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불가리아 ①

▲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를 상징하는 건물인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

`모스크와 케밥(kebab)의 도시`로 불리는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밤 11시에 출발하는 야간 국제열차를 타고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를 향했다.

야식으로 챙긴 소시지와 샌드위치를 안주 삼아 마신 포도주 한 병에 기차여행의 즐거움은 배가됐다.

그러나, 여행자가 늘 즐거울 수만은 없는 법. 갑작스런 2번의 여권 검사 탓에 좋았던 기분을 망쳤다.

터키-불가리아 국경을 넘은 건 안개 낀 새벽이었다. 불가리아 국경경찰인지 세관원인지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제복 입은 여성이 잠든 기자를 조심성 없이 툭툭 쳤다. 억지로 눈을 뜨니 웃음기 하나 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묻는다.

“어디 가세요?”

“저요? 이거 불가리아행 열차잖아요. 소피아에 갑니다.”

“왜요(Why)?”

아니, `왜요`라니.

이런 불친절한 검문 방식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다. 바로 며칠 전까지 이란과 터키 국경에서 환하게 미소 짓던 친절한 경찰과 세관원을 만나온 터라 더 기분이 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긴 내 나라가 아닌 외국.

화를 내서 좋을 게 없다. 상황만 악화될 뿐이다. 발끈하는 감정을 얼굴에서 숨기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점잖게 대꾸했다.

▲ 레닌 동상이 내려진 자리에 세워진 소피아 여신상.
▲ 레닌 동상이 내려진 자리에 세워진 소피아 여신상.

“소피아가 멋진 도시라고 해서 놀러 가는데요.”

기자의 대답엔 일언반구의 응대도 없이, 쌀쌀한 표정으로 여권을 돌려주며 제 볼일 다 봤다는 식으로 휙 돌아 기차 침대칸을 빠져나가는 불가리아 경찰(또는 세관원).

3시간 후쯤엔 비슷한 상황이 다시 반복됐다. 막 동이 틀 무렵이었고, 또 억지로 잠에서 깨어야 했다.

이번엔 제복 입은 남성이었다. 그 역시 기계로 만든 로봇처럼 표정이 전혀 없었고, 던진 질문 역시 앞 상황과 맞추기라도 한 듯 똑같았다.

“어디 가세요?”

“왜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권위적인 사회주의 독재 속에서 오래 살아온 탓인지, 불가리아 사람들의 첫인상은 차갑고 사무적이며 시니컬했다. 친절과 따스함을 느끼기가 쉽지 않았다.

▲ 소피아엔 사회주의적 색채가 느껴지는 동상이 흔하다.
▲ 소피아엔 사회주의적 색채가 느껴지는 동상이 흔하다.
길을 물으면 관광객의 손목을 끌고 목적지까지 바래다주는 터키와 이란 사람들 같은 호의적인 태도를 소피아에선 기대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한국에서 본 TV 광고처럼 요구르트가 맛있지도 않았다.

입국 때부터 기분이 상해있어서였을 것이다. 소피아에서의 보낸 3박 4일은 기대만큼 즐겁지 못했다.

도심 한가운데 칼로 두부를 자른 듯 직각으로 서 있는 웅장한 건물들까지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대부분 독재정권 시절 축조된 관공서로 짐작되는 것들이기에 그랬다.

소피아 중심가를 피해 사람들의 표정에 웃음이 조금은 녹아있는 재래시장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1kg에 1유로(약 1천200원)도 하지 않는 크고 달콤한 분홍빛 체리가 우중충한 기자의 기분을 아주 조금 달래주곤 했다.

▲ 조그만 정교회성당에서 홀로 들은 노래

그러던 그 나흘 중 어떤 하루였다. 소피아 변두리를 어슬렁거리던 기자는 무슨 마음에선지 불가리아 정교회성당엘 들어가게 됐다.

시내 중심가에 지어진 이름난 성당에 비하면, 작고 낡고 보잘 것 없는 곳이었다. 실내는 어둡고 눅눅해 어디선가 곰팡이 냄새가 풍겨올 것만 같았다.

그 흔한 성화(聖畵) 한 점 걸려있지 않은 소박한 성당.

▲ 화려하게 장식된 트램이 불가리아 거리를 오가고 있다.
▲ 화려하게 장식된 트램이 불가리아 거리를 오가고 있다.
뭘 해야 할지 모를 어색하고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때, 신부인지 수사인지 모를 한 사내가 온몸을 휘감은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서 흔들리는 조그만 향갑(香匣)이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게 불가리아 정교회의 성가(聖歌)였는지, 일종의 기도양식이었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웅얼거림에 가까웠던 음률은 어제 들은 듯 귓가에 선명하다.

노래는 장엄하면서도 평화로웠다.

신부 혹은, 수사의 노래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긴 나무 의자에 얌전히 앉아 귀와 마음을 동시에 열었다.

당시의 평안했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웅얼거리는 노래가 끝난 후 그가 보일 듯 말듯 한 작은 미소를 보냈다. 그 잔잔한 웃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모았다.

기도하는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기자는 40년 넘게 무신론자로 살아온 사람인데.

▲`소피아 여신상`을 지나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으로

아주 드물게 겪은 종교적 공간에서의 체험은 불가리아 사람들의 종교에 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소피아엔 이슬람 성당이 적지 않다. 또한, 불가리아 사람들 대부분이 믿는 정교회의 교당도 많다. 거기에 적은 수지만 가톨릭교회도 있다.

▲ 소피아의 재래시장.
▲ 소피아의 재래시장.
꽤 긴 시간 종교를 의도적으로 부정하는 사회주의국가에서 살아온 불가리아 사람들. 그들에게 신(神)과 종교는 어떤 의미였을까?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때 기자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 소피아 여신상이었다.

1990년대 초반. 여신상이 서있던 자리엔 러시아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1870~1924)의 동상이 자리했었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자리에 들어선 신의 형상. 무언가 의미하는 바가 커보였다.

결국 인간이 마지막에 기댈 곳은 사상이 아니라 신이라는 뜻일까?

무신론자인 기자의 심사가 복잡해졌다. 생각은 촉수를 뻗어 신과 종교에 관한 본질적인 물음으로 다가갔다. 저 멀리 거대한 알렉산더 네프스키 성당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당의 황금빛 지붕이 저녁 햇살을 받아 묘한 색채로 빛났다.

그 아래로 불가리아 사람들이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처럼 성(聖)과 속(俗)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숨 쉬고 있는 게 아닐까.

불가리아는…

인구 720만명 다민족 국가
다큐멘터리·인형극 수준 높아

유럽 동남부 발칸반도에 위치한 나라다. 공식 국명은 불가리아공화국(The Republic of Bulgaria). 면적은 11만879㎢, 해안선의 길이는 354㎞로 몇몇 해변은 휴양지로도 이름이 높다. 인구는 약 720만 명. 수도는 소피아(Sofia)다. 루마니아, 그리스, 터키, 세르비아, 마케도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불가리아인이 전체 인구의 83%를 넘고, 터키인(9.5%), 마케도니아인, 아르메니아인, 러시아인, 그리스인이 함께 생활한다. 전형적인 다민족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불가리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터키어와 마케도니아어를 쓰는 사람도 적지 않다. 국민의 대다수가 불가리아정교(83%)를 믿고, 소수의 이슬람교도(12%)와 가톨릭교도(2%)가 있다. 화폐 단위는 레바(Leva). 1레바는 한국 돈 약 615원이다.

주된 산업은 농업으로 1950년대엔 구(舊) 소련 방식의 농업집단화를 실시했다. 소련 붕괴 직전인 1989년부터는 새로운 경제체제를 받아들여 기술력을 높이고, 생산방식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세계의 변화에 따라 현재는 농업생산물의 질적 향상을 추진 중이다. 국내총생산은 516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6천700달러다.

한국과는 1990년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1994년에는 문화 협정과 이중과세방지 협정, 무역 및 사증면제 협정을 맺었다. 한국은 합성수지, 승용차, 섬유 등을 불가리아로 수출하고 금속광물, 사료 등을 불가리아에서 수입한다.

1990년 한국전통무예단이 불가리아를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1992년 한국·불가리아 문화교류협회가 발족했다. 이후 서울에서 `불가리아 아트 페스티벌`이 열리는 등 양국 간 문화교류가 활발한 편이다.

디나르 알프스산맥과 연결된 발칸산맥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어 국토는 2개의 유역으로 나뉜다. 발칸산맥 북부는 겨울이 길고 눈도 많이 내린다. 반면 발칸산맥 남부는 겨울이 온화한 대신 여름철 기온이 매우 높고 덥다. 국토의 40% 가량이 산지로 이뤄져 석탄, 석유, 철, 망간, 납, 아연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다큐멘터리와 인형극의 수준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많은 수의 국민들이 축구, 레슬링, 배구 등의 스포츠를 좋아한다. 다뉴브강(江)과 흑해에서는 낚시와 요트를 즐기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강력범죄는 잘 발생하지 않지만 소매치기나 좀도둑은 적지 않다. 복잡한 곳에서는 여행자 스스로 가방과 지갑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류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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