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우리가 맺어가는 인연들 신비로운 7가지의 운명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4-02-21 02:01 게재일 2014-02-21 13면
스크랩버튼
 `마치 계시처럼`  이명행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288쪽
장편소설 `사이보그 나이트클럽`을 통해 현실과 허구의 `익사이팅`한 대결을 보여준 소설가 이명행이 설화적 원형이 풍부하게 함축된 첫 소설집 `마치 계시처럼`(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번 소설집의 작품들을 쓰는 동안 `관계`와 `이야기`에 관심을 두었다고 밝혀놓았다. 우리가 맺어가는 인연들의 닿음닿음마다 신비로운 운명이 어려 있음을 얘기하는 일곱 편의 소설을 만나보자.

소설집의 첫머리에 놓인 `숨결`은 새벽 2시만 되면 모르는 여자로부터 전화를 받는 치과 의사의 이야기다. 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주인공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댄다. 주인공은 너무나 엉뚱한 이 상황을 생각처럼 쉽게 거부하지 못하고 그가 앓고 있던 불면증은 더욱 심각해진다.

`완전한 그림`에는 불현 듯 현실이 숨 막혀 가출을 감행하는 중년 남자가 등장한다. 제목 `완전한 그림`은 홀로그램을 우리말로 풀어 쓴 것인데, 홀로그래픽 필름의 아주 작은 조각에도 이미지 전체의 정보가 담겨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불발된 인연`과의 옛 기억을 하나하나 채취해가는 남자의 여정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표제작 `마치 계시처럼`에서 눈에 띄는 이미지는 하얀 소복을 한 기차다. 주인공이 고향에서 유년에 간접적으로 겪은 열차 사고가 중년에 접어들도록 의식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인데, 주인공이 이를 극복하고자 고향으로 찾아갔을 때 새록새록 돋아나는 기억들이 아프고도 따스하다.

뒤를 잇는 `통증` `변신의 끼` `푸른 여로` `국경, 취우령 이야기`를 마저 따라가보면, 삶의 경로를 벗어나 떠돌다가 `마치 계시처럼` 느닷없이 엄습하는 기억들로 하여금 예상하지 못한 통증을 겪어내며 삶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인물들을 계속 만날 수 있다. 기억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인간이 도구 없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기재일 것이다. `마치 계시처럼`의 수록작들이 모두 특별히이 `기억`을 향해 촉수를 민감하게 뻗고 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

이명행의 소설들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운명이나 우연과 같은 불확정적인 질서에 내던져진 인물을 통해 그 질문의 답을 찾고자 한다. 우연과 운명은 예측할 수 없는 공포와 절망을 불러일으키고 이 세계를 모순의 연속이자 집합으로 이해하게끔 한다. 그러나 이명행의 인물들은 절망의 끝에 서 있긴 하지만 운명과 우연도 이 세계를 움직이는 질서의 한 갈래로 받아들이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삶을 경이롭게 맞이하도록 만들어주지 않는가 하는 긍정의 여지를 둔다.

문학평론가 김진수는 이명행의 이러한 작업을 `모순의 통일`이라 말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스크랩버튼