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의호포스텍 명예교수·DGIST 총장특보
▲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DGIST 총장특보

요즘 자료정리로 날을 새우고 있다. 28년간의 포항 생활, 그리고 포스텍 교수 생활동안 쌓인 자료가 100 박스도 넘게 나왔다. 포스텍 교수 아파트에서 유강으로 주택을 옮기면서 100박스의 자료를 모두 옮겼다. 아파트에 전부 넣을 수가 없어서 복도에도 쌓아놓아 인근 주민들을 불편하게 하는게 미안하다.

거기에는 90년대부터 포항시 도시계획위원회, 환동해연구회, 포항상의 경제센터 등에 참여하면서 보관한 자료들, 각종학회 및 연구실 활동, 포스텍에서 각종 행정 보직을 하면서 쌓아온 자료들이 쌓여있다. 자료를 버리지 않는 성격으로 인해 희귀자료 사진들도 많다. 주위에서는 어떻게 그런 자료까지 가지고 있는가 하고 놀란다. 그런데 이러한 자료를 분류하고 정리하는 이유는 이 자료들을 포항시, 상의, 학회, 포스텍 등으로 기증하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포항시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건물들이 하나둘 부서지는 것을 보면서 과연 이러한 자료를 제공한다고 하여도 가치있게 보관될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그간 소중히 보관해 왔던 이러한 자료들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지? 그건 꼭 포항시만의 문제가 아닐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문제이다. 이 문제는 그 이유가 어떻든간에 우리 사회의 자료경시의 문제와 연결된다. 건물은 부수어 새로운 건물들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과거 자료는 오히려 나중에 부담이 될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자료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관습적 행태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필자가 졸업한 카이스트에서 최근 학교설립 47주년 기념식에 “47인의 역사”를 모았다. 필자도 참여하였고 자료를 제공하였다. 카이스트는 아카이브(Archive·자료 보관실)를 설치하고 과거 자료를 축적하고 있다. 설립기념일날 참석해 보니 47인의 역사를 전시하고 자료를 소중하게 간직한다는 선언이 아주 감명있게 다가왔다. 카이스트의 결정과 향후 자료 보관 방향에 큰 박수를 치고 싶다.

역사적 자료들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향후 정책 방향에 참고가 되어야 하고 과거 역사 자체로 보관되어야 한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전 대통령 통치에 대한 상세한 상황을 밝혀줄 자료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차기 정권이 청와대에 입성한 후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는 것으로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물리적인 자료뿐만 아니라 컴퓨터내의 기록도 없애는 경우도 많다.

각종 자료나 문건들을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하기 전에 유불리를 따져서 폐기를 결정한다. 대통령 임기가 끝난 뒤 청와대 자료는 보존 가치가 있으면 대통령 기록물로 지정된다. 그러나 보존가치는 전 정권의 통치행위에 대한 유불리로 결정된다. 청와대 기록은 정치적인 이슈이지만 일반 부처들도 비슷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불리한 기록을 폐기처분하고 차기정권에 이양하지 않는다.

습관적인 자료경시는 우리 사회의 큰 문제이다. 조크같은 이야기지만 필자가 28년간 지도교수를 했던 포스텍 테니스 클럽에도 매년 거행되는 주요 경기의 자료라든가 심지어 역대 회장의 자료도 보관되어 있지 않다. 지도교수로서 수차례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여전히 클럽의 과거자료는 보관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기록경시, 자료경시, 역사 경시, 어떤 이유에서든 자료폐기 등은 반드시 고쳐져야 할, 요즘 유행하는 말로 적폐이다.

적폐는 청산되어야 한다면 이것부터 청산되었으면 한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