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모의 미술사 기행

베를린 코라-베를리너 가 1번지에 설치된 희생된 유대인들을 위한 추모비.
베를린 코라-베를리너 가 1번지에 설치된 희생된 유대인들을 위한 추모비.

독일의 수도 베를린. 이곳에는 지난 세기 유럽에서 벌어진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다. 도시 곳곳에 그 역사가 녹아 있고, 역사적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 베를린은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간다. 프랑스 파리에 샹젤리제 거리가 있다면 베를린에는 운터덴린덴 거리가 있다. 직선으로 1천480m나 뻗어 있는 대로이다. 이 길이 시작되는 곳에는 그 유명한 브란덴부르크문이 역사를 증언하듯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1791년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1744~1797)의 명으로 건축된 개선문으로 당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독일 땅에 새로운 로마제국을 건설하겠다는 프로이센의 야심이 승리의 사두마차(Quadriga)에 투영되어 지금도 베를린의 하늘을 달리고 있다. 영원한 승리에 대한 염원도 잠시, 그 아래에서 장차 인류가 재앙보다 더욱 끔찍한 잔혹의 역사를 경험할지 누가 감히 상상이라도 했을까?
 

좁은 통로를 걸으면 바로 눈앞에 무엇이 나타날지 예측도 할 수 없다. 보이는 것은 끝없이 뻗어 있는 좁은 길과 높은 회색의 콘크리트 벽들 뿐….

무거운 역사에 대한 기억과 반성을 미학적으로 해석해 놓은 공간, 장소적 의미에 따른 엄숙함 그리고 희생자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존재하는 공간이다.

유대인들의 절망과 공포를 상징하는 회색의 콘크리트 블록들.
유대인들의 절망과 공포를 상징하는 회색의 콘크리트 블록들.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짙은 회색의 직사각형 콘크리트 블록들이 펼쳐진 장소가 나온다. 모양은 동일하지만 높이가 제각각이라 위에서 내려다보면 물결치는 파도처럼 보이기도 하다. 설치된 콘크리트 블록의 수는 모두 2711개. 15㎝의 두께로 특수 제작된 블록의 속은 비어있다. 높이는 다르지만 크기와 배치된 간격은 동일하다. 블록 하나의 길이는 3.38m, 폭은 1m에 조금 못 미치는 95㎝이다. 어떤 것은 높이가 겨우 20㎝ 밖에 되지 않아 무릎보다 낮아 보이지만 가장 높은 것은 보통 사람 키의 두 배가가 훨씬 넘는 4m70㎝나 된다. 가장 무거운 블록의 무게는 무려 11t. 블록과 블록 사이의 간격은 한 사람 정도 지나갈 수 있는 95㎝에 불과하다.

이곳은 나치에 의해 목숨을 잃은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기념공원이다. 공식적인 명칭은 ‘유럽의 학살당한 유대인들을 위한 기념비’.

역사적 비극에 대한 추모비 건립은 정서적으로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일제가 위안부 할머님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경고하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 ‘평화의 소녀상’을 설치할 때마다 가해국이 취하는 태도를 되짚어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일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독일, 그것도 수도 베를린에서는 가능했던 것일까?

2711개의 콘크리트 블록으로 구성된 거대한 조형물.
2711개의 콘크리트 블록으로 구성된 거대한 조형물.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들의 추모비 건립에 대한 논의는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들이 이루어지면서부터 이미 시작되어왔다.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것은 1988년인데, 최일선에서 움직인 인물은 독일을 대표하는 여성 저널리스트 레아 로스( Lea Rosh)였다.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희생자 기념관 ‘야드바솀’(Yad Vashem)을 방문한 그녀는 독일로 돌아와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과 반인륜적인 대량 학살을 경고하는 기념비를 건립하자는 사회적 움직임을 이끌어낸다. 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와 ‘양철북’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귄터 그라스 등이 힘을 실어주면서 기념비 건립 프로젝트는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1995년 베를린 주정부는 홀로코스트 추모비 조성을 위한 공모를 진행했고, 1998년 미국 출신의 건축가 피터 아이젠먼과 미니멀리즘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조각가 리처드 세라가 공동 제안한 설계안이 최종 선택되었다. 아쉽게도 리처드 세라는 프로젝트가 진행되던 중에 손을 떠나게 되었지만, 동일한 형태의 기하학적 콘크리트 블록이 규칙적이고 반복적이면서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된 것은 세라의 미니멀리즘적 접근이 최종 결과물에 끼친 영향으로 읽혀진다. 공사가 시작된 것은 2003년 4월 1일, 일 년 남짓 공사가 진행되어 이듬해인 2004년 12월 15일 완성되었고 개막식 행사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60년이 되던 2005년 5월 10일에 진행되었다.

홀로코스트(Holocaust)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태인 대량학살을 일컫는 개념이다. ‘전체’를 뜻하는 그리스어 ‘홀로스’(holos)와 ‘타다’는 뜻의 ‘카우스토스’(kaustos)가 합쳐져 만들어진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로 나치들은 유대인을 상대로 이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던 것일까? 유럽에서 ‘반유대주의’(antisemitism)는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가 분리되면서 유대인들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고(313년) 그 이후 제국의 국교로 선포(392년)하게 된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각지로 흩어져 유랑생활을 시작한다. 유럽 곳곳에 디아스포라(diaspora)로 흩어져 불안한 뿌리를 내렸던 유대인들은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한다. 전통과 교육을 중시했던 유대인들은 상업과 금융업을 통해 큰 부를 쌓아 간다.

엄숙함과 친숙함이 공존하는 새로운 발상의 추모공원.
엄숙함과 친숙함이 공존하는 새로운 발상의 추모공원.

이런 유대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금전거래로 이익을 챙기는 것이 공식적으로 금지된 기독교 사회에서 이자를 통해 부를 축적한 유대인들은 인색하고 부도덕한 민족이라는 편견과 멸시를 받으며 살아왔다. 사회적 위기가 불어 닥칠 때면 언제나 비난의 화살은 유대인들을 향하게 된다. 산업화와 근대화가 진행되어 세상이 바뀌었어도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세계 경제에 힘을 가지게 되자 반감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1차 세계대전(1918년)에 패한 독일은 넓었던 영토를 대부분 잃어버렸고, 경제 파탄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자 아니나 다를까 반유대주의가 극에 달하게 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을 때 잃어버린 민족의 자존심을 끌어올리고 독일 내부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완화할 목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누명을 씌워 민중들의 시선과 관심을 돌리려했다. 반유대주의 정책이 본격화 되자 유대인들은 시민권을 박탈당했고,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된다. 급기야 나치는 유대인들을 좁은 게토(Ghetto)에 몰아넣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다. 이렇게 희생된 유대인들이 적어도 600만 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베를린에 설치된 유대인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기념비의 높은 콘크리트 숲 사이를 걷고 있으면 유대인들이 느꼈을 공포를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다. 좁은 통로를 걸으면 바로 눈앞에 무엇이 나타날지 예측도 할 수 없다. 순식간에 무언가 지나가는 것이 보이지만 그것이 누구인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보이는 것은 끝없이 뻗어 있는 좁은 길과 높은 회색의 콘크리트 벽들 뿐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혼자가 되고, 예외 없이 불안과 공포의 감정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한치 앞의 운명도 예측할 수 없는 유대인들처럼 말이다.

이곳은 무거운 역사에 대한 기억과 반성을 미학적으로 해석해 놓은 공간이다. 장소적 의미에 따른 엄숙함 그리고 희생자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존재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감시나 통제는 최소화 되어 있다. 사람들은 높이가 낮은 블록에 앉아 쉬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블록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목격되기도 한다. 여느 공원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이미 관광 명소가 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블록과 블록 사이를 거닐며 연신 카메라로 이미지를 담아낸다. 아마 이 곳이 어떤 장소인지 모르고 찾게 된다면 현대미술로 채워진 어느 베를린의 인상 깊은 공원정도로 기억하고 돌아갈지도 모른다.

/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