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모의 미술사 기행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가 사진으로 기록한 ‘샘’의 원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가 사진으로 기록한 ‘샘’의 원본.

미술은 우리의 삶에 풍요로움을 선사해준다. 마치 거울처럼 시대를 비춰주고 그 시대 속에 존재하는 나를 비춰준다. 그리고 일상의 빠른 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런 나를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미술의 궁극적 의미는 여기에 있다. 미술가들의 치열한 미학적 사유의 자취를 쫓아가는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다. 때로는 작가의 삶을 통해 때로는 마음을 움직이는 한 점의 작품을 통해 시대와 역사를 넘나드는 내밀한 소통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김석모의 미술사기행에서는 세계미술을 움직인 거장들과 그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미술로 떠나는 먼 여행에서 어떻게 보아야하는지,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친절한 안내자가 되기를 바란다.

 

변기를 작품으로 출품하고 논란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뒤샹의 변기는 생소하고 어렵고 왠지 불편하다. 
대중들에게 익숙한 미술의 형식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술에 대한 조금의 기대도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

미술사 최고의 미술가를 한 사람만 꼽으라면 주저없이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이름을 언급한다. 뒤샹하면 1917년 남성 소변기를 뒤집어 세워 서명을 하고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여 미술작품으로 출품한 사건으로 유명하다. 미술에 관심이 있건 없건 설령 뒤샹이라는 미술가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작품 ‘샘’은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뭘까? 이 유명한 작품에 접근해 대화를 이어가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심지어 변기를 작품으로 출품하고 논란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뒤샹의 변기는 생소하고 어렵고 왠지 불편하다. 대중들에게 익숙한 미술의 형식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술에 대한 조금의 기대도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 뒤샹의 변기를 이해하려면 1913년 미국 미술계에서 벌어진 중요한 이벤트에 대한 배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3년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현대미술이 전시를 통해 소개된 해이다. 새로운 미술에 대한 실험이 전통과 충돌을 일으키던 유럽과 달리 당시 미국의 대중들에게 그림이란 여전히 역사화나 인물화, 풍경이나 정물화 등과같은 보기에 편안하고 좋은 것 정도로 여겨졌다. 1913년 2월 17일에서 3월 15일까지 유럽에서 유행하던 인상주의니 입체주의니 하는 아주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미술작품들이 소개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아모리 쇼’(Armory Show)의 시작이다. 오래된 병기창고의 넓은 공간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고 지금도 해마다 이 전시는 이어져오고 있다. 아모리 쇼는 프랑스에서 건너온 미술가 마르셀 뒤샹의 이름을 각인시킨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뒤샹은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2’(1912년)라는 제목의 회화 한 점을 출품했는데 전통적 회화의 형식이 파괴되고 그려진 대상을 알아볼 수 없는 이 작품에 대한 혹평이 쏟아졌다. 하지만 뒤샹은 그 대가로 ‘악명’을 얻었고, 사람들은 이 프랑스인의 이름을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가치를 과감하게 해체한 세련된 프랑스 사람의 상징처럼 여기게 된다.

아모리 쇼에서 가장 혁신적인 유럽의 미술을 접할 수 있었던 미국의 미술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모색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1916년 뉴욕에서는 미술가들이 모여 ‘독립미술가협회’(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를 결성했다. 새로운 미술의 경향을 소개하는 정기적인 전시회를 개최할 목적이었다. 12명의 창단 멤버에 마르셀 뒤샹의 이름도 들어가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지향하는 진보적인 성격에 맞는 새로운 전시회의 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몇 가지 독특한 원칙들을 세웠다. ‘첫째 누구든 원하기만 하면 5달러의 참가비를 지불하고 전시에 참여할 수 있다. 둘째 참가작 선정을 위한 사전 심사도 없고, 셋째 우수작을 선정해 상을 주지도 않겠다!’ 뒤샹은 1917년 독립미술가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현대미술사의 가장 위대한 사건이 벌어진다.

 

1963년 패서디나 미술관(Pasadena Art Museum)에서 개최된 회고전.  /Julian Wasser
1963년 패서디나 미술관(Pasadena Art Museum)에서 개최된 회고전. /Julian Wasser

 

뒤샹은 남성 소변기에 ‘리처드 머트’(R. Mutt)라는 서명과 함께 제작년도 ‘1917’을 적어 넣고 ‘샘’(Fountain)이라는 제목으로 출품했던 것이다.

협회회원들은 익명으로 제출된 뒤샹의 작품을 아무런 논의도 없이 전시작품에서 제외시켜 버린다. 이같은 결정에 반발한 뒤샹은 회장 직에서 물러났다. 그렇다면 독립미술가협회는 뒤샹의 ‘샘’을 어떠한 이유로 거절했을까?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리처드 머트라는 이름의 사람이 출품한 ‘물건’이 미술가의 손에 의해 직접 제작된 것이 아니라 공산품으로 대량생산된 상품이라는 점이다. 심지어 그 물건이 다른 것도 아니라 변기라니! 아무리 사용하지 않은 새 것이라도 변기와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는 위생적이지 못한 연상 작용은 사람들에게 거부반응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으리라 추측된다. 과연 뒤샹은 이러한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리처드 머트의 변기가 거절당하자 뒤샹은 지체없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글을 게재한다. 뒤샹의 글이 실린 곳은 ‘블라인드 맨’(The Blind Man)이라는 잡지인데 뉴욕의 다다이즘 미술가들이 주축이 되어 모두 두 차례 발간이 된 출판물이다. 뒤샹의 글은 ‘리처드 머트씨의 사례’(The Richard Mutt Case)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대략 담고 있는 핵심 내용은 이렇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가 사진으로 기록한 ‘샘’의 원본.

“6달러만 지불하면 누구나 출품할 수 있는 전시회에 리처드 머트씨의 작품은 아무런 이유없이 거절을 당했다. 사람들은 이것이 변기이기 때문에 외설적이고 저속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그냥 소변기일 뿐 불결하거나 외설적이지 않다. 또 어떤 사람들은 리처드 머트씨가 이것을 직접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작품이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이것을 직접 만들었건 아니건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것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리처드 머트씨는 일상적인 대상에 새로운 관점을 불어 넣어 주었다!”

이것이 개념미술이 탄생한 순간이다. 뒤샹은 작품 ‘샘’으로 미술이 개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용품들은 대량으로 생산되어 값싸게 공급된다. 이런 기성품을 ‘레디메이드’(Ready-made)라고 부른다. 지금까지도 미술작품은 미술가들의 직접적인 노동행위를 통해 제작된 ‘핸드메이드’(Hand-made)라는 관념이 지배적이다. 미적 주체로서의 미술가의 고귀한 미학적 흔적이 작품을 작품이게 끔 해주며, 작품의 예술성을 보장한다는 생각이 불문율처럼 공유되고 있다. 그런데 뒤샹의 행위는 노동과 물질이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결정짓는다는 기존의 관념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 미술가의 창작 행위는 ‘선택’과 ‘선언’만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뒤샹으로 인해 이제 미술가들은 물질로부터 해방되었으며 노동이 아니라 관점의 창조자가 되었다.

1917년 뒤샹이 서명해 출품했던 ‘샘’의 원작은 뒤샹의 중요한 수집가 아렌스버그(Arensberg)에 의해 소장되었지만 분실되어 버렸고, 지금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복제품(Replica)이다. 작품 ‘샘’의 원작으로 인정받고 있는 복제품은 대략 스물일곱 점 정도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복제품과 원작의 경계가 사라진 것도 뒤샹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관점이다.

 


김석모씨는 독일 뒤셀도르프 대학에서 미술사학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대구미술관 전시팀장을 역임했다. 현재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