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띠풀이

권정찬 화백의 ‘새해를 열다’. 길몽(吉夢)과 재복(財福)의 상징인 돼지해를 맞아 돼지꿈처럼 모두의 희망과 꿈이 이뤄지는 한 해가 되길 바라는 화가의 마음이 담겼다.

2019년 기해년(己亥年) 새해가 밝았다. 건강과 복을 안겨준다는 돼지띠의 해. 기(己)가 노란색 혹은 황금색을 뜻하므로 황금 돼지의 해다.

돼지해는 육십갑자에서 을해(乙亥) 정해(丁亥) 기해(己亥) 신해(辛亥) 계해(癸亥) 등 다섯 번 순행한다. 돼지(亥)는 12지의 열두 번째 동물이다. 해시(亥時)는 오후 9시에서 11시, 해월(亥月)로는 음력 10월이며, 해방(亥方)은 북서북(北西北)에 해당하는 시간과 방향을 지키는 시간신(時間神)이자 방위신(方位神)에 해당한다.

‘돼지’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속담도 있고, 흔히 뚱뚱한 사람을 보고 ‘뚱돼지’라고도 하며, 귀엽게 ‘꽃돼지’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돼지고기는 새우젓과 같이 먹어야 한다’는 말도 있고, 고사를 지낼 때는 돼지머리를 상 위에 올려놓고 장사가 잘되기를 빈다. 돼지와 관련된 민속은 참으로 많다.

우리나라에서 돼지를 사육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2천년전 쯤으로 추정된다. 돼지는 신화(神話)에서 신통력(神通力)을 지닌 동물, 제의(祭儀)의 희생(犧牲), 길상(吉祥)으로 재산(財産)이나 복(福)의 근원, 집안의 재신(財神)을 상징한다. 그런 반면에 속담에서 대부분 탐욕스럽고 더럽고 게으르며 우둔한 동물로 묘사되는 모순적 양가성(矛盾的 兩價性)을 지닌 띠동물이다.
 

한국 신화에선
신에게 바치는 신성한 제물
신통력 지닌 동물로 그려져
오늘날 고사상에도
돼지머리는 중요한 제물

조선시대 궁궐·사찰 수호에
추녀마루에 저팔계잡상 장식

돼지꿈, 재물·태몽·횡재
돼지코그림, 번창의 상징

△저승의 양식꺼리, 돼지

돼지의 조상 격인 멧돼지의 동물화석이 석기시대의 유적인 평남 검은모루동굴, 덕천승리산 동굴유적, 청원 두루봉 제2굴·제9굴 유적 등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아 돼지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한반도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남 김해, 양산, 황해도 몽금포 등지의 조개무지에서도 멧돼지 이빨이나 뼈가 출토되고 있다. 대곡리 암각화에도 그들의 중요한 식량원(食糧源)이었던 멧돼지가 새겨져 있다. 멧돼지의 그림이 사슴 다음으로 많은 것으로 보아 그 시대 사람들의 좋은 사냥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에선 기원전 5천년 경에 이미 양돈을 시작했고, 중국에서는 한족이 황하 유역에 정착해 농경을 하게 된 기원전 2천500년 전후부터 돼지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부여조에서 보면 “나라에는 군왕이 있고, 모두 육축(六畜)의 이름으로 관명(官名)을 정하여 마가·우가·저가·구가가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읍루 조에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며 그 고기를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어 입는다. 겨울철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른다”라고 기록돼 있고, 같은 읍루를 ‘진서’ 동이열전에는 숙신씨라는 명칭으로 그 풍속을 기록했는데 “소와 양은 없고 돼지를 많이 길러서, 그 고기를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며 털은 짜서 포를 만든다…. 죽은 사람은…. 관을 만들고 돼지를 잡아서 그 위에 쌓아 놓고는 죽은 사람의 양식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또한 삼국지 위지동이전 한조에도 “주호(제주도)에서는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는 약 2천년 전부터 돼지를 키우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철기시대 이후로 완전히 가축화된 돼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의미를 부여받게 됐다.

△신화적 신통력을 지닌 돼지

한국 신화에 등장하는 돼지는 신에게 바치는 신성한 제물로, 신통력을 지닌 동물로 그려진다. ‘삼국사기’ 고구려 유리왕편에서는 제물로 바치기 위해 기르던 돼지가 달아나 왕이 이를 잡아오라 시킨다. 관리가 국내성 위례암에서 돼지를 겨우 잡는데, 그 곳의 산세가 뛰어나 이를 왕에게 알리고 도읍을 옮기게 된다. 돼지가 수도를 점지해 주고 신의 뜻을 전하는 사자의 역할을 한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산상왕조편에서는 돼지가 아들을 점지해준다. 산상왕 12년 겨울 제사에 올릴 돼지가 달아나 한 처녀가 잡아줬고, 그 처녀와 왕 사이에 생긴 아들이 동천왕이 된다는 내용이다.

△궁궐과 사찰을 지키는 저팔계 잡상(雜像)

조선시대 궁궐, 사찰 건축물 추녀마루에 저팔계잡상이 장식된다. 잡상은 ‘서유기’의 등장인물을 형상화한 것으로, 궁궐이나 불교사찰을 지킨다고 한다. 처팔계잡상은 삼장법사, 손오공 다음으로 세 번째 위치한다.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에 의하면, 궁궐의 전각과 문루의 추녀마루 위에 놓은 10신상(神像)을 형상화해 벌여놓아 살(煞)을 막기 위함이라 한다. ‘어우야담(於于野譚)’에 의하면, 신임관(新任官)이 선임관들에게 첫인사(色新許參)할 때 반드시 대궐문루 위의 이 10신상 이름을 단숨에 10번 외워보여야 받아들여진다(許參)고 하면서, ①대당사부(大唐師傅) ②손행자(孫行者) ③저팔계 ④사화상(沙和尙) ⑤마화상(麻和尙) ⑥삼살보살(三煞菩薩) ⑦이구룡 ⑧천산갑(穿山甲) ⑨이귀박(二鬼朴) ⑩나토두(羅土頭)의 상을 적고 있다. 곧, 여기에서의 대당사부는 삼장법사현장이고 손행자는 손오공(孫悟空), 사화상은 사오정(沙俉淨)으로, 바로 ‘서유기’의 등장자 등의 귀물(鬼物)을 만들어놓는다고 적고 있다. 이들이 잡상으로서 기와지붕 위에 놓이게 됨은 ‘서유기’에 나오다시피 당나라 태종의 꿈속에 밤마다 나타나는 귀신이 기와를 던지며 괴롭히자 문관·무관을 내세워 전문(殿門)을 수호하게 했다는 내용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전(祭典)의 최고 희생(犧牲) 돼지 - 고사상에 돼지가 없으면 헛 것

굿이나 고사 등을 지낼 때 상 위에 돼지가 없으면 안 된다. 돼지는 일찍부터 제전에 희생으로 쓰여진 동물이다.‘삼국사기’, ‘동국세시기’ 등을 보면 고구려, 조선시대에 돼지를 제사 제물로 썼다는 기록이 나온다. 오늘날에도 돼지는 고사나 개업 행사에 가장 중요한 제물로 등장한다.

조선시대에는 동지 후 제3 미일(未日)로 납일(臘日)로 정해 종묘와 사직에 큰제사를 지냈다. 납향에 쓰는 고기로는 산돼지와 산토끼를 사용했다. 경기도내 산간의 군(郡)에서는 예로부터 납향에 쓰는 산돼지를 바쳤다. 그러기 위해서 그곳 수령은 온 군민을 발동해 산돼지를 수색해 잡았다. 이러한 관습은 폐단이 있어 정조때 부터는 서울의 포수들을 시켜 산돼지를 사냥해오도록 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무당의 큰 굿에서나 동제(洞祭)에는 돼지를 희생으로 쓰고 있다. 또한 각종 고사 때는 어김없이 돼지머리가 등장한다. 집에서 지내는 고사나 개업 같은 행사 때면 우린 의례 돼지머리를 가장 중요한 ‘제물’로 모신다. 이처럼 제전에 돼지를 쓰는 풍속은 멀리 고구려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도 전승되고 있는 역사가 깊은 민속이다.

△돼지꿈은 돈꿈이다

돼지는 길상(吉詳)의 동물로 길조를 나타내며 재산이나 복의 근원으로서 ‘업’ 집안의 수호신 또는 재신을 상징한다.

우리의 고대 문헌이나 문학에서의 돼지는 상서로운 징조로 많이 나타난다. 신라 태종 무열왕이 즉위 원년에 돼지를 바치는 자가 있었다. 그런데 머리 하나에, 몸뚱이는 둘, 발이 여덟 개였다. 해석하는 자가 이는 천하를 통일할 징조라 했는데 과연 그렇게 됐다.

흔히 돼지는 꿈풀이를 할 때 길상의 동물로 등장한다. 우리는 흔히 꿈에 돼지를 보면 재물이 생긴다고 해 요즘 사람들은 복권을 사기도 한다. 태몽으로 돼지꿈을 꾸게 되면 부자가 될 자식을 낳게 된다고도 말한다. 돼지꿈을 꾸면 ‘복이 온다’거나 ‘음식을 얻는다’고 한다. 꿈풀이 책을 뒤져보면 ‘돼지는 재물, 횡재, 소식, 벼슬, 복권당첨, 명예를 상징한다’고 돼 있다. 돼지꿈이라고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돼지가 꿈에 죽었다거나, 병든 돼지가 신음을 하고 있다거나, 돼지가 발톱으로 자신의 얼굴을 할퀴어 버린다가나 하면 나쁜 꿈이 돼 버리는 것이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돼지꿈도 해몽하기 나름이다.

돼지그림이나 돼지코는 번창의 상징이나 부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장사꾼들에게는 ‘정월 상해일에 장사를 시작하면 좋다’는 속신이 있다. 이처럼 돼지가 재물과 관련된 것은 돼지가 가계의 기본적인 재원(財源)이었기 때문이며, 그 한자의 ‘돈(豚)’이 ‘돈(金)‘과 음이 같은 데에 연유한다. 장사하는 집에서는 곧잘 돼지 그림을 문설주 위에 그려 붙였다. 6, 70년대만 하더라도 이발관이나 상점에 개업식을 하면 개업선물로 가장 좋은 것이 돼지그림이었다. 큰 어미돼지가 누워있고, 새끼돼지가 젖을 빨고 있는 모습에 “반드시 복이 들어온다(必有萬福來)”라는 글귀를 적었다. 돼지그림은 돈벌게 하는 부적이다. 돼지가 한배에 여러 마리씩 새끼를 낳고, 잘 먹고 잘 자라는 강한 번식력 때문이었다. 사업의 번창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돼지가 풍년이나 번창을 가져온다고 하는 인식은 돼지 저금통 등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돼지는 탐욕스럽고 더럽고 게으르고 우둔한 동물이기도 하다

돼지는 민속적으로 신이하고 길한 동물이지만, 동시에 탐욕과 게으름, 더러움의 대상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속담 ‘돼지는 우리가 더러운 줄도 모른다’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등은 돼지를 지저분하고 부정적인 동물로 인식하게 한다. 강원 금화군의 ‘금돼지와 최치원’설화에서는 도술을 부리는 금돼지가 고을 원님의 부인을 납치해 이를 사슴가죽으로 물리쳤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서 돼지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대상이며, 탐욕스럽고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괴물로 등장하고 있다. 충남 부여에는 돼지가 여우의 말을 듣고 꿀을 많이 먹어서 비계살이 생기고 꿀꿀 소리를 내게 됐다며 우둔한 면을 강조한 이야기도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도움말= 천진기 민속학자

국립전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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