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

포항 영일만에서 생산되는 가공식품으로서의 청어는 관목청어, 관목어로 불리며 궁중에 진상되기도 하던 포항 지역의 특산품이었다. 효전 심노숭(孝田 沈魯崇 1762-1836년)이 유배생활(1801~1806년)을 기록한 남천일록(南遷日錄)에도 계해(1803년) 2월 24일 김귀선이 관목어 3개를 가져다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효전 선생이 기록으로 남겨둘 만큼 인상 깊은 귀한 선물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수백 년의 역사 속에서 이름을 남겨왔던 청어가 최근 다시 어획량이 많아지면서 대체품이었던 꽁치과메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청어과메기로 재탄생하고 있다고 하니 매우 고무적이다. 고 정문기(1898~1995년) 박사가 일제강점기였던 1931년 동아일보 지면(2월 6일~2월 13일)에 6회에 걸쳐 발표한 소논문(바다를 회유하는 청어이야기)에는 포항 영일만에서 잡히는 청어의 습성과 해중생활, 이용 등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담겨 있다. 영일만은 청어가 가장 산란하기 좋은 바다지형을 지니고 있어 러시아해역까지 이동하였던 청어들이 일본 홋카이도와 오츠크해역을 돌아다니다가 산란 후 4~5년이 경과하여 산란 가능한 성어가 되면 무리를 이루어 산란지로 회귀하기 위해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영일만에서 한 마리당 약 5만개를 산란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청어의 고향이 포항 영일만인 것이다.

청어는 약 4세에서 5세가 되면 22~24㎝ 크기가 되고 11세까지는 35㎝까지 자라는데 연령 20세 정도에 이르면 약38㎝의 대청어가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알까지 밴 25㎝ 전후의 청어 무리들이 영일만에 도래할 때에는 청어의 천적인 상어들도 같이 따라와 그물을 물어뜯고 훼손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어쩌면 신라시대부터 포항, 울산, 경주, 경산 등지로 이어지는 상어문화권은 청어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상어 자체는 그 껍질과 뼈를 이용하는 공예품들도 많지만 영일만에서 잡히는 청어의 천적인 상어는 어부들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잡아야만 하는 가문의 숙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위험한 상어잡이는 어부들에게는 일종의 전사의 자격증명과도 같았을 수도 있고, 청어 잡이를 위해 필요한 생존과 직결된 사투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이 지역에서 제사음식에 올리는 상어고기(돔배기)가 갖는 전통적인 의미에는 조상에게 상어를 잡는 자랑스러운 후손으로서 전사가 되었다고 신고하고, 가문의 생업인 청어 잡이의 천적인 상어를 잡아 없앤 증거를 올리니 안심하고 영면하시라는 엄숙한 의식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제강점기이기는 하나 겨울철에 영일만에서 잡히는 청어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상품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 박사에 글에 따르면 생선상태 그대로 포항역을 통해 기차로 수백리 도시까지 공급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생선상태 외에도 염장하여 식용으로 제공하거나 천일을 이용하여 건조시킨 건청어, 염장할 때 후추, 정향, 육두관 등의 향료를 같이 더하여 풍미를 깊게 한 후 훈연 건조시킨 것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기술이 많이 발전한 상태인데도 단순히 천일 건조한 제품으로만 생산되고 그것만 전통적인 식품으로 비춰지는 점이 아쉽다. 청어는 풍부한 비타민A, 비타민D 등을 함유한 좋은 식재료지만 지방질이 풍부한 만큼 반건조 상태에서는 비린내도 많이 나 소비자에게는 호불호가 갈리고 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청어의 고향인 포항이라면 일제강점기에 생산되었던 염장과정에서 향신료를 가한 다음 훈제하여 맛의 풍미를 깊게 하였다는 방식은 지금부터라도 더욱 연구하여 재현하였으면 한다. 이제는 과메기 그 이상을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