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강동 경희대 병원에 다녀 온 후 나는 무크지 ‘소설’ 첫 번째 권에 실린 그의 소설 ‘고독 공포를 줄여주는 전기의자’를 다시 펴보았다.

이 이야기는 사형수들이 앉는 ‘전기의자’를 종이로 제작한 설치미술가의 내면을 그린 것이었고, 이야기 속에서 이 주인공은 마침 암에 걸려 있었다.

원래 사형 집행용 전기의자는 발명가로 널이 알려진 토머스 에디슨이 처음 만들었다 한다. 그런데 이야기 속에서 조각가 ‘박원주’는 이른바 고독 공포를 줄여줄 수 있는, 종이로 만든 ‘더블’ 전기의자를 만들어낸다. 일종의 설치 미술 작품이다.

왜 전기의자를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쌍으로, 또 그것도 종이로 만들었어야 했을까. 전기의자는 죽음에 이르는 매체, 그러나 사형수 말고도 우리 모두가 사실은 인생의 한정된 시간 속에서 잠시 떠있다 가라앉게 된다. 이 죽음으로 가는 삶의 여행에 전기의자가 하나 아니라 둘이라는 사실은 근본적 고독에 대한 진통제, 모르핀 처방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의자가 종이로 만들어져 있다면 우리는 이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전기의자’ 곧 죽음으로 가는 매체의 위력을 보다 잘 경감시킬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이 전기의자 설치 미술 작품은 최옥정 작가가 문학적인 상상으로 만들어 내기 전에 먼저 그것을 고안한 조각가가 있었다고도 한다. 그것이 이 소설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은 될 수 없다. 설치미술과 문학 사이에는 엄연한 장르상 차이가 있고 때문에

이 문제는 일종의 ‘상호텍스트성’ 범주 안에서 다루어져야 할 주제가 된다. 최옥정씨는 이 ‘고독 공포를 줄여주는 전기의자’를 지난 해 연말에 출간된 문학 무크지 ‘소설’ 2호에 실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 이미 무거운 병이 재발하여 마지막 고비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무서운 통증과 싸우며 소설을 썼다. 지난 봄 3월 26일의 사진들이 그의 아름다운 삶을 담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이 날 세계일보 기자 조용호 작가, 이평재 작가, 한겨레의 최재봉 기자 등이 함께 지리산 아래 최옥정 작가의 오두막에 봄맞이를 갔었다. 박남준 시인이 동행해서 함께 남은 사진들은 생명을 가진 존재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문학 작품 현대 한국 소설은 뜨거운 삶의 문학이다. 오늘의 한국문학은 죽음을 모른다. 죽음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최옥정 작가는 투병 생활을 하면서 그 문학이 더욱 깊어졌고, ‘매창’에 이어 ‘고독 공포를 줄여주는 전기의자’에 다다라 삶에 대하여 죽음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지난달 13일 목요일 새벽 6시 30분에 최 작가는 불과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요일이 발인이었는데, 그날은 그녀가 세상에 온 생일날이었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