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 순교와 불교왕국의 태동 (2)

▲ 경주에서 출토된 얼굴무늬수막새(人面文圓瓦當). `신라인의 미소`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법흥왕과 이차돈이 살던 시대 신라 사람들은 이렇게 웃었을 것이다.

법흥왕이 왕위에 오른 지 14년째 되던 527년.

21세의 젊은 청년 하나가 왕이 보는 앞에서 목이 잘려 죽는다.

그의 이름은 이차돈.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고, 불국정토(佛國淨土)로 번성하기를 바랐던 이차돈의 죽음 뒤에는 대의와 명분이 있었다.

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지적했듯 법흥왕은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폭군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이다. 그는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온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둘 중 한 사람은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요절(夭折)이라는 비극을 맞을 수밖에 없었을까? 누구라도 궁금증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신라사를 연구해온 사학계의 일부 학자들은 “반불교 세력인 귀족들을 제압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법흥왕이 이차돈을 희생양으로 선택한 것”이란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은 가설이다.

반면 불교·구도소설 `만다라`의 작가이자 1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승려생활을 경험했기에 누구보다 불교와 불교사에 대해 해박한 원로소설가 김성동(70)은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이차돈의 순교에는 쉽게 해석될 수 없는 함의(含意)가 담겼다”고 했다.

김 작가는 “단순한 역사해석은 오류를 동반할 수 있다”고도 말했다.

“법흥왕과 이차돈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차돈은 나이와 상관없이 영특하고 굳센 의지를 지닌 사람이었다. 법흥왕 또한 세상사와 사물의 겉만이 아닌 내부까지 들여다본 혜안을 지닌 왕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차돈의 순교`라는 사건은 서로를 신뢰하던 이차돈과 법흥왕의 밀약(密約)에서 생겨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 이어진 김성동의 부연이다.

현재도 역사학계에선 앞서 언급한 두 가지의 견해가 대립하며 충돌하고 있다. 이차돈과 법흥왕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두 견해 중 어떤 것에 더 무게가 실릴 수 있는지를 가늠해보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 스물한 살이란 젊은 나이에 신라의 불교 공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렸다고 전해지는 이차돈. 명민함이 엿보이는 눈빛과 의젓한 풍모로 그의 모습을 그렸다.
▲ 스물한 살이란 젊은 나이에 신라의 불교 공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렸다고 전해지는 이차돈. 명민함이 엿보이는 눈빛과 의젓한 풍모로 그의 모습을 그렸다.

▲ 신념을 위해 자신을 버린 홍안(紅顔)의 청년

506년에 지증왕의 생부 습보갈문왕의 후예로 태어난 이차돈은 박염촉(朴厭觸) 또는, 거차돈(居次頓)으로도 불린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신라 최초의 불교 순교자다.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의 책을 통해 추측할 수 있는 이차돈은 올곧은 성정과 예의 바른 행실의 소년이었다.

고대가 아닌 현대에 들어서도 그의 풍모는 책을 통해 묘사된다. 춘원 이광수의 역사소설 `이차돈의 사(死)` 한 부분을 인용해보자.

“이차돈은 통상의 무장(武將)들처럼 기골이 장대하고 부리부리한 눈과 큰 목소리를 가지지 않았다.

이차돈은 미목(眉目)이 청수하여 여자같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무장에게 필요한 억센 생각이 적고 자비심이 많아서 전장에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야 하는 일에 어울리지 않았다.”

여러 역사서와 이광수의 소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듯 이차돈은 외유내강형의 인물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불교를 자신의 종교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시는 신라가 국법으로 불교가 허용하지 않고 있었던 시기.

이에 이차돈은 불교에 대한 믿음이 단단했던 법흥왕을 설득해 순교를 먼저 청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물한 살 홍안의 청년이 자신의 나라를 불교왕국으로 자리매김 시키기 위해 세상 무엇보다 귀한 목숨을 내놓은 것이다.

귀족과 토호들의 이권 다툼으로 혼란스럽던 당대의 신라를 걱정한 젊은 이차돈의 우국충정은 오늘날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

순교의 아침. 자신을 걱정하는 법흥왕에게 이차돈은 “오늘 내가 죽어 내일 불국토의 아침이 밝아오고, 임금과 백성이 편안해진다면 어찌 내 한 목숨을 아낄 것입니까?”라고 되물었다 한다.

이 정도면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결기다.

역사적 기록은 물론, 명망 높은 작가가 상상력에 근거해 쓴 문학작품에서도 이차돈은 한결같이 `의지와 신념이 누구보다 굳셌던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마치 똑같은 스물한 살 나이에 `몬카타 병영`을 습격함으로써 쿠바혁명의 불길 속으로 두려움 없이 뛰어든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1932~1959)처럼.

 

▲ 법흥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신라가 불국토로 가는 길을 열었던 사람으로 평가된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뇌하고 있는 모습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표현했다. <br /><br /><br /><br />/삽화 이건욱
▲ 법흥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신라가 불국토로 가는 길을 열었던 사람으로 평가된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뇌하고 있는 모습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표현했다. /삽화 이건욱

▲ 불교를 공인하고 화랑의 기틀을 닦다

지증왕(신라 22대 왕·재위 500~514)의 장남으로 태어난 법흥왕은 중국식 시호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왕으로도 유명하다.

법흥왕 이전 신라의 왕들은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불렸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민간신앙의 전통이 강했고, 귀족들의 권력이 왕의 지위를 위협할 정도로 컸던 법흥왕 당시의 신라. 그랬기에 `왕권 강화`는 법흥왕의 가장 중차대한 당면과제였다.

당시 법흥왕이 겪어야했던 고충과 스트레스는 한양대학교 이도흠 교수의 논문 `이차돈의 가계와 신라의 불교 수용` 아래 대목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모든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교시를 내리고, 왕위를 내놓고 스님이 될 정도로 불심이 깊었던 법흥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 14년 동안이나 불교를 공인하지 못한 것은 주지하듯 귀족의 반대 때문이었다.”

`삼국사기`는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해 백성을 크게 사랑했다”고 법흥왕을 평가하고 있다.

이는 법흥왕이 누군가의 죽음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했던 사람은 아니라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어쨌건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를 신라의 종교로 세울 수 있었던 법흥왕은 자신이 통치하던 시기에 젊은 인재를 양성했던 조직 `화랑(花郞)`의 기틀까지 닦을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세명대학교 이창식 교수의 논문 `이차돈 유산 가치와 현대적 계승`에는 법흥왕의 말년이 짤막하게 언급돼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차돈의 순교 후)불교는 왕실의 초월적인 권위를 나타내는데 적극적으로 이용되었고, 법흥왕과 왕비는 만년에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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