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년의 비밀 경주 고분을 찾아서
⑩ 백일홍과 까치가 반기는 대릉원의 여름

▲ `대릉원의 여름`은 고분 사이에 활짝 핀 백일홍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 `대릉원의 여름`은 고분 사이에 활짝 핀 백일홍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중학교 시절 수학여행 이후 31년 만에 경주 대릉원을 다시 찾은 건 겨울의 기운을 채 떨치지 못한 올 초봄이었다. 고분 위 잔디는 아직 물기와 푸른 기운을 머금기 전이었고, 쌀쌀한 날씨 탓에 관광객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다소 황량한 풍경.

하지만, 이후 취재를 위해 봄기운이 완연했던 4~5월에 다시 방문했을 때는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대릉원을 포함한 경주 일대가 벚꽃과 유채꽃으로 환했고, 가족 단위의 관광객과 연인들로 인해 도시 전체가 젊은 에너지도 가득했다.

대나무·소나무 우거진 역사의 보물창고엔
미추왕릉·천마총 등 이십여 봉분이 옹기종기
계절마다 다른 매력, 여행객 발길 이어져


`감수성 가득한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하는 소설가 강석경은 대릉원의 봄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미추왕릉에서 왕들의 계곡으로 걸음을 옮기니 고분 뒤편에 또 고분, 능선이 숨바꼭질하듯 변한다. 내 가슴은 희로애락으로 들끓건만 자연의 곡선은 저리도 평화로운가. 뱀 허리처럼 휘어진 오솔길로 들어서자 좌우 앞뒤로 거대한 고분에 에워싸이고, 봄날 풀이 막 돋기 시작하는 금빛 고분들 속에 서 있으니 여기가 무릉도원인가 싶다.”

이처럼 아름다운 `봄날의 대릉원`을 두어 차례나 보았으니, 당연지사 `대릉원의 여름`도 궁금해졌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다.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선 다시 2개월을 기다려야했다.

그리고, 뜨거운 햇살이 드러난 팔다리를 까맣게 태우는 7월 중순. 대릉원을 다시 찾았다. 차를 세우고 입장권을 구입해 들어선 입구에서부터 기자의 기대는 찬탄으로 바뀌었다.

시원스레 몸을 하늘로 뻗어 올린 대나무는 푸르른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쉴 공간을 제공하고 있었고

▲ 푸른 그늘을 만들어 대릉원을 찾은 관광객들에 쉼터를 제공하는 대나무숲.
▲ 푸른 그늘을 만들어 대릉원을 찾은 관광객들에 쉼터를 제공하는 대나무숲.

, 고분 사이사이에 꽃을 피운 백일홍은 대릉원을 찾은 중년의 여인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100일간 꽃을 피운다하여 `백일초`로도 불리는 백일홍은 그 강렬한 진분홍 빛깔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매력적인 꽃이다.

경주의 여름은 인간만이 아닌 미물들까지 설레게 하는 힘이 있어서일까? 높디높은 미추왕릉 봉분 위에서 까치 몇 마리가 날개를 접고 종종걸음을 쳤다. 그 옛날 왕에게 예의를 표하는 듯도 보였다. 대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대릉원 한 구석에선 청설모가 겁도 없이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얼마나 신이 났는지 좌우도 돌아보지 않는다.

선생님의 인솔 하에 친구들과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왔다는 에밀리(18)는 산처럼 거대한 왕들의 무덤과 기묘하게 자라난 소나무들, 거기에 분홍색 꽃과 귀여운 청설모 사이에서 거의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해보였다.

“한국은 처음인가요? 여기 어때요”라는 질문에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풍경이에요. 정말 놀랐고 너무 아름다워요”라고 답하는 에밀리의 목소리는 한국의 또래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청명하고 귀여웠다.

방학을 맞아 멀리 경기도 수원에서 경주를 찾은 대학생 커플 김OO씨와 강OO씨는 스물한 살 동갑내기. 어제 오후 경주에 도착해 옛 궁궐터와 국립박물관, 동궁과 월지, 첨성대 등을 둘러보고 하룻밤을 묵은 후 대릉원을 찾았다는 연인은 학구적이었다.

 

▲ 대릉원, 할아버지가 책을 읽으며 여름과 맞서고 있다.
▲ 대릉원, 할아버지가 책을 읽으며 여름과 맞서고 있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금관총을 꼼꼼히 둘러보고는, 그걸 작은 공책에 메모하던 강씨는 “1천500년 전 사람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금관을 만들어냈고, 예술적 감각으로 빚은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었다는 게 신비롭게 느껴져요. 어렵게 생각됐던 역사가 책에서 볼 때와 달리 직접 현장에 와서 보니 흥미롭게 다가서네요”라며 백일홍처럼 빛나는 웃음을 지었다.

대릉원 한편에는 경주에서 진행된 각종 토목공사 현장에서 찾아낸 신라시대의 석조물을 모아놓은 공간이 있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한 분이 그 석조물과 짙게 드리워진 나무그늘을 배경으로 점잖게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선뜻 다가가 말을 건네기가 어려울 만치 엄숙한 풍경이었다.

기자는 상상했다. 저 노인은 사라지는 세상의 풍경과 때마다 돋아나는 새로운 생명, 화려했지만 동시에 덧없었던 왕들의 생애와 반복되지 않기에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인간의 삶을 기록한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때쯤 다시 한 번 강석경의 결 고운 문장이 떠올랐다.

“대릉원으로 들어서니 하늘로 뻗은 노송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화단에 심어진 나무 잎들이 바람에 물결친다... 경주엔 능이 많아 소나무가 많고 자연환경이 좋은 것 같다... 선조들의 꿈이 묻힌 능은 그 크기만큼 우리들에게 환상을 주니 경주를 경주답게 하는 주역은 능이다.”

경주를 경주답게 해주는 능. 그 능 스물셋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대릉원은 `역사의 보물창고`에 다름없다. 소중한 것도 너무 가까이 있으면 소홀하게 대하기 쉽다. 혹, 경주의 역사와 빛나는 문화유산도 그런 취급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오늘날 우리에게 대릉원은 무엇이고,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역사란 어떤 의미인가?

화사한 인사로 사람들을 배웅하는 백일홍과 올곧은 기질이 군자를 닮은 대나무숲 사이를 빠져나오는 순간, 벌써부터 `대릉원의 가을`과 `대릉원의 겨울`이 궁금해졌다. 이 기다림 또한 달콤할 것이리라.

▲ 도심 속에 자리한 공원 형태로 조성된 대릉원.
▲ 도심 속에 자리한 공원 형태로 조성된 대릉원.
미추왕이 잠든 거대한 `신라의 정원`
시내 한가운데서 산책하며 역사공부 즐기는 드문 체험

총면적 41만4천545㎡(12만5천400평)의 `거대한 정원`이라 이름 붙여도 좋을 대릉원은 경주시 황남동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선 신라시대 왕과 왕비 그리고, 귀족의 유택으로 추정되는 23기의 고분과 만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신라왕조 최고 권력층의 사후 집단거주지`인 것이다.

`대릉원`이란 명칭은 `삼국사기`에 서술된 “미추왕을 대릉(大陵)에 장사지냈다”는 문장에서 착안해 지었다고 한다. 미추왕은 신라 13대 왕으로 262년부터 22년간 재위했다.

그는 백성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성군이었다. 농민 등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그들의 형편을 살폈고, 노인을 존중했다. 가뭄과 홍수 등 천재지변이 있을 때는 사신을 각 지역으로 파견해 피해 정도를 보고받은 후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궁궐을 증축하자는 대신들의 건의도 “백성들에게 힘든 일을 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며 거부했다. 이런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니, 백성들이 미추왕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른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신라만의 독특한 무덤군(群) 형태를 취하고 있는 대릉원은 사적 175호인 미추왕릉과 대량의 금관과 유물이 발굴된 천마총 등이 자리하고 있어 일 년 내내 여행객과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또한 대릉원은 경주 외 다른 지역과 달리 평지에 고분을 조성했기 때문에 `산 자`와 `사라진 자`의 흔적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독특한 `관광 포인트`로서도 그 의미가 크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시내 한 가운데서 확인하는 드문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1970년대에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역사공부와 산책을 겸할 수 있도록 공원처럼 조성한 대릉원은 경주시민들에겐 자랑할 만한 휴식공간이 되고, 국내외 관광객들에겐 세계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대릉원을 조성할 당시 발굴된 유물은 숫자도 숫자지만, 인류학적·고고학적 가치도 높은 것들이 상당수다. ◆서수형 토기 ◆수레형 토기 ◆상감목걸이 ◆천마도 ◆금관 및 각종 금장신구 등은 천년 세월의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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