 항구동으로 이전하였다.

덕산동은 각종 관공서가 밀집되고 주변에 일인들이 많이 거주하면서 발전하였다. 일제시대 초기 군청거리 서쪽 마을에는 숲이 울창하여 천연두로 죽은 어린애의 시체를 나무 위에 덕(체봉)을 매어 놓기도 하였다고 하여 체봉거리라 부르기도 했다. 덕수동은 1963년 3월 1일 건립된 포항시개항지정기념비가 있다. 수도산은 본래 백산(白山)이라고 부르던 것을 조선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한 모갈거사(茅葛居士)란 분이 은둔하다가 순절한 후부터 그 충절을 되새겨 모갈산(茅葛山)이라고 부르다가, 1923~1926년에 상수도 배수지를 이 산정에 설치한 후부터는 수도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산에 조성된 덕수공원에는 라이온스동산과 모갈거사순절사적비, 모갈정, 충혼탑과 관음사·극락사·보현사 등의 사찰, 반공순국청년동지위령비와 포항사당, 이명석선생 문화공덕비 등이 위치하고 있다. 여천원이 있던 현재의 덕수성당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한때 포항신사(浦項神社)가 자리하기도 했다.

구(舊) 포항의 도심지역으로서 포항역과 중앙상가 등이 위치하고 있었던 중앙동은 요즘 들어 중앙상가는 텅텅 비고 그나마 ‘불종거리’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10년 여천동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하여 집과 백성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진화조직체계를 갖추고 현재 고려요양병원 자리에 경종대를 설치하여 백성들에게 화재 등 위급한 사항을 알려 신속한 대피와 구조에 사용하였다. 그 종을 불종이라 불렀다.

이후 이 거리는 불종로라 불리며 한때 젊은이들이 활보하는 거리로 주목받았으나 중앙상가의 상권이 죽어가면서 이 거리도 시들어가고 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이상준 향토사학자

중앙동은 조선후기 이후 포항의 중심지이며 상권뿐 아니라 관공서가 들어섬으로 인해 정치적 공간으로의 기능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와 지배세력으로 성장했고, 시장이 형성되어 경향각지의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내왕(來往)했다. 이곳에서 기독교인과 청년들을 중심으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났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지역과 참여자의 특성에 따라 3·1운동의 양상이 달라졌던 점을 부각시키려면 지역특색과 장소성을 살린 역사체험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활성화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중앙동이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주무대이자 3·1운동의 역사적 공간이라는 점이 부각되어야 한다. 참여자들은 기독교인 중심이었다.

포항교회의 건물터에 유적비부터 세우워야 한다. 3·1운동의 주무대였던 포항장터에도 조형물과 안내판도 세워야 한다.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건물들에 대한 실태조사와 보존여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인근 죽도시장과 연계한 체험객 마케팅전략을 세우고, 문화예술허브와 독립운동 역사체험프로그램을 연계하는 사업도 추진해 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매년 3·1운동 기념식에는 중앙상가 일대에서 전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대대적인 만세축제를 개최하여 정기행사로 정착시킨다면 선열들의 추념 및 애국정신 고취는 물론 호국문화도시의 이미지 제고에도 한 몫 할 것이다. 아울러 시민들의 소통과 화합, 포항의 정체성 확립의 장 마련에도 더 이상 좋을 게 없을 것이다.

/이상준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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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준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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