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장 27개 크기 월성, 더 이상 버려진 언덕이 아닌 ‘현장’
축구장 27개 크기 월성, 더 이상 버려진 언덕이 아닌 ‘현장’
  • 등록일 2019.02.10 19:02
  • 게재일 201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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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재발견 소설가 김별아의 월성을 걷는 시간
⑤ 월성,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세요

월성은 흙으로 성벽을 쌓은 토성(土城)이다. 동서 길이 890m, 남북 길이 260m, 바깥 둘레 2340m로 총 면적은 22만2천㎡에 이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3023척, ‘동경잡기’에는 1023보로 규모가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축구장 27개 가량인 셈인데, 한눈에 그 넓이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언덕인데다 발굴조사를 진행 중인 지역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여전히 평범한 소나무 숲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천년의 깊은 잠을 자던 월성이 단번에 눈을 뜰 수는 없다. 그럼에도 발굴조사가 시작된 후로 변화의 조짐은 분명하다. 월성은 더 이상 버려진 언덕이 아닌 ‘현장’이다

천년의 깊은 잠을 자던 월성이 단번에 눈을 뜰 수는 없다. 그럼에도 발굴조사가 시작된 후로 변화의 조짐은 분명하다. 월성은 편의상 월정교와 인접한 서편부터 A, B, C, D 네 지구로 나뉘어 있는데, 현재는 C지구를 포함해 A지구와 해자 등을 발굴조사 중이다. 월성은 더 이상 버려진 언덕이 아닌 ‘현장’이다.

4년 만에 월성을 다시 찾은 날, 발굴조사 현장 귀퉁이에 세워진 팻말 하나를 보았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해설 및 교육팀 ‘월성이랑’에서 진행하는 발굴현장 공개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것이었다. 전화를 걸어보니 발굴 작업이 동계 휴가에 들어가면서 하루 5차례 이루어지는 정기해설(10:00, 11:00, 13:30, 15:00, 16:30 1회당 30분)도 일시 중단된 상태라고 했다. 기사를 쓰고 나서야 전화 통화 중 오해가 있었다는 걸 확인했다. 동절기 발굴조사는 쉬어도 정기해설은 쉬지 않고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추후에 정식으로 취재 요청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곧바로 다시 전화가 왔다. 정기해설이 아니더라도 요청하면 와서 해설을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전국에 한파주의보가 발령되고 경주도 건조주의보와 함께 최저 기온이 영하 6도까지 떨어진 날이었다. 그런 날 달랑 두 명의 방문객을 위해 해설사가 나오겠다니, ‘일’로만 생각해서는 절대 보이지 못할 ‘열정’에 이미 감복했더랬다.

실제로 ‘월성이랑’ 프로그램에 참가한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였다. 관련된 지역과 유적을 찾고 월성도 세 번쯤 돌아보았지만 혼자 하는 ‘공부’에는 한계가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먼저 보고 오랫동안 흩어진 구슬을 엮어온 길잡이를 따라 쫓으면 더 정확히 풍부하게 볼 수가 있다.

경주 곳곳을 다니는 동안 네 차례 해설사의 도움을 받았는데, 모두 무료였고 공짜로 듣기 죄송할 만큼 만족스러웠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동장군도 물리칠 만한 그들의 열정과 헌신성이 나 같은 시큰둥이에게마저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역사가 강단이나 연구 논문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생생해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의, 그리고 시간의 신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이상이다.

2017년 8월 신설한 ‘월성이랑(月城以朗)’은 월성에 순우리말 ‘이랑’을 붙여서 ‘국민과 함께 하는 월성 발굴조사’를 의미하며 ‘신라 화랑(花郞)’의 젊고 활동적이며 진취적인 이미지를 담았다고 한다. 월성 내 석빙고 바로 앞에 작은 사무실이 있는데, ‘월성이랑’ 전체 인원 8명 중 4명씩 교대로 상주하며 해설을 담당한다.

이전까지 ‘문화재 발굴 현장’이라면 으레 높은 벽과 천막에 둘러싸인 비밀스러운 장소로 인식되어 왔다. 일반인의 출입은 당연히 통제되었고 무엇을 어떻게 발굴하는지도 깜깜소식이었다. 그러다가 서울 풍납동 발굴 때부터 현장을 일반에 공개하게 되었고, 이후로는 발굴조사에 지장이 없는 한 현장을 개방하고 조사 결과를 공유하기 위해 애쓴다. 문화재에 대한 마인드가 ‘보호’하는 대상이 아닌 ‘공유’할 가치로 바뀐 것은 우리 사회의 수준이 그만큼 변화 발전했다는 증거이리라.

‘월성이랑’은 2018년 한 해 상설 이용자만 3600명, 연간 2회의 대민 행사까지 포함하면 더 많은 수가 이용한 인기 프로그램이다. 발굴조사의 과정 및 성과와 출토 유물에 대한 해설이 주 내용인데, 발굴조사는 계속 진행 중이기 때문에 시시때때로 정보가 교체되거나 추가된다.

게다가 해설자들의 전공과 관심 분야가 각각 달라 언제 와도 새로운 해설을 들을 수 있다. 꾸준한 운영에 일주일 간격으로 수시 방문하는 ‘덕후’까지 생겼다니, 주마간산으로 대충 둘러보고 돌아서는 대신 ‘월성이랑’의 문을 두드려보면 어떨까?

오늘의 해설은 문헌 전공자인 이성문 연구원이 맡아주었다. 그는 ‘월성이랑’ 사무실 옆 소나무 숲의 ‘숭신전지’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월성 내 조선시대 흔적은 석빙고와 숭신전지 2곳 뿐이다. ‘고종실록’ 상소에 등장하는 숭신전지는 석탈해를 모시는 사당으로, 1980년에 현재의 탈해왕릉 옆으로 옮겨졌다.

그때까지 C지구 남천 쪽으로는 석씨 후손들이 살며 화전으로 농사를 지었다. 월성은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승마장과 국궁장으로 사용되었기에 ‘월성이랑’ 사무실 옆 불룩한 언덕은 신라시대 건물터가 아니라 국궁장 사대(射臺)였다고 한다.

파사이사금 때(101) 만들어졌지만 월성이 왕성으로 제 역할을 한 것은 5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 가장 큰 곡절은 백제 개로왕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고구려 장수왕은 남쪽으로 세력을 뻗히면서 한강 유역의 백제 위례성을 공격한다. 왕성이 함락할 위기에 이르러 후일 동성왕이 되는 백제 사신이 신라 자리마립간에게 구원을 요청하러 달려온다. 그러나 구원병이 가던 중 개로왕이 죽음을 맞으니, 백제왕의 최후를 목도한 자비마립간의 위기감은 어느 때보다 생생했을 것이다.

그때 자비마립간이 명활산성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월성은 소지마립간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18년 동안 왕이 없는 왕성이 된다. 월성의 진짜 주인은 신라의 체제를 정비하고 우경으로 생산력을 발전시킨 지증왕으로 추정되는데, 이 무렵부터 월성이 왕성으로 역할을 하게 되면서 명실상부한 신라 흥망성쇠의 중심이 되었다.

자리를 옮겨 성벽에 올라 해자를 내려다보며 해설이 이어졌다. 토성인 월성의 성벽에 지금 드러나 있는 돌들은 축성 과정에서 비 같은 자연현상에 의해 허물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다. 성벽 해자 바깥의 외부 건물지의 경우 통일신라기 것으로, (육조거리 같은 관청지가 아니라) 내물왕릉 등으로 추측하는 고분들과 가까워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아닐까 추측한다.

1979~1980년 시굴조사를 하고 1984년부터 30년 동안 발굴조사를 진행해 완결한 월성 해자는 사뭇 독특하다. 평지성의 해자는 주로 수로(물길) 형태인데, 월성에는 경주국립박물관부터 월정교까지 거리에 수혈(웅덩이)이 6~7개 배치되어 있다. 수혈식 해자의 웅덩이 길이는 긴 것이 150m, 폭은 50~80m에 이른다. 동고서저, 북고남저의 지형을 이용해 수로를 따라 물이 흘러가도록 했으니 월성은 당대의 토목 기술을 총동원한 정교한 성이 분명하다.


인간은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면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삼한통합)은 한반도의 정치사뿐 아니라 월성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통일 이후 가시적인 적이 사라지면서 월성의 해자는 방어용에서 조경용, 혹은 부분 매립해 건물지로 쓰는 등 용도가 변경된다. 깔끔하게 석축을 쌓고 꽃도 심는다. 해자에서 대량 발견된 가시연꽃(현재 멸종 위기 식물 2급, 보존 1순위 식물) 씨앗은 전쟁터에서 꽃밭으로 변모한 월성을 상상하게 한다. 마침 월성에서 첨성대에 이르는 길이 경주시에서 조성한 꽃밭이라니, 겨울이라 그곳에 만개한다는 유채꽃과 핑크뮬리는 보지 못했지만 말 그대로 ‘꽃대궐’인 아름다운 월성을 상상함직하다.

월성 발굴조사는 성벽과 해자, 그리고 왕궁 건물지 3부분으로 나누어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중 건물지의 C지구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전체를 조망하며 해설을 듣기에 맞춤하다.

“저 사각형으로 칸칸이 나눠진 구역을 뭐라고 부르나요?”

“‘그리드(grid·격자)’라고 합니다.”

“저건 유물을 보호하기 위해 덮어놓은 거죠? 저 파란 방수천은 뭐라고 부르나요?”

“유물과 유구를 보호하기 위해 덮어둔 게 맞습니다. 속어인데, 현장에서는 ‘갑빠’라고 부르지요.”

일정하게 나뉜 ‘그리드’에는 파란 ‘갑빠’가 덮이고 모래주머니로 고정되어 있다. 즉시즉시 떠오르는 궁금증에 답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월성이랑’에 참여하는 즐거움이다.

“여기서 뭐가 나왔어요?”

“언제까지 발굴해요?”

“복원은 어떻게 해요? 왕궁 발굴 복원을 빨리 해서 관광 상품으로 만들었으면….”

복원에 대한 일반인의 반응과 주로 나오는 질문들이란다. 그에 대한 문답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월성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싹튼다.

2007년 월성 지하 레이다(GPR) 탐사 결과 14개 구역 내에서 최소 20개 동 이상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발굴조사 결과 중앙부에 자리한 C지구에서만 17개 이상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제일 먼저 드러난 935년 신라 멸망기의 유구와 유물이다. 씨앗과 곡물이 많이 나온 부분은 2개 정도의 창고, 나머지에서는 벼루가 많이 출토되어 관청으로 추정한다.

사실 ‘발굴’이라고 하면 ‘보물찾기’로 생각하기 쉬운데, 맨 위층의 통일신라기 유물 유구에 대단한 보물은 없다. 월성에서 발굴된 것들은 대부분 기와편으로 지금까지 40만여 점에 이른다. 이성문 연구원은 문헌전공자답게 월성에 남은 보물이 없는 까닭을 ‘고려사’의 기록에서 찾는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항복하러 고려에 갈 때 보물을 실은 수레 길이만 30리가 넘어서 개성 사람들이 모두 구경 나왔다니, 그때 신라의 보물을 깡그리 가지고 가지 않았을까?

월성 발굴조사는 2014년 12월 시작해 원래는 2025년으로 기한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한 기한 없이 꾸준히 묵묵히 진행되고 있다. 현장에서는 발굴일수만 따지는데 행정적인 단위로 몇 개년 계획으로 진행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월성이랑’의 해설 대상은 월성을 방문하는 모든 국민들이지만 특히 수학여행, 소풍 등 현장체험학습으로 월성을 찾는 초중고 학생이 많다. 해설자들은 아이들에게 10년쯤 지나 어른이 되어 와도 이 모습 그대로일 수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혹시 관심이 있다면 관련 학문을 전공해서 월성에서 일할 수도 있을 거라고, 월성은 아주 오래 우리 곁에 있어왔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함께할 테니까.

마지막으로 역사 전공자로서, 월성 해설자로서 국민들,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를 물었다. 이성문 연구원은 진지하게 말했다. “오래 걸릴 거니까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웃으며 덧붙였다. “월성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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