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칼럼
난해시 혹은 ‘순수한 모름’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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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8.11.08   게재일 2018.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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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둠이 무서운 이유는 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름이 공포일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모름이 우리 앎과 인식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직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앎은 모름의 사막에서 구르는 모래 한 알에 불과하다. 모름의 모든 곳에서 앎은 태동하지만 이 우주가 다할 때까지 우리는 모름을 정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거대한 모름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 모름은 위대한 인간의 앎을 한낱 앎으로 전락시킨다. 공포는 여기에서 배태한다.  
▲ 어둠이 무서운 이유는 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름이 공포일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모름이 우리 앎과 인식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직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앎은 모름의 사막에서 구르는 모래 한 알에 불과하다. 모름의 모든 곳에서 앎은 태동하지만 이 우주가 다할 때까지 우리는 모름을 정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거대한 모름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 모름은 위대한 인간의 앎을 한낱 앎으로 전락시킨다. 공포는 여기에서 배태한다.

△난해시의 난해함

심지어 말라르메는 시를 써놓고 일부러 의미를 알 수 없도록 고쳤다고 한다. 말라르메가 시를 어렵게 쓴 이유, 그러니까 말라르메가 난해시를 쓴 이유는 아마도 모름을 모르는 채로 남겨두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순수한 모름’ 이것은 한 시인의 바람에 그치지 않는다. 많은 시인들은 아무도 해독할 수 없는 난해시를 한 편 남기고 싶어한다. 왜일까? 그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앎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안다고 여길 뿐 온전한 앎일 수는 없다. 예컨대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사랑의 한 국면이거나 일반화된 사랑이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랑의 개념이지 그것이 곧 사랑은 아니다. 규정된 사랑은 특수하고 개별적인 (당신의) 사랑 앞에서 그 효력을 잃고 만다. 사랑은 규정될 수 없다는 공리만을 공유할 뿐 일반화되지 않는다. 사랑과 같이 관념적인 것은 물론 ‘나무’와 같이 구체적인 사물 역시 제대로 알지 못하긴 매한가지다. 우리가 아무리 ‘나무’를 정의하려 해도 그것은 ‘나무’의 한 국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주었던 최초의 철학자는 소크라테스다. 그는 산파술을 통해 우리가 안다고 여기는 것이 앎의 전부가 아님을 역설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정식은 너 자신의 앎이 제대로 된 앎이 아님을 알라는 말로 풀이된다. 이 말은 하이데거에 이르러 ‘그동안 우리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에 대해 논의해왔다’는 선언적 명제로 변주되었다. 그동안 우리가 말해 온 앎은 ‘앎’이 아니라, 결여와 결핍으로 이루어진 ‘앎적인 것’이다.



△치명적인 ‘모름’

어떤 것에 대해 모른다는 말은, 적어도 모르고 있다는 것은 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모른다는 것도 앎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모르려고 하는 모름이 있다. 이것은 매우 의지적이고 의식적이다. 앞세대가 뒷세대에게 보이는 태도가 그렇다. 요즘 유행하는 대중가요를 향해 “그것도 노래냐?”는 물음은 모르려함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조악한 수준과는 다른 메커니즘을 따르는 ‘모르려 함’도 있다. 이러한 모름은 의지보다는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 욕망은 우리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든다. 욕망은 주체의 앎을 모르게 만들고 거기에서 혼자 재미를 본다. 라캉은 이것을 향유(jouissance)라 불렀다. 향유는 주체의 억압기제를 가시화한다. 억압기제는 주체의 욕망을 억압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급소 혹은 치부를 가리기 위해 작동한다. 향유는 주체의 치부를 폭로한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김광규 옮김) 전문



이 시는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를 말한다.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약한 자들의 죽음을 방관하였거나 그러한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 공모했기 때문에 ‘나’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나’, 더 정확히는 나의 욕망은 살아남은 진짜 이유를 알고 있으나 그것을 모르고자 한다. 그 적극적인 은폐 속에서 ‘나’는 병리적인 주체로 구성된다. 그런 점에서 치명적인 치부를 폭로하는 일은 우리를 죽이기보다는 다시 살아가게 만든다. 하여 ‘강한 자’는 진실로 강해져야 한다. 약한 자의 죽음을 똑똑히 기억하고 증언하기 위해서 진실로 강해져야 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강한 자’였다. 그곳에서의 고통스러운 삶을 기어코 증언했던 그는 진실로 강한 자였다. 억압기제는 주체의 치명적인 치부를 드러낸다. 치부는 주체를 죽음으로 내몰기보다는 죽음에 상응하는 전환을 삶 속으로 도입한다.



△‘모름’의 전시

라캉과 지젝은 ‘모르려 함’ 즉 “그 자신을 알지 못하는 앎”에 집중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억압기제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억압을 해소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억압이 무엇인지 아는 데 목적이 있다. 억압을 안다는 것은 인간이 억압되어 있음을 안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억압되지 않은 인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Nihil humani a me alienum puto).” 이것은 마르크스가 좋아했던 경구다. 병리적이지 않은 인간은 없고, 병리적인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치며, 윤리다.

‘모르려 함’에 대한 탐구는 인간에 대한 탐구다. 그러나 순수한 모름,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모름은 인간의 차원도 신의 차원도 물질의 차원도 아닌 절대적 ‘모름’의 차원에 놓여 있다. 과학이 하는 일은 모름을 ‘발견’(discovery)하는 일이다. 발견을 가능케 하는 것이 질문이다. ‘사과는 왜 떨어지는가’, ‘무게는 왜 생기는가’와 같은 물음이 그것이다. 이러한 질문이 주어지면 과학은 기어이 답을 찾아내고야 만다. 모름이 발견되기만 하면, 그 모름을 아는 일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과학은 (오만하게) 말한다.

난해 시 역시 모름을 발견한다. 그렇긴 하지만 과학과 달리 난해시는 모름을 발견하고 그저 전시할 뿐이다. 모름을 ‘전시’한다고 했으나 그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모름이 드러나면 그것은 더 이상 모름일 수 없다. 왜냐하면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일 뿐이어서 ‘어떤 모름이 있다’는 것은 ‘적어도 모른다는 것은 아는 모름’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영원히 모르는 채로 남겨져 있을 때 비로소 순수한 모름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해시는 모름의 전시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난해한 시의 난해함은 어떤 식으로도 이해되지 않은 채 난해함의 자리를 유지한다. 난해한 시는 비어 있기를 바랄 뿐 충만을 꿈꾸지 않는다. 그렇긴 하지만 훌륭한 난해시는, 자신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노력을 완전히 차단하여 접근 불가능한 자리에 스스로를 위치시키지 않는다. 난해시는 해석의 도전을 불러일으키며 그러한 해석이 만족시킬 수 없는 부분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난해한 시는 자신에 대한 해석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해석 스스로가 알게끔 한다. 끊임없는 해석의 도전 속에서도 자신의 난해함을 지속적으로 전시할 수 있는 시, 전시되긴 하지만 결코 해석될 수 없는 시,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해석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도록 만드는 시, 해석의 가능성이 소실점으로만 존재하는 시라면, 난해시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다.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난해시는 바로 이러한 난해함 위에 근거하고 있다. 충만한 앎은 충만하기에 더 이상 알아야 할 것도 알 필요도 없다. 그러나 모름은 우리를 꾀어내어 모름 속을 헤매게 한다. 언젠가 우리는 모름 속을 영원히 떠돌게 될 것이다. 그곳의 다른 이름은 죽음이다. 기실 우리가 죽음 속을 떠도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우리를 떠돈다. 죽음은 우리를 배회하며 우리를 영원히 읽는다. 난해시는 이러한 죽음에 상응한다. 난해시는 자신이 가진 ‘모름’으로 우리의 앎을 감싸 안는다. 죽음이 우리의 삶을 감싸안음으로써 삶의 경계를 분명히 구획짓듯 ‘모름’ 역시 우리의 앎을 덮어준다. 죽음이 이불처럼 우리의 삶을 덮어줄 때 우리가 편히 거할 수 있는 것처럼 모름이 감싸안은 앎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편히 쉴 수 있게 된다. 죽음 속에서 우리의 삶은 지속되고 우리는 삶 속에서 난해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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