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진흥원 웹진담 8월호
대동강 뱃놀이·냉면집 등
볼만한 명소 곳곳에 산재

▲ 해동지도 평양부.

[안동] 조선시대 평양은 어떤 모습이었고, 명소는 어디가 있었을까?

한국국학진흥원이 조선시대 평양의 이야기를 다룬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 8월호를 펴냈다.

웹진 담에 따르면 조선시대 평양은 중국 사신들이 한양에 왕래하면서 잠시 쉬어가던 곳이었기에 둘러 볼만한 명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대동문을 지나 대동강 가의 연광정, 부벽루와 북성 일대, 대동강 뱃놀이, 애련당의 호젓한 정취 등이 그것이다.

조선시대 연광정이나 부벽루 같은 전각에서는 기생들의 춤과 노래를 즐기는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관료 권벌이 1539년(중종 34) 7월 17일부터 12월 16일까지 연경에 다녀오면서 남긴 ‘조천록(朝天錄)’에는 이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그 당시 전국의 기생 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평양으로 모여들었다. 평안감사는 가장 좋은 관직으로 손꼽혔다. 이는 평안도와 함경도의 조세가 중앙으로 상납되지 않고 관향곡이라 해 지방에 비축해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평안감사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넉넉한 비용을 쓸 수 있었다. 즉, 평양은 권력과 돈이 모이는 곳이었기에 전국 최고의 기생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안동 지역에 살았던 선인들의 기록에 평양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언급하고 있다.

첫째는 단군과 기자, 동명의 도읍지로서의 평양이다. 1325년(충숙왕 12년) 평양에 기자 사당이 세워졌고, 1356년(공민왕 5년)에 이를 중수한 것은 고려 후기 주자학이 수용됨에 따라 유교문화의 시원으로서 기자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 조선말 평양의 냉면집 모습.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 조선말 평양의 냉면집 모습.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둘째는 대동강의 수려한 경관을 배경으로 평안감사가 주최한 화려한 잔치와 풍류에 관한 기록이다. 조선시대 평안도 지역은 중국과 접경 수비를 위해 공물과 부역 등 세수를 중앙으로 모으지 않고 자체적으로 운영했고, 조선후기에는 상공업이 발달해 다른 지역에 비해 물산이 풍부했다. 이에 평양감사의 위상과 권한 또한 높았다.

셋째는 임진왜란 때 평양성 탈환과 관련한 기록이다. 이외에도 평양의 유생이 조선의 최고 학자 퇴계 선생의 흔적을 찾아 안동 도산서원에 왔다는 기록 등이 있다.

웹진 담 8월호의 편집장을 맡은 천준아 작가는 “한반도 평화 시대, 서울과 평양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그날이 머지 않았다고 기대하는 이들이 많은 요즘 ‘조선시대 평양’으로 피서를 떠나보면 어떨까 하는 심정으로 기획했다“고 밝혔다.

/손병현기자 why@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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