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 하나의 풍경
브리즈번과 최두석 시인

많은 사람들은 착각 속을 산다. 자신이 발 디딘 땅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혹은 지구가 나를 가운데 놓고 자전과 공전을 한다는.

이런 터무니없는 착각과 미망(迷妄)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어른’이 된다. 그런데 그건 행복할까? 이 땅에서 힘없는 어른이란 겨우 ‘외롭고 우울하며 더불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한데.

인천공항을 차고 오른 비행기가 10시간 30분을 날아 호주의 브리즈번에 도착할 즈음. 내려다본 바다는 막막하고 드넓었다.

지구라는 땅덩어리 전체를 보자면 호주 역시 하나의 ‘섬’이다. 그러나 그 섬이 기자가 50년 가깝게 살아온 나라보다 수십 배가 크다면….

브리즈번 공항으로 마중 나온 지인의 차를 타고 시내로 향하는 길. 모든 게 한국보다 컸다. 운행되는 버스가 그랬고, 대형 차량이 달리는 도로의 폭이 그랬고, 길옆으로 보이는 공장과 호텔이 그랬다.

무지막지하게 큰 땅 위에 지어진 거대한 건물과 아스팔트 길. 그게 호주를 생전 처음 본 사람의 첫 느낌이었다.

비단 사물만이 아니었다. 브리즈번은 사람들도 컸다. 기자의 키는 183cm, 몸무게는 87kg 정도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에선 결코 작은 체격이라 할 수 없는 몸피. 그러나 호주 사내들 앞에선 ‘아기’처럼 보였다.

시내에서 만나 정류장의 위치를 알려준 청소부의 몸무게는 족히 120~130kg은 넘어 보였고, 버스운전수 역시 키가 2m에 육박했다. 뿐 아니다. 해가 저물고 술집에서 만나 맥주 한잔을 나눈 호주 술꾼이 악수를 하자며 내민 손바닥은 야구 글러브 크기였다.

전우치의 황금대들보 /최두석

옛날 어느 극심한 보리 흉년 쌀 흉년에 전우치는 구름을 타고 세상 임금들의 처소에 야간 돌입해 옥황상제의 궁궐을 짓는다고 속여서 금대들보 금서까래를 거두어갔다.

그래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서까래를 쓰고 대들보는 남아 내 고향 들판에 묻어 두었다고 전하는데 가을 벌판이 온통 황금빛으로 출렁일 때면 정말 믿고 싶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개울이나 두엄자리에 던져두고 동무들 모두 들을 떠났다. 이발사, 운전수, 자개공, 면서기, 외판원이 되어.

유일하게 남아 있던 김오중이는 땅마지기에 과수원까지 착실한 그래도 부농이었지만 마땅한 색시가 없어 시무룩했다.

마침내 농약 먹고 뒷산에 묻혔는데, 오랜만에 귀향한 내가 캄캄 무소식인 채 그의 집에 들었더니, 애써 결혼한 신부의 가슴에서 젖이 물큰 솟아나왔다 한다.

▲ 모든 게 다 큰 호주에서 떠올린 한국의 작은 마을

놀라움은 계속적으로 이어졌다. 조그만 동네에 갖춰진 바비큐장도 컸고, ‘호주 마트’의 주류 코너 하나는 어지간한 한국 마트 전체 크기만 했다. 숫자를 헤아리기 힘든 다양한 종류의 포도주와 맥주, 위스키와 버번. 거기에 보드카와 테킬라까지.

점심을 먹고 산책하러 간 브리즈번 ‘동네 바닷가’ 역시 그 사이즈가 어마어마했다.

다음 날 1시간쯤 자동차를 타고 가서 만난 골드코스트(Gold Coast)는 ‘크기로 여행자의 기를 죽이는 호주 관광’의 절정이었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해변의 길이가 30km가 넘는다고 했다.

부산 해운대와 강릉 경포대, 포항의 영일대해수욕장 백사장을 산책하면서도 힘겨워했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그런데 무엇 때문이었을까? 사람을 압도하는 호주의 거대한 풍경들 앞에서 기자는 괴이하게도 아주 ‘작디작은 한국 마을’의 말없는 한 시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가난하고 외로운 꿈’도 짓밟히지 않는 세상

시인 황지우(66)로 하여금 “친구와 선후배 중 진짜 시인은 두석이 뿐이다”라고 말하게 만든 사람 최두석(62)은 서울대를 나와 교수로 일하고 있다. 10여 년 전이다. 그를 서울 북쪽의 어느 강변 허름한 식당에서 만났다.

그날 동석한 소설가 두 명과 기자 하나가 취중에 오만 가지 잡설을 내뱉는 가운데서도 최두석은 바위에 새긴 부처처럼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보일 듯 말듯 희미한 웃음만을 머금었을 뿐.

최 시인은 한여름에도 울울창창 어둡고 서늘한 그늘을 만드는 대나무 숲으로 유명한 담양에서 태어났다. 피 뜨거운 선비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스승 조광조의 죽음에 절망해 은둔했던 소쇄원(瀟灑園)이 있는 조그만 도시.

위에 언급된 시에선 자신의 고향이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리던 백성을 구하고, 새로운 세상을 세우려던 봉건시대의 영웅 ‘전우치’가 금으로 만든 대들보를 숨겨 놓은 곳이라 믿는 최두석의 ‘문학적 순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어린 날의 꿈과 순정이 깃든 고향은 더 이상 아름다운 ‘추억의 공간’이 아니다. 그곳에선 먹고살기조차 힘들어 ‘이발사, 자개공, 면서기, 운전수, 외판원’이 돼 고향을 떠난 친구들. 어떻게든 거기서 삶의 뿌리를 내리려던 친구는 슬픈 죽음과 마주해야 했다.

긴 세월이 흐른 뒤 마침내 텅 빈 창고 같은 고향을 찾아간 시인. 거기서 만난 죽은 친구 아내의 젖먹이를 보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모두가 알다시피 ‘아기’란 희망의 메타포이자 상징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큰 나라에서 태어난 큰 인물만이 세상을 바꾸는 건 아니다. 때론 조그만 마을의 보잘것없는 서생(書生)도 거대한 변혁을 꿈꾼다. 최두석 또한 그런 꿈속을 달리지 않았을까. 이는 시인의 본원적 역할이기도 할 것이기에.

▲ 거대한 고래를 보며 떠올린 ‘소박한 희망’

브리즈번 여행의 마지막 날. 고래를 보러 바다로 나갔다. 커다란 꼬리를 휘두르며 짙푸른 물결 속으로 자맥질하는 20m짜리 포유류.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거대한 고래가 아득한 수평선 너머로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 돌아온 오후. 브리즈번 강변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가족과 만났다.

“당신 나라는 뭐든 다 큰 것 같다”는 동양인 여행자에 말에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호주 사내가 웃었다. 돌아온 그의 대답은 의외로 소박했다. “다들 고래를 꿈꾸지만 모든 사람이 고래처럼 살진 못하겠지요.”

바로 그때였다. 호주 ‘큰 바다’가 아닌 포항 ‘작은 바다’에 기대 살아온 ‘평범한 사내’에 관한 시를 쓰고자 다짐한 것은. 아래 졸시는 그 결과물이다.

대게잡이배 선원 철구 씨

45세 철구 씨는 우즈베키스탄으로 간다
여기서 구하지 못한 아내 거기라고 찾아질까

성질 마른 철구 씨, 고등학교 2학년 때
선배 둘 코뼈를 내려앉히고
머리통 쥐어 박히며 아버지와 대게잡이 배를 탔다
바닷바람은 매웠고 손등은 갈라 터졌다
그러나 정직한 노동은 정직한 돈을 가져다주고

솜털 같은 턱밑 수염이 어느새 억세진 서른여덟
포항운하가 내려다뵈는 아파트의 주인이 됐다
영어로 제 이름을 쓰지 못하는 철구 씨
‘세진 베르체’라 적힌 제 집의 스펠링도 뜻도 모른다

흑룡강성에서 왔다는 여자는 곰살맞았다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철구 씨 매일 웃었다
그녀가 빚은 커다란 만두와 독한 고량주가 달았다

겨울 태풍에 조업이 난항을 겪었다
예정된 3박4일을 넘겨 현관문을 열었다.
손에는 여자가 좋아하는 매운 돼지찜을 들고
없었다 아무도, 아무 것도 없었다
싸구려 헤어드라이어까지 사라졌다
며칠을 주저앉아 제 잘못을 떠올리고자 했다
그러나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칠순 노모는 같이 울었고
팔순 아비는 돌아서 줄담배를 피웠다
열일곱 때처럼 철구 씨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그리곤, 우즈베키스탄행 비행기 표를 내던졌다

중앙아시아 사막을 내려다보며 홀로 돌아오는 길
비행기 창은 왜 이리 좁디좁은 것이냐
공짜 위스키에 취한 철구 씨는 눈물을 쏟았다
폭풍에 흔들리는 주먹만한 배 위
백척간두 목숨 앞에서도 흘린 적 없는 눈물이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호주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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