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은주<br /><br />방송작가
▲ 김은주 방송작가

올해 고등학생이 되는 큰 아이의 아이돌 사랑은 남다르다. 얼마 전에 콘서트에 간다고 수천대 일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광 클릭으로 티켓을 사수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탁월한 능력을 자화자찬하며, 엄마인 나에게 칭찬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우와 정말 대단하다”는 엄마의 영혼 없는 멘트에도 아이는 연신 싱글벙글 이었다. 하지만 이어서 “그런데 고등학생 되는데 아이돌 따라다니는 건 좀 그렇지 않나?”라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는 응수하였다. “엄마, 엄마도 이문세 아저씨 좋아하잖아?·

내가 큰 아이 나이 때, 중 3때로 기억한다. 동지여중을 다녔던 나는 버스를 타고 예전에 경북서림 앞에서 내려 시내 우체국을 지나 용흥 고가 근처에 있던 동지여중까지 걸어서 등교를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지금은 사라진 우체국 앞 레코드 가게에서 이문세의 `사랑이 지나가면`의 전주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16살 아이는 아름다운 멜로디의 전주에 끌려 레코드 가게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한참을 거기에 서서 그 노래를 듣고 서 있었다. 일분일초를 다투는 등교 시간에 말이다. 그날 이후 나는 이문세 마굿간 팬클럽이 되었다. 문구점에 가서 그의 사진을 사서 책받침으로 코팅을 하고 4집부터 팬이 된 나는 1, 2, 3 집 테이프를 모두 구입해 이문세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나는 이렇게 얼굴 긴 사위는 안본데이” 하지만 남편은 이문세씨와 비슷하게 얼굴이 길다. 운명이다 생각하고 산다. 팬클럽이 된 나는 팬레터까지 쓰게 되었다. 내용 전체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런 내용은 분명히 들어 있었다. “제가 나중에 더 크면, 문세 오빠네 가정부라도 할게요.” 이정도면 지금의 사생 팬들과 버금가는 수준 아니겠는가? 인정한다.

내가 중고등학생이었을 때 포항에서 가수들의 콘서트를 보기도 어려웠고,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콘서트 장을 가겠다는 생각조차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가끔 방송국에서 하는 공개 방송은 문화의 불모지에 살았던 지역 소녀에겐 오아시스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신촌블루스와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현식씨가 출연한 별밤 공개방송이 있었다. 그때 당시 여성, 여고생들을 가리지 않는 인신매매가 성행했었다. 여고 앞에 봉고차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태워서 인신매매를 해 성매매 업소가 있는 섬 등지로 데리고 갔던 시절이었다. 나는 친구 2명과 함께 공개 방송이 열리는 효자 아트홀로 갔고, 간암 투병 중이었던 김현식씨는 항암치료로 머리에 붕대까지 감고 노래를 하는 투혼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공연이 길어질수록 막차 시간은 다가왔고,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김현식씨를 향해 아쉬움을 가득 담은 채 손을 흔들며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저녁 늦게 까지 오지 않는 딸을 걱정한 우리 집은 난리가 났다. 연락을 하지 않고 어딜 가지 않았던 모범적인 딸이 밤늦도록 오지 않자, 경찰에 신고를 하고, 급기야 인신매매에 잡혀갔다고 결론을 내리던 찰나에 포항시외버스터미널 앞 공중전화 박스에서 뒤늦게 연락을 한 딸의 전화에 목을 놓아 울었던 우리 엄마 음성이 아직도 생생하다. 또 다른 우연은 그로부터 15년이 지나 방송작가로 처음 시작했을 때, 나와 처음 같이 일했던 피디가 그때 김현식씨가 출연했던 별밤의 담당 피디이었다는 사실이다. 우연 치고는 대단한 우연 아닌가?

그리고 며칠 전엔 이문세 콘서트를 보기 위해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대구로 갔었다. 우리에겐 이문세 콘서트는 꿈 많던 여고시절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2시간 반 동안 진행된 콘서트에서 나온 노래를 전부 다 따라하며, 손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누군가의 팬으로 30년 넘게 살아간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지금껏 바쁘게 살아온 내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해 준 그 시간이 새삼 따뜻하게 다가와 행복하다. 그리고 딸에게도 30년 넘게 팬으로 살아갈 수 있는 누군가가 함께 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