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1948년 12월 10일 국제연합 인권위원회는 ‘세계인권선언’을 발표한다.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지구촌을 건설하기 위한 인간의 기본권을 명시한 선언이다. 영장없는 체포와 구금, 추방으로부터 자유, 사상과 양심 및 종교의 자유, 평화적인 집회와 결사(結社)의 자유 등이 인간의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로 거명된다. ‘인권선언문’ 제1조는 간명하되 대단히 인상적이며 선진적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서 평등하다. 인간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기에 서로에게 형제자매의 정신으로 행해야 한다.”

어디선가 본 것같은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프랑스 삼색기(三色旗)의 영혼과 정신이 인권선언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자유, 평등, 형제애.’ 자유는 본디 권력과 부, 명예를 가진 자들이 주장하는 덕목이며, 평등은 노동자와 농민같은 사회적 약자가 내세우는 권리다.

그 양자의 대립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지양(止揚)한 것이 ‘형제애’다. 따라서 형제애는 자유와 평등 모두를 아우르는 지극히 보편적인 미덕이자 가치라 할 수 있다.

지난 10월 21일부터 프랑스에서 ‘노란조끼’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프랑스 정부의 유류세와 자동차세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에서 촉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면(裏面)에는 마크롱 정부의 반(反)서민 친(親)부자·기업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깊은 반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프랑스는 부자들의 전유물인 호화자동차, 귀금속, 요트에 부과된 부유세를 폐지하고, 기업의 법인세를 2022년까지 25%로 인하할 방침이다.

반면에 노동자의 초과근무수당 인하, 담배와 석유제품 소비세 인상, 연금 실수령액 축소 등으로 서민의 삶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면서 파리 시내 곳곳에는 최루탄과 돌멩이가 난무하고, 개선문과 박물관이 훼손되고 있다.

이번 ‘노란조끼’ 시위는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등으로 확산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시위를 대하는 프랑스 시민들의 자세다. 72%의 시민이 노란조끼 시위를 지지하지만, 85%의 시민은 폭력시위에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90%에 이르는 절대다수의 시민은 시위대를 대하는 정부의 조치와 정책대응 방안이 위중한 사안(事案)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그래서일까. 거리에 나붙은 구호는 각양각색이다. “마크롱 사퇴”, “자유와 평등”, “1789, 1968, 2018” 등은 물론 ‘프렉시트’(Frexit)의 구호도 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1968년의 68혁명 정신을 2018년에 이어나감으로써 제3의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이 시위대에 혼재해 있는 것이다.

드물지만 영국의 ‘브렉시트’를 따라 프랑스의 유럽연합 탈퇴를 주장하는 ‘프렉시트’ 주장까지 나오는 형편이다 보니 정치의 나라, 민주주의의 최선진국 프랑스의 면모가 약여(躍如)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기초한 인물 가운데 ‘분노하라’의 저자 슈테판 에셀이 떠오른다. 20대 프랑스 청년들이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을 외면하고 일신의 안녕과 영달에 눈 먼 세태를 통렬하게 공격했던 에셀. 그가 기초한 인권선언과 위배되는 2018년 프랑스는 자발적인 ‘노란조끼’를 대량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양상이다. 정치적인 기본권은 물론이려니와 사회적인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정부에 감연히 맞장뜨는 시민들이라니! 2016∼2017년 비폭력적인 촛불혁명으로 행정권력을 교체한 우리의 위대한 시민의식을 축복하면서 ‘노란조끼’ 시위대의 요구가 조만간 관철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