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규열한동대 교수
▲ 장규열 한동대 교수

2018년 수능의 날이 밝았다. 해마다 어김없이 수능은 전 국민의 관심사이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수능의 기억이 있다. 모두들 수험생이었거나 가족이었거나 선생이었거나. 18년 동안 닦아온 실력을 이 하루 한 판 승부에 거는 일, 수능은 모두에게 버거운 연례행사인 것이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힘겹고 고단하지만, 채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온 인생을 거는 양 긴장이 되고 가슴이 졸인다. 매년 11월이면 치러야 하는 의례처럼 되어 버린 수능이 올해는 어딘가 새롭다.

숙명여고. 나름 전통의 깊이가 느껴지는 그 이름이 이번에는 ‘대학입시제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친구도 밟고 올라서야만 하는 경쟁적 구도 앞에 아버지의 마음마저 비뚤어지게 하고 말았을까. 점수의 유혹 앞에 쌍둥이 딸들은 무너질 수 밖에 없었을까. 오늘같은 대입제도 앞에 저들처럼 흐트러지지 않을 사람은 또 누가 있을까. 상피제도 있으면 도움이 되겠고 철저한 관리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비정한 경쟁과 끝없을 탐심이 스며들 수 밖에 없는 제도와 시스템은 어찌할 것인가. 이 모든 구도를 이대로 두고 사람만 탓해도 되는 것일까. 아빠와 두 딸만 처벌하고 정리하면 대학입시 문제가 사라지는 것일까. 대학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우리 모두의 인성마저 망가뜨리는 괴물이 되어 버렸을까.

대학. 큰 배움이 일어나는 곳. 어른으로 사회를 만나기 전에 생각을 가다듬고 다짐을 만들어내는 곳. 살아가는 의미를 찾고 세상을 바꿀 지혜를 갈고닦는 곳. 한 사람 인간으로 홀로 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실력을 기르는 곳. 좋은 말을 아무리 많이 가져다 붙여도 모자랄만큼 대학의 사명은 가볍지 않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첫걸음마 교육을 맡아 그 책임이 무거웠다면, 공부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학의 사명은 막중하다. 대학은 젊은이들이 사회에서 한 몫을 너끈히 담당할 수 있도록 길러야 하며, 그 교육의 결과로 우리 사회가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런 대학으로 가는 길이 이 나라에서는 왜 이렇게 힘든 과정이 되었을까.

서구에서 대학은 신학과 철학을 중심으로 했던 ‘교회의 대학’에서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인간을 길러내던 ‘국가의 대학’을 거쳐 성공과 이익을 위하여 달리는 ‘기업의 대학’이 되었다. 시카고 대학의 총장이었던 로버트 허친스는 그의 책 ‘미국의 고등교육’에서 대학이 고전과 지성의 공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하버드 대학의 학장이었던 해리 루이스도 오늘날 미국 대학이 ‘교육’을 잃어버렸다고 탄식하면서 대학이 학생들의 지성과 정신을 다듬을 권위를 회복하여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교육을 통하여 개인의 성공과 함께 기업과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는 일을 어찌 나쁘다할 수 있을까. 대학은 새로운 학문과 지식을 전수함으로 우리 사회가 발전적으로 변화하여 가는 데에 반드시 기여하여야 한다. 하지만 경쟁과 성공에 심취한 나머지 인성과 지성, 도덕과 철학을 배우고 나누며 토론하는 일을 멈춘다면 이 땅은 지속적으로 퇴화해 가는 나락에 서게 될 것이다.

오늘 수능을 마주할 청년들에게 한 자락 권하고 싶다. 새롭게 만날 대학의 광장에서 최고의 실력을 갈고닦아 성공하고 발전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하지만 바로 그 성공과 발전의 의미가 내게만 머무르는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건너야 할 험한 계곡이 많고 넘어야 할 높은 산들이 즐비하다.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고 아픈 가슴에 위로가 되는 사람들이 되기 위하여 대학에 가고 성공에 이르기를 바란다. 혹 어른들이 잘못 만들어 놓은 그 무엇을 발견하거든 고치고 바꾸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드는 당신들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하여 대학에도 가고 반드시 성공하길 바란다. 그동안 수능을 위하여 수고 많았다. 앞으로는 세상을 위하여 생각하고 수고하는 여러분이 되길 기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