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즐겨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즐겨라.
▲ 즐겨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즐겨라.

1.
이 말을 처음 들었었던 건 훈련소에서였다. 각개전투, 유격, 화생방 이런 힘든 훈련 앞에 조교들은 이 말을 붙이길 좋아했다. 이 말은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음험하다. 이 말은 즐기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강요하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다.

피할 수 없다니? 무얼 말인가? 군대를 말이다. 군대에 들어온 이상 군대의 명령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는 협박에 다름 아니다. 이 말은 반항을 쓸데 없고 쓸모 없는 것으로 규정 지어 저항의 싹을 잘라버리고 체념할 것을 종용한다. 이제 ‘까라면 까’야 한다. 이 말은, 나치가 유대인에게 저지른 만행들,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광주민주화운동에서 공수부대원들이 보였던 행동마저 가능하도록 만든다. 하여 이 말은 참을 수 있는 것도 참고, 참을 수 없는 것마저도 참아 내게 만드는 불길한 주문이다.

2.
사실 우리는 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려 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한낱 사람이니까. 피하지 못하는 상황들은 얼마든지 많다. 아이들은 12년 동안 학교에서 사육된다. 시험을 보고 그 점수에 따라 미래를 결정당한다. 이런 시험을 거부하고 학교를 뛰쳐 나올 수는 있다. 하지만 그뒤 사회에 편입하려면 그 벽은 높다. 말이 좋아 저항이지 저항이 그리 쉽지 만은 않다. 회사가 싫으면 그만두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 다음은 어쩔 건가? 비빌 언덕도 없는 저항은 처자식을 굶기기 알맞다. 그러니 조금 비겁하더라도 보다 현실적인 말을 하기로 하자. 우리는 언제 즐길 수 있는가?

3.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부의 평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잘 살아야 한다는 환상을 깨뜨리는데 목적이 있다. 꼭 잘 살지 않더라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면 굳이 잘 살려고 아둥바둥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복지를 하자는 거다. 잘 살고 싶은 사람은 잘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되, 번 만큼 세금을 내라는 거다. 못 사는 사람은 복지혜택을 받으면서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자아를 실현해 나가자는 얘기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사회는 이런 상황 속에서 가능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에 더 가깝지 않은가. 적어도 즐기려면 어느 정도의 여건은 갖추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4.
즐기기 위해서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럴려면 잘 해야 한다. 완전히 능숙해질 때 비로소 잘 할 수 있고, 그 때 비로소 진짜 잘 할 수 있다. 언젠가 ‘히든싱어’(2014년 1월)에 휘성을 흉내내는 김진호가 등장한 적이 있었다. 김진호는 완벽하게 휘성을 소화해냈고 그에게서 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른 모창자들이 틀리지 않기 위해 조바심칠 때, 휘성하고 똑같이 소리를 내려고 애쓸 때, 김진호는 노래에 심취했다. 이 정도 능력이면 즐길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모창이라는 제약 속에 갇혀 있고 거기를 벗어나면 탈락하지만, 김진호는 그 제약을 벗어나지 않고서도 그 제약을 벗어나는 이상한 장면을 연출했다. 중학교 때부터 휘성 모창을 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그의 몸에는 휘성이 체화되어 있다. 모창이라는 형식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충족시키면서도 그는 그 상황을 즐겼던 것. 따라서 즐기길 원한다면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여유란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만큼 능숙해질 때 가능하다.

5.
당연히 연습을 하면 능숙해질 수 있다. 사격은 연습하면 할수록 명중률이 높아진다. 연습의 속성은 그렇다. 하지만 능숙해 질 수 없는 것도 있다. 화생방 훈련을 화생방 연습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연습이라는 성질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연습은 축적되지만 훈련은 축적되지 않는다. 최루탄 가스에 능숙해질 수는 없다. “매에 장사 없다”는 말 역시 그것이 연습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영화 “본 아이덴티티”의 제임스 본은 훈련을 통해 훈련 불가능한 것까지 경험화한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어떤 약물이 투입되어 감각신경을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축적이 불가능한 훈련을 통해서 능숙해지라고 강요한다. 즉 이 시대는 감각신경을 마비시키라고 명령하고 있다. 감각을 마비시키면 우리는 잔인해질 수 있고, 사람을 짓밟고 올라갈 수 있다. 하여 측은지심, 수오지심 따위의 기본적인 윤리적 감각조차 없는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때 죽어라 연습하면 되는 시대가 있었다. 그렇게 하면 대가 소리를 듣거나 일가를 이룰 수 있는 시대가 있었다. 과거에 말이다. 그런 시대에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 우대를 받았다. 노인은 공경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죽어라 연습하는 사이 세상이 변한다.

하나의 직장에서 평생 밥을 벌어먹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평균적으로 한 사람이 세 번 정도는 직업을 바꿔내야만 ‘자연사’할 수 있는 세상이다. 이러한 시대에 자신의 경험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듯 말하는 사람을 전문용어로 ‘꼰대’라 부른다. 그러니 당신의 잘난 경험에 기대고 있는 조언이니, 자기계발이니, 힐링이니, 상담이니 하는 말들은 개에게나 줘버려라.

6.
맹자는 활 쏘기에 대해서 말하면서 활쏘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활 시위를 당기는 일이라 했다. 활이 과녁에 맞고 안 맞고, 활로 출세를 하고 안 하고는 활쏘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목적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즐길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목적에 구애받지 않는 방법, 그것은 오로지 과정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지금-여기를 사는 일이기도 하다.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7.
조지 오웰은 ‘1984’에서 “‘무산계급’은 의식을 가질 때까지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반란을 일으키게 될 때까지는 의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민음사, 100면).”라고 썼다. 의식을 가지기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하며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의식이 없다면 혁명이 없고, 혁명이 없다면 의식이 없다. 이 무한한 악순환의 고리 속에 놓여있다. 즉 우리는 현재의 상황을 더 낫게 만들 수 없다. 그러니 즐길 수 없다.

그런데 즐길 수도 있다. ‘피하지 못하면 즐겨라’는 말은 지금의 상황보다 더 나아질 수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기만 하면 가능해진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가 지옥이다. 사실 이 세계가 한 번도 지옥 아니었던 때는 없었다. 그러니 이 지옥을 벗어나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이제 즐겨라.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여기에서 즐길 수 있다. 나아지리라는 부담을 던져버리고 오직 즐기기 위해서 즐겨라. 이 세계를 벗어나려고 아둥바둥 살아내려 애쓰지 말고 이 지옥을 즐겨라. 적극적 허무, 긍정적 허무는 지옥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가능해진다. 이 희망 없음 속에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