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와 老시인 고은

▲ 붉은 기와와 푸른 바다가 조화를 이루는 크로아티아. 하지만 이 나라 현대사의 비극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CF가 보여주는 것보다 멋진 크로아티아, 그러나…

최근 한국의 한 항공사는 새로운 상업광고(Commercial Advertisement)를 만들어 TV에 올렸다. 보석처럼 빛나는 바다와 그 해변 풍경에 고풍스러움을 더하는 성벽, 거기에 아드리아해(海)의 보물 흐바르(Hvar)섬에 몽환적인 꽃을 피운 라벤더를 보여주는 영상이다.

그 CF의 배경은 3~4년 전 30~60대 여성 연예인 몇 명이 단체로 다녀온 여정이 케이블방송 전파를 타면서부터 부쩍 한국인 방문객이 늘어난 나라 크로아티아다.

거기서 보여지는 두브로브니크와 스플리트, 자그레브와 플리트비체를 화이트 와인에 취해 느린 발걸음으로 헤맨 적이 있다. 크로아티아 대부분의 도시는 재론의 여지없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왜 기자에겐 ‘아름다움을 지워내는 어두운 그림자’가 먼저 보였는지 모르겠다.

가파른 산을 깎아 만든 마을의 붉은 지붕이 눈부신 두브로브니크의 푸른 해변. 거기서 떠올린 것은 낭만적인 시(詩)나 소설이 아닌, 노(老)시인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절망적인 문장이었다. 이런 것이다.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 인종과 종교가 야기한 비극을 소리 없이 지켜본 크로아티아의 조각상.
▲ 인종과 종교가 야기한 비극을 소리 없이 지켜본 크로아티아의 조각상.

시인 고은(85)에겐 너나들이로 지내던 선배 시인 신동문(1928∼1993)이 있었다. 1960년대 어느 날. 신동문의 어머니가 죽었다. 당시는 선후배나 친구 모친의 죽음을 자신의 일처럼 슬퍼했던 시대였다. 당연지사 많은 문우(文友)들이 신동문의 상가를 향했다.

충청도의 어느 호숫가 조용한 마을. 동료들과 어머니를 잃은 신동문의 슬픔을 함께 나누던 고은은 만취한 채 홀로 밤거리로 나선다. 거기서 시인은 본다.

‘죽음을 껴안는 삶’과 ‘무엇으로도 덮을 수 없는 인간의 슬픔’을. 어떤 방법으로는 비껴갈 수 없는 ‘길’과 그 길에 쌓이는 차가운 ‘눈’, 거기에서 돈오(頓悟·갑작스런 깨달음)로 발견한 ‘삶의 본질’을 목도한 시인은 이렇게 절규한다.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길“ 바라지만,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고.

그랬다. 시인 고은이 새하얗게 눈 내린 아름다운 충청도 시골마을에서 죽음의 습한 그림자를 목격했듯, 크로아티아의 현대사와 그 역사를 비극으로 만든 요소인 ‘인종’와 ‘종교’가 가진 그림자를 본 사람이라면 두브로브니크의 푸른 바다와 흐바르 섬의 보랏빛 꽃밭을 마냥 낭만적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는 법.
 

▲ 끔찍한 역사적 비극을 겪었지만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친절하고 상냥하다.
▲ 끔찍한 역사적 비극을 겪었지만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친절하고 상냥하다.

삶과 죽음, 희극과 비극은 멀리 있지 않다

흐바르 섬에 머물렀던 사흘. 싱싱한 도미를 구워 저녁으로 먹고 라벤더가 핀다는 어두운 꽃길을 산책하고 돌아온 밤이었다. 기자는 아래와 같은 졸시를 썼다.

신(神)들만 알지 못한다

눈이 시린 아드리아 물결 아래로

비극의 그림자가 검게 일렁였다

쪽빛 비키니의 소녀들은 꽃을 흔들고

그을린 피부의 소년은 이방인에게 조개를 건네는데

붉은 기와와 짝을 이룬 푸른 바다는

아름다움에 둔감한 이들마저 입 벌리게 만들고

누구나 행복해져 먼 나라 라틴의 춤을 추는데

민박집 아저씨는 밤마다 술추렴이다

“나는 아이들 여덟 명을 죽였다”

멀지 않은 시간의 저편

화해하지 못한 종교와 인종에 불이 붙었다

팔열지옥이 그들을 스쳐갔다

화염의 거리에서 어제의 이웃을 도륙한 이들

도그마는 행위에 면죄부를 줄 수 있을까

아들을 제 손으로 묻고 견딜 수 없는 증오에

광기의 총을 들었으나

죽음으론 죽음을 덮을 수 없는 법

아들보다 제가 죽인 아이 얼굴이 더 자주 떠올랐다

어두움 내린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안다

이 도시는 학살된 이웃의 피로 붉다는 걸

아무것도 모른 척 춤추는 처녀와

하얀 포말 일으키며 바다를 가르는 소년

그들도 안다

모르는 건 그들이 섬기는 신뿐이다.

 

▲ 크로아티아에서 몬테네그로로 가는 길에 만난 아름다운 마을.
▲ 크로아티아에서 몬테네그로로 가는 길에 만난 아름다운 마을.

사실 크로아티아는 다른 발칸반도 국가와 함께 불과 20여 년 전 지독한 비극을 겪은 나라다. 수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인종’과 ‘종교’라는 해묵은 도그마 탓에. 1990년대 초반. 소련 연방이 붕괴한 후 유고슬라비아(크로아티아가 포함됐던 연방) 군대가 들불처럼 타오르던 독립국가의 열망을 진압하기 위해 크로아티아로 들어왔다. 탱크를 앞세우고.

종교적으론 세르비아 정교와 가톨릭·이슬람으로, 인종적으론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 등으로 갈라져 있던 국민들은 어제 밥을 나누어 먹던 이웃을 종교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죽였다. 그것도 말과 글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잔인한 방식으로.

적지 않은 문학작품과 영화로 만들어진 이 ‘처참함의 역사’를 다시 입에 올리는 건 두려운 일이다. 관련된 소설과 드라마를 찾아보라고 말하기도 저어될 정도다. 어쨌건 발칸반도는 이제 민족의 분포에 따라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등으로 분리·독립했다. 겉으로 보기엔 평화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나 종교와 인종이 야기한 비극의 불씨가 발칸반도에선 온전히 꺼진 것일까? 이 질문에 시원스럽고 명확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름다움 속에 내재한 고통, 웃음 속에 숨겨진 눈물을 피해갈 수 없는 인간. 크로아티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류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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