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평의 무덤에 낙엽 비만 내린다

▲ 왕평 무덤 가는 길.
▲ 왕평 무덤 가는 길.

가을은 창조주가 가장 아름답게 쓴 한 편의 시다. 미사여구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어떤 말로도 방점 찍을 수 없는 어휘력의 부족함, 자연의 힘이다. 산도 울긋, 사람도 불긋, 등산객들의 옷차림이 단풍든 나무다. 하마터면 단풍나무와 은행나무가 걸어가는 것으로 착각할 뻔했다. 사람들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낙엽 침대 위에 누워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다. 이 세상 누구의 집이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어느 부자도 이런 집에선 살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 편지가 날아온다. 가을이 주는 축복을 두 손으로 고이 잡는다.

여기저기서 사진 찍느라 바쁘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면서. 부부가 다정하게 사진 찍는 것을 보고 시샘 난 일행이 “아즉도 그럭케 부터 있고 십나. 고마 떠러져랴. 이젠 다른 거 하나 자바라” “다른 거 언제 삼십 년 길들여서 사노. 그러다 늙어 죽어 삔다. 기냥 살란다” “야야, 고마해라. 금실이 얼매나 조은데 깨 놀라 카노.” 한때, 남편 재 사용법이나 남편을 판다는 등의 글들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적이 있었다. 가을 나무 옷 색깔만큼이나 삶의 무늬도 다양하다.

청송군 청송읍 파천면 송강리에 있는 수정사 가는 길에 목계 성황당이 있다. 마실의 안녕과 번창을 기원하며 동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목계 성황당은 유형문화 유산 제24호로 1940년 안동 권씨의 현몽을 계기로 지어졌다. 당시 마실 농지에 멧돼지 출현으로 피해가 막심했는데 하루는 권 씨 꿈에 성황신이 나타나 거처가 마땅치 않다고 꾸짖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마실 사람들은 성황당을 지었다. 그 후, 신기하게도 멧돼지 피해가 없어졌다고 한다.

수정사 가는 길목에 목계 솔밭이 있다. 이백여 그루의 소나무들이 장관을 이룬 곳이다. 그윽한 솔 향을 맡으며 수정사 쪽으로 걸음을 옮겨본다. 숨이 가쁘다 싶을 정도의 거리에 무덤 두 개가 나온다.

“잡초만이 무성한 성터에는 고요한 달빛이 푸르게 비친다다다. 어디서 들리는지 풀벌레 소리이이, 외로운 나그네의 발걸음을 멎게 한다. 일제의 탄압 아래서 우리 민족의 설움을 실어 즐겨 부르던 황성옛터어어어, 그 옛날을 그리며 이애리수 노래를 들어봅니다.” 변사의 신파조 목소리에 가수는 경기 개성 사투리로 노래를 불렀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어른들을 따라 흥얼거리던 그 노래의 작사가 왕평 이응호 선생은 청송읍 파천면 수정사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황성 옛터는 항일가요 1호이자, 우리나라 가요의 효시이며 조선의 세레나데이다. 이 노래를 듣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민족 정서를 반영했다. 이로 왕평 이응호 선생은 일경에 잡혀가 많은 고초를 당하였다. 황성 옛터는 일제에 의한 최초의 금지곡이 되었다. 선생은 이후에도 일제에 항거하는 의미로 민족성이 강한 노랫말을 담아 `대한팔경`과 `조선행진곡` 같은 노래를 만들었지만 일제에 의해 모두 금지곡이 되었다. 선생은 1908년 영천군 성내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부친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영천 보통학교를 나와 서울에 있는 배제 중학교에 다녔다. 어린 시절 조부 산소의 비문을 직접 쓸 정도로 신동이었다. 1941년을 평북 강계에서 신카나리아 여사와 함께 `남매`라는 극 공연 도중 고혈압으로 무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조계사에서 화장 후 수정사 앞에 묻혔다. 그때 나이 삼십삼 세였다.

당시 무대 감독이며 작사자인 왕평과 바이올린 연주자요, 작곡가인 전수린이 개성 공연을 마치고 고려의 황궁인 달빛이 비치는 만월대를 산책하고 있었다. 고려의 퇴락한 성터엔 무성한 잡초만 우거져 있고 풀벌레 소리만 들여왔다. 비 내리는 객지의 여인숙에서 만월대의 밤을 회상하던 전수린은 바이올린을 들어 즉흥적으로 연주했고 그 멜로디를 왕평은 오선지에 옮겼다. 그해 가을 그들이 단성사에서 공연할 때 이애리수는 막간을 이용해서 `황성 옛터`를 불렀다. 객석에 있던 관객들은 식민지 설움과 애절한 노래 가사에 눈물을 흘렸다. 이때부터 이애리수가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 관객도 함께 부르게 되었고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조선총독부는 조선 민족의 자각을 선동할 수 있다고 하여 발매를 금지했다. 또 이 노래를 부르는 조선인을 발견하는 즉시 심문하고 취조했다. 대구의 한 보통학교에서는 창가 시간에 이 노래를 불렀다고 음악 선생이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왕평과 전수린은 이 일로 종로 경찰서의 취조를 받고 유치장에 갇혔다. 그러나 황성 옛터는 끈덕지게 불렸고 이애리수는 민족의 여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술좌석에서 황성 옛터를 즐겨 불렀다. 노래 속의 황성(荒城)은 주권을 잃은 대한제국을 상징한다. 왕평 선생의 업적에 비해 봉분 없는 초라한 무덤이 퇴락한 고려의 옛터를 보는 듯하다.

신동은 왜 요절하는가. 요절했기에 오래도록 우리의 기억 속에 머무는가.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무덤 앞에 낙엽 비만 소리 없이 내린다. 내 차에 단풍잎 하나 따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